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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조선잡사(雜史)> 강문종 외

조선시대 다양한 직업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웃픈 얘기들

입력 2021-01-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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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잡사
조선의 다양했던 직업들을 소개한 책이다. 고전을 연구하던 저자들이 의기투합해 보장사, 매골승, 표낭도, 거벽 등 지금은 사라진 이름의 조선시대 직업들을 발굴해 이해하기 쉽게 서술했다. 모 중앙일간지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던 기획물이다. 각각의 직업이 가진 고유의 특성과 그 직업이 탄생하고 확대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 등에 관해 풍부한 사례와 함께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옛 직업명에서 묻어나는 해학과 위트도 재미나다.


* 삵바느질 하던 침모(針母) - 조선시대에 관청 소속 여종과 기생들은 본연의 업무가 있어 바느질과 같은 사적인 일은 침비(針婢) 혹은 침가(針家)에 맡겼다. 침비는 침선비(針線婢)라고 해, 바늘과 실을 다루는 여종을 뜻한다. 침모라고도 했다. 침선비를 따로 둘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가난한 양반 집에서는 삵바느질이 부인들의 몫이었다.

* 신부 도우미 수모(首母) - 수모는 ‘머리 어멈’을 이르는 수식모(首飾母)의 준말이다. 지금의 헤어 디자이너다. 궁중 여성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가체를 손질한 사람도 이들이었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수모가 40명 정도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기 많은 수모를 부르는데 뒷돈이 오가는 부정이 횡행하자 정조가 가체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기도 했다.



* 변방 가사 도우미 방직기(房直妓) -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하면 1년 동안 의무적으로 최전방인 함경도 등지에서 복무해야 했다. 이들을 ‘출신군관’이라고 해 토착 군관들보다 높이 대우해 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가정을 이뤘더라도 임지로 데리고 가지 못했다. 국방의무에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대신 방직기를 한 명씩 배정해 함께 숙식하며 도움을 받도록 했다. 당번병이자 가사 도우미였던 셈이라 적지 않게 로맨스가 싹트기도 했다고 한다.

* 해녀의 원조 잠녀(潛女) - 지금의 해녀를 조선시대에는 ‘잠녀’라고 불렀다. 바닷 속으로 들어가 수영과 잠수를 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포작(鮑作)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도 여성이 훨씬 수가 많았다고 한다. 워낙 관아의 요구가 많아 일이 고되자 남자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리는 바람에 남아있는 여성들이 일을 모두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해남이 없고 해녀가 대세인 이유다.

* 사형집행인 회자수 - 우리말 속어로 ‘망나니’라고 하는 직업이 회자수다. 원래는 삼국지의 관우가 휘두르던 청룡연월도 같은 ‘회자’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군인을 지칭했다. 이후 공포감을 주는 의장용 칼로 쓰이다 사형도구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회자수들은 사형수가 돈을 미리 주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장거리 연락책 보장사(報狀使) - 중국 역사책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은 걸음걸이가 전부 달리기다’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예로부터 마라톤의 나라였다. 세종실록에는 잘 달리는 무사들을 고을에 번갈아 배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을과 고을을 오가며 공문을 전달하던 직업이 보장사였는데, 대개는 가난한 아전들 가운데 임명되었다고 한다.

*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 - 중국 원나라에서 전문사냥꾼인 ‘착호인’을 고려로 보내 호랑이를 사냥케 할 정도로 한반도는 유명한 호랑이 사냥터였다. 자연히 백성들이 호랑이에게 화를 입는 일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서울에 배치된 착호인을 착호갑사라고 했다. 180보 밖에서 목궁을 한 발 이상 명중시키고, 두 손에 각각 50근(30kg)을 들고 100보 이상을 한 번에 가야 임명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 보면 440명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일 먼저 명중시킨 사람에게 호랑이 가죽이 하사되었는데 당시 가격이 보통 100냥 정도로 서울 초가집 한 채와 맞먹었다고 한다.

* 강 건너지기 월천꾼(越川軍) - 길손을 등에 업거나 목말을 태우고 사내를 건너게 해주고 품삯을 받던 사람들이다. 섭수꾼(涉水軍)이라고도 했다. 가마나 무거운 짐을 옮겨 주기도 했다. 생업을 유지하다 냇물이나 강물이 불었거나 얼음이 단단히 얼거나 녹기 시작하는 대목에 활동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 직업이 서민의 발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 사냥을 생업으로 한 산척(山尺) - 조선에서는 야생공물 가운데 꿩과 호랑이를 중히 여겼다. 꿩고기는 응사(鷹師)라는 매 사냥꾼을 동원해 잡았는데 산채로 잡는 이를 특별히 망패(網牌)라고 불렀다. 이들과 달리 민가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을 ‘산척’이라고 했다. 이들은 규율이 엄격해, 산에 들어가기 전에 아내와 잠자리를 못하게 했다. 상갓집 조문도 불허되었다고 한다.

