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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필립공 별세 애도 물결… 각별한 '식민의 추억'

[권기철의 젊은 인도 스토리] 英연방 최대국가 인도 (상) 일본과 달랐던 식민지 정책

입력 2021-04-19 07:20 | 신문게재 2021-04-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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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현지의 하이데라바드 일간지에 보도된 필립공과 하이데라바드의 인연 기사 중 일부. 사진=하이데라바드 데일리 뉴스

  

최근 영국 공영방송인 BBC는 왕실 부고를 전할 때 사용하는 “BBC TV가 런던에서 전해 드립니다”라는 전통적인 멘트로 필립 공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영국 국가를 들려주며 왕실 로고와 필립 공의 사진을 내보냈다. 앵커는 울먹이며 그의 사망을 알렸다. 영 연방 국가의 일원인 인도와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53개국이 모두 큰 비중의 뉴스로 다뤘다.

인도에서도 이번 필립공의 사망을 각 언론마다 대서특필하고, 영국 여왕과 함께 인도를 방문한 필립공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가 있는 IT 중심도시 하이데라바드의 한 일간지는 여왕 부부와의 추억을 소상하게 소개했다. 그들이 1961년과 1983년, 1997년 에 인도를 방문했는데 특히 1997년 인도 독립 50주년 기념차 방문했을 때는 필립 공이 하이데라바드를 홀로 다녀갔다며 구체적으로 전했다.

하지만 그의 인도 방문은 여러 구설도 만들어 냈다. 필립 공은 1961년 세계 야생동물 기금을 주도한 열렬한 초기 환경 주의자였다. 세계 야생동물기금 창립을 주도하기 4개월 전에 방문한 인도에서 자이푸르의 번왕이었던 마하라자와 3일간 사냥하며 포획한 2.5m 길이의 호랑이 옆에서 찍은 사진, 악어와 산양 여섯 마리를 죽였던 사실을 정치인들이 비난했다. 하지만 여론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만일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일본 왕족이 한국에 오기도 어렵지만, 설사 왔더라도 이런 유사한 행위는 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추억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는 우리나라와 달리 왜 인도는 그와 그의 제국을 추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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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공(맨 왼쪽)이 1961년 인도 방문 당시에 사냥한 호랑이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그 단초를 ‘인도 제국(1858년~1947년)’이라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의 국가 이미지는 ‘해가 지지않는 나라’다. 지난 수백 년간 전세계 모든 대륙을 자신들의 식민지 대상으로 삼아 경제적 부를 이뤘다. 우수한 기술력과 군사력,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한 노동력과 자원 강탈로 이룬 결과였다.

인도 사람들은 그 시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수준으로 영국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영국 식민지들의 영연방 가입에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 가입이 강요되는 것도 아닌데도 영국에서 독립하자마자 바로 가입한다. 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아랍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가입을 했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나라는 60곳이 조금 넘는다. 독립 후 영연방에 가입한 나라는 2020년 기준으로 53개국이다. 식민지 국가 숫자가 정확치 않은 것은 독립 후 두 나라가 한 나라로 통합되거나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흡수된 경우, 반대로 한 국가가 두나라로 분리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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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 국기.

 

영연방 가입국이라고 해서 전부 영국의 식민지였던 것도 아니다.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의 식민지 파푸아 뉴기니나 남아공의 식민지 나미비아 등 식민지의 식민지가 영연방에 가입된 경우도 있다. 카메룬은 국토의 90%가 독일 식민지였고 일부만 영국 식민지였다가 영연방에 가입했다. 모잠비크나 르완다 같이 포르투갈이나 벨기에 식민지로 영국과는 아예 관계가 없던 나라가 영연방에 가입한 경우도 있다.


영연방 국가의 인구는 24억 명으로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에 이른다. 영연방 국가의 영토는 세계 영토의 21%를 차지한다. 2019년 기준으로 회원국의 국내 총생산은 100조 달러를 넘어 전 세계 GDP의 14%에 이른다. 이 중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인도다.

식민제국은 식민지에서 극악한 착취와 무력 탄압과 가혹한 처벌이 일반적이다. 식민국민들의 저항과 독립투쟁 과정에서 식민지들은 독립 후에도 좋은 관계를 갖기 어렵다. 독립 후 외교 관계를 통해 상호 교류하지만 식민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경제·정치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다.

그런데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 후에도 영국을 떠나지 않고 심지어 4년마다 올림픽과 유사한 영연방 체육대회를 열며 돈독한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무엇이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이런 관계를 가능하게 했을까?

