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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문화·예술 황무지 일구고 흙으로

[별별 Tallk]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영면

입력 2020-10-29 18:00 | 신문게재 2020-10-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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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사진은 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 (연합)

 

“문화예술계에 미친 공헌도는 단연 정상급이에요. 그야말로 거목으로서 큰 역할을 했죠.”

스스로를 “장학금을 받은 수혜자”라고 표현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삼성미술관 리움 건립을 함께 했다. 미술을 비롯해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큰 분”이라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회상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7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한국 산업 부흥은 물론 문화예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회장은 영화광이며 미술애호가였으며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이 회장은 산업화, 국가발전에 방점을 찍었던 시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불모지였던 한국사회에 문예 부흥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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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미술관 리움, 호암미술관 설립 및 운영으로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미술작품들을 향유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최고죠. 어떤 국공립 박물관이나 미술관 소장품 보다 귀한 문화재, 국보 등 고미술품들이 즐비합니다. 보관 수준도 전문적이죠.” 

 

이렇게 밝힌 한국메세나협회 주순이 홍보팀장은 이어 “미술 애호가이자 후원자일 뿐 아니라 정·농악, 현대무용, 장애인 예술가 등도 오랫동안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반가상’, 국보 133호 ‘고려청자동화연화문표주박모양주전자’ 등과 보물 557호 ‘신라시대 금귀걸이’ 등 국보·보물 150여점이 이건희 회장과 그의 아내 홍라희 리움 전 관장, 삼성문화재단의 소장품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추진한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로 고미술품들을 수집해 온 이 회장 부부는 미국의 세계적인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매년 선정·발표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온 컬렉터이자 미술후원자다. 

 

다수의 미술관계자에 따르면 “이 국보와 보물들을 호암미술관을 통해서도 많이 공개했지만 여타의 주요 전시들에도 아낌없이 대여해 많은 분들이 향유할 수 있게 했다.” 고미술 뿐 아니라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최고가에 작품이 거래되는 추상화가 이우환 등과의 인연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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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96년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의 치료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 역시 이건희 회장이었다. 1984년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파리 집에서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의 주선으로 이뤄진 홍라희 전 관장과 백남준의 만남은 1987년 이건희 회장과의 인연까지 이어졌다. 

 

이후 백남준 작가는 삼성전자의 공식 후원을 받기 시작해 1003대의 TV모니터로 설치한 88서울올림픽 기념작인 ‘다다익선’ 등을 발표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밀레니엄 첫 기획전이자 아시아인의 첫 개인전을 열면서 백남준이 ‘무상’을 내세운 소니 대신 삼성전자 TV를 사용한 일화도 유명하다. 

 

작품 초기 제작 뿐 아니라 보수 및 교체작업까지도 삼성전자에서 하고 있는 백남준 뿐 아니라 이 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문인 이우환 작가의 2011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등의 전시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영화광이기도 했다. 어려서 떠난 3년 간 일본 유학시절의 외로움을 1200편이 넘는 영화로 달랠 정도였다. 그는 삼성영상사업단을 통해 ‘쉬리’ ‘결혼이야기’를 제작·투자했고 홈비디오 시장을 열기도 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1995년 ‘할리우드 방식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목표로 삼성물산의 영상 및 방송사업, 삼성전자의 음반사업, 제일기획의 방송 및 음반사업 등을 통합해 출범했다.

당시는 대부분 대기업의 문화사업이 홍보팀이나 쇼핑부문에 소속돼 추진되곤 했는데 기업홍보나 쇼핑 마인드로 문화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지욱 평론가는 “이를 지켜보던 삼성, 대우 등 대기업이 본격적인 문화사업에 뛰어들었다”며 “그때의 어려움과 부족함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며 초석을 다진 삼성, 대우의 영상사업단이 있어서 현재의 CJ, 쇼박스, 롯데 등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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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운구차량이 서울 리움미술관 앞을 지나고 있다.(연합)

 

당시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에 이은 ‘해피투게더’ 등으로 아시아 최고로 군림하던 왕가위 감독, ‘하녀’ 등의 김기영 감독 등이 심사위원으로 동원되기도 했던 단편영화제 등으로 감독, 배우, 작가, 스태프, 영화전문기자 등을 꿈꾸는 영화학도들이 모여들었던 삼성영상사업단은 한국 역대 최고 흥행작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대리급으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제작·투자, 극장 운영은 물론 음반, 공연 제작 등 문화사업을 이끌던 삼성영상사업단은 외환위기 등의 악재가 겹친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99년 출범 4년만에 문을 닫았다. 정지욱 평론가는 “삼성영상사업단은 이건희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라며 “대기업이 자본력을 가지고 영상사업에 뛰어든 것은 산업 전반에 시너지와 긍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수익이나 그에 준하는 대가가 따라야 하는 기업마인드로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하지만 그렇게 뿌린 씨앗이 뿌리를 내려 성숙해진 토양 안에서 지금의 한국문화 부흥을 이끈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문화사업의 초기단계는 투자 뿐입니다. 1, 2대에서 큰 성과를 보기 보다는 투자의 연속이죠. 4대 이상은 이어져야 문화사업이 열매를 맺게 될텐데 1, 2대 이병철·이건희 회장이 잘 이룩한 삼성의 문화적 업적을 3대까지 잘 이어가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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