* 극락왕생 비는 매골승(埋骨僧) - 시신을 수숩해 주는 승려를 이르는 매골승은 고려조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고려말 요승으로 불렸던 신돈도 매골승이었다고 한다. 당시만해도 승려는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이었다. 하지만 기근이나 냉해 홍수 역병 등으로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나가자 시신 수습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 분뇨처리 예덕(穢德) 선생 - 우리나라에 공중화장실에 처음 등장한 때가 15세기였다. 하지만 양반들은 이걸 사용하는 것 조차도 욕되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처리하는 분뇨 처리업자를 높여 박지원이 단편소설을 쓰면서 ‘예덕선생’이라는 말리 보편화되었다. 더럽지만(穢) 덕(德)이 있다는 뜻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이 직업의 연봉이 60냥이었다고 한다. 18세기 한양의 괜찮은 잡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 소방수 금화군(禁火軍) - 세종 때 기록을 보면 한양에 한 번 불이 나면 100채 정도는 금새 타 버렸다고 한다. 크고 작은 화재가 빈발하자 세종은 조선 최초의 소방기구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고 금화군 또는 멸화군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수를 배치했다. 당시는 불은 화재지역 인근의 우물 등에서 길러 온 물 항아리로 끄는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물을 직접 뿌리는 방식의 수총기(水銃器)는 1723년 경종 3년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 후원자를 두고 바둑을 둔 기객(棋客) - 조선시대에는 바둑이 인기였다. 내기 바둑도 많았다고 한다. 생활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원자가 있는 바둑 기사가 생겼는데 이들을 기객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유명 기객으로는 김종귀, 양익빈, 변홍평, 정운창 등이 회자된다. 바둑기사 중 최고봉에 오른 이를 국수(國手) 또는 국기(國棋)라 불렀다.

* 소설 읽어주는 ‘전기수’ - 18세기에 조선은 소설이 흥했다. 당시 한양에 책 대여점, 즉 세책점(貰冊店) 열다섯 곳이 성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백성은 문맹인데다 비싼 책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소설책을 읽어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전기수가 생겼다. 이들은 저잣거리에 좌판을 깔고 공짜로 소설을 읽어 주며 일부 푼돈을 챙기다가 나중에는 일정한 돈을 받고 부유층을 상대하기도 했다.

* 마술하는 환술사(幻術士) - 조선에서는 마술을 환술, 마술 공연을 환희, 마술사를 환술사라고 불렀다. 16세기 실존 인물인 전우치도 유명한 환술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통념이 강해 많은 환술사들은 음지에서 활동했고 일부는 환술을 이용해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공연으로 정착해 남사당패 공연의 한 일부를 맡어 자리매김한다.

* 활과 화살 만든 궁인(弓人)과 시인(矢人) - 궁인과 시인은 다른 장인들보다 우대를 받아 ‘장(匠)’이 아닌 ‘인(人)’으로 불렸다. 제작기술 유출을 우려해 중국 사신과의 접촉까지 막았을 정도였다. 활과 화살은 철저히 분업으로 만들어졌다. 화살촉을 만드는 전촉장(箭鏃匠), 화살촉을 날카롭게 가는 연장(鍊匠),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장(阿膠匠), 화살통을 만드는 시통장(矢筒匠)이 있었다. 활의 종류는 재질별로 다르다. 대나무로 만든 죽궁, 탄력좋은 산뽕나무나 박달나무로 만든 목궁, 물소뿔로 만든 각궁, 사슴뿔로 만든 녹각궁, 쇠나 놋쇠로 만든 철궁과 철태궁 등이 있다.

* 붓 만드는 필공(筆工) - 붓 만드는 필공 혹은 필장(筆匠)은 족제비 털에서 뽑은 ‘황모필(黃毛筆)로 만든 붓을 으뜸으로 쳤다. 중국에서 족제비 털을 수입해 붓을 만들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명나라 조정에 조공품으로 올릴 정도였다. 필공은 공조(工曹)에 소속되어 붓을 만들었는데 아전들이 붓을 뇌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갈취의 표적이 되곤 했다.