식민 통치 과정에서 프랑스는 강력한 지배를 위해 직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본국에서 온 많은 관리 인력이 동원되었다. 이는 식민지 국민들과 직접적인 갈등 요인을 많이 만들게 되어 증오와 적개심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온 사람들을 인종적 차별로 다스렸다. 최상위계층은 성골, 식민지 태생의 스페인 사람은 진골, 스페인 혼혈은 6두품, 원주민과 흑인은 최하층, 이런 식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토호나 엘리트 원주민을 전면에 내세우고, 소수의 영국인이 그들을 지휘감독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식민 지배에 대한 반발이 영국인에게 미치는 것을 최소화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베트남과 알제리 등 식민국들의 독립 시도를 무력으로 탄압한 반면 영국은 미국과 식민지 독립 전쟁에서 패한 이후 식민지들과 독립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물러날 시기라는 판단이 서면 선선히 독립을 허용했다. 독일과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국력이 소진되어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식민지와의 극한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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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으로부터 ‘인도 제국’이라는 명칭을 허용받았던 시절의 인도 영토를 나타내 주는 1909년 지도.

 

또 다른 이유는 영국이 식민지를 영국과 일체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영연방 국가 시민권자들이 영국에 체류하는 경우에 최소 거주하는 지역 내 지방 단체장 선거에 투표 할 수 있는 자격도 주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영국에 지배당한 것은 ‘굴욕’이 아니라, 대영제국의 일원이 된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든 것이다. 영국은 식민지에 영어 교육을 시켰고, 영국의 제도와 문화를 이식했다. 이를 통해 식민지 국민들은 영국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 엘리트 청년을 선발해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를 떠나,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인 런던에서 생활하며 공부할 경험을 갖게 해 준 영국에 감사했다. 이들은 ‘외모가 다른 영국인’이 되어 본국으로 귀국했고, 영국은 충성스런 유학파 엘리트들을 고위직에 앉혀 식민국민들을 이끌게 했다. 영국인처럼 세련되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엘리트들을 보면서 국민들도 영국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이러한 힘은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로 보여준 자본주의, 의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영연방 가입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요인이었다.

장기간 식민지배 기간 동안 식민지 은행과 주요 산업시설들 전부가 영국 자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때문에 영국과 척을 지면 나라의 경제가 마비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경제적으로 영국에 예속되었기에 오히려 영국 자본의 철수는 치명적이었다.

또 영연방 국가들은 어느 새 모두 영어를 쓰고 법과 제도, 상거래 관행, 비즈니스 사고가 모두 영국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래와 계약에서 새롭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영국의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었다. 영연방 회원국 상호 관세 면제로 인해 무역이 용이하고 무역 비용이 다른 나라와 거래에 비해 10~15% 절감이 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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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인도제국의 국기와 휘장.

 

이 외에도 가난한 회원국은 영국은 물론 캐나다나 호주 싱가포르 뉴질랜드 같은 부자 회원국의 기술개발 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고, 영국이 만든 국제 개발원조의 혜택도 받는다. 참고로 영국은 G7 국가 중 GDP 대비 최대 원조 국가다.

영국 총리를 지낸 디즈레일리(1804~1881년)가 ‘왕관에 박힌 보석’이라고 부른 인도는 대영제국의 꽃이었다.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인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었다. 영국인들도 인도를 다른 식민지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대영제국이 강성할 때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의 명칭을 부여 받은 나라가 ‘인도 제국(Indian Empire)’이다. 1877년에 세워진 인도 제국의 황제를 영국 왕이 겸임했다. 인도에서는 ‘영국의 지배(British Raj)’라고 불렀다.

제국 안에 또 다른 제국이 만들어진 데에는 사연이 있다. 1858년부터 89년 간 존속한 인도 제국은 역사상 인도 반도 전역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였다. 당시 단일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4개국, 아프가니스탄, 네팔, 부탄의 일부, 멀리는 남예멘과 페르시아만 연안의 오만, 말레이반도의 식민지까지 포함했던 명실상부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1862년에 말레이반도의 식민지가 독립하고 1937년에는 버마와 아덴이 영국 직할식민지로 독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지역으로만 남게 되었다.

섬나라 영국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의 칭호를 획득해 황제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도 제국’ 덕분이었다. 인도 제국 설립 이전 영국은 다른 국가들이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제국을 칭한 적이 없었다. 영국의 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로서 인도에서 황제에 오르면서 스스로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국제전문 기자 speck007@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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