* 종이 만드는 지장(紙匠) -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수요가 크게 늘자 태종이 1415년에 조지소(造紙所)를 만들었고 700명에 가까운 지장들이 이곳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종이를 만들려면 닥나무와 잿물, 황촉규(닥풀)이 필요했다. 닥나무는 1년생을 많이 썼고. 잿물은 메밀대와 고춧대를 태워 만든 재에 물을 통과해 만들었다. 100명의 손이 필요하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 불렸다.

* 저잣거리 소매치기 표낭도(剽囊盜) -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남의 주머니를 훔치며 활개했던 이들을 빠를 표(剽)자를 써서 이렇게 불렀다. 1921년 신문을 보면, 1920년에 총 333건의 소매치기 사건이 보고되었는데 전차 안이 233건으로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 매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 -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았다거나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공장을 맞겠다고 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는 직업적 매품팔이도 등장한다. 곤장 100대를 맞고 고작 일곱냥을 받았고 그렇게 하루에 세 차례나 매품팔이를 하다 죽고 만 이야기가 회자된다.

* 대리시험자 거벽(巨擘) - 고위 공직자를 객관적 평가로 선발한 나라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 뿐이다. 어느 무엇보다 공정해야 했지만 조선시대 과거는 기상천외한 부정행위가 난무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존재가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거벽’이었다. 영남의 유명한 거벽 유광억이라는 사람은 장원급제를 수차례나 만들어주어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 사채업자 식리인(殖利人) - 조선은 대출 사업이 매우 성행했다. 초기부터 쌀이나 비단으로 대출사업용 펀드인 대금(貸金)을 조성했고, 18세기에 화폐가 이를 대신했다. 대출 자금 조성 행위를 입본(立本)이라고 했고 대출 사업은 식리(殖利), 대출 이자는 이식(利息)이라고 했다. 대출자와 차입자를 연결해 주는 환도중(還都中)이라는 직업도 있었다.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 경국대전에 대출 금리가 연 20%를 넘지 못하게 규제 조항을 넣었으며, 자모정식(子母定式)이라고 해서 이자를 갚지 못하더라도 이자 총액이 원금의 50%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 짝퉁 파는 ‘안화상’ - 조선 후기 한양에는 큰 시장이 세 곳 있었다. 운종가(종로2가), 배오개(종로5가), 소의문(서소문동)이다. 이 가운데 난전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가짜 인삼이 가장 심했고 귀한 약재와 골동품도 주요 대상이었다. 심지어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조차 작은 인삼을 풀로 붙여 크게 만든 부삼(附蔘)이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일본 쓰시마 번주가 조선에서 산 가짜 인삼을 에도 막부에게 바쳤다가 가짜가 탄로 나 외교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다고 한다.

* 군대 대신 가는 대립군(代立軍) - 조선시대에는 16세부터 60세까지 양인 남성은 모두 군사훈련을 받고 유사시에 전장터로 동원되었다. 이 때 품삯을 받고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을 대립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군졸이나 일반인이 대립군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골치였다고 한다. 대립군을 쓰는 바람에 파발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기록도 승정원에 남아있다.

* 입주 가정교사 숙사(塾師) - 조선시대에 집조차 없는 가난한 선비는 입주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 얹혀 살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들 숙사의 목표는 단 하나, 학생이 글을 깨우치게 해 과거에 합격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그 집에서 나와야 했기에 꾸준히 넉넉한 삶을 살 수는 없었자고 한다. 사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 집안의 숙사였던 노긍(盧兢)은 조선 후기 3대 천재로 꼽힐 만한 인재였다고 한다.

* 이쁜 글씨 전문가 서수(書手) - 조선시대에는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전문가를 ‘서수’라고 불렀다. 18세기 후반을 전후해 서수들은 유려한 글씨를 앞세워 민간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서수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과거 시험장이었다.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거벽이 쓴 글을 깔끔한 글씨로 서수가 필시해 주어 높은 점수를 얻곤 했다.

* 조선 과학수사대 ‘오작인’ - 죽은 변사체를 검시했던 전문가를 오작인 또는 오작사령이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는 시신에 칼을 대 훼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때문에 오작인은 해부 대신 상흔 등을 꼼꼼히 관찰해 사인을 확인하곤 했다. 연고가 없는 시신을 처리하는 일까지 맡아 천시받는 직업이었다.

* 부동산 중개업자 ‘집주름’ - 조선시대 집주름은 정보 독점 하에 장사하는 것이라 꽤 인기 직종이었다. 중개 수수료도 천냥을 매매하고 10%인 백 냥을 수수료로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고리대금의 연 이자 30% 보다는 낮았지만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복덕방에 역할을 물려주게 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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