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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이 푸르른 시골마을, 소설보다 굴곡진 서사시

[근현대사의 흔적들] ⑥보성

입력 2021-05-11 07:00 | 신문게재 2021-05-1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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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기 위해 위해 마련된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전경. (사진=남민)

 

◇ 역사 품은 하룻밤, 문학을 꿈꾸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 잠을 자고 여관 밥을 먹어?”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 쓰일 당시 실제 ‘보성여관’ 간판으로 영업을 했던 이 여관이 소설 속에서는 ‘남도여관’으로 묘사되어 토벌대 주둔지가 됐다. 현부자집 소유로 등장하는 이곳은 5성급 호텔의 여관으로, 당시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보성여관. 보성군이 일제 시대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덕분에 역사교육의 산 현장이자 지역 문화명소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남민)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한옥과 일본식을 혼용해 지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벌교에 많이 거주하며 왕래가 잦다 보니 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 일본풍으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여관 앞길이 이른바 ‘본정통’으로 벌교의 중심거리였다. 포구에서 가까웠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묵었다. 

 

이 유물은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 건물 자체가 1930년대 그 날의 역사이자 교훈의 장이기 때문이다. 건축사적 가치와 문학사적 가치도 인정받을 만하다. 당시 벌교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성여관은 이제 역사와 문학을 품고 여관과 카페로 재탄생해 역사와 문학을 탐방하며 보성 차를 음미하려는 손님을 맞는다. ‘구 보성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132호에 이름을 올리고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성군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역사교육의 현장이자 지역 문화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산뜻한 한옥 체험형 숙박시설이자 소극장, 카페를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 하룻밤 지내기에 충분한 명소가 되었다.

 

1층 복도 오른쪽에 카페를 겸한 사무실이 있다. 카페는 일본식 주택의 창문에 붙인 긴 테이블로 꾸며져 있어 녹차 황차 국화차 등 다양한 차를 마실 수 있다. 왼쪽에는 소극장과 전시실이 있는 문화공간이다. 현관 안쪽에 자료실이 있다. 보성여관의 사료와 소설 <태백산맥> 관련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다. 안쪽 뜰에 숙박동이 있는데 외관은 일본풍, 방 내부는 한국식이다. 2층에는 다다미방 4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꽤 넓다.

 

가능하면 역사와 문학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좋겠지만, 굳이 숙박을 하지 않아도 관람은 할 수 있다. 가장 좋기로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를 답사하는 것이다. 여관을 기점으로 편하게 걸어 벌교읍을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보성여관~금융조합~조정래 조형물~홍교~김범우의 집~소화다리~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철다리~중도방죽~벌교역~보성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보성여관은 문화재청이 2008년에 문화유산 매입사업의 일환으로 사들여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 중이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처럼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가는 단체다. 후세에 자랑스런 유산을 남기고 보전하기 위해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이 여관과 함께 전국의 보존가치 높은 문화재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보성차밭 전경.  국내 내륙지방에서 최대 규모인 이곳은 국내 녹차문화의 메카로 불린다. 겨울에 열리는 ‘보성차밭 빛축제’로 더욱 유명하다. (사진=남민)

 

 

◇ 소설 ‘태백산맥’ 속 벌교… 실존하는 근현대사 속으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정하섭은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공정한 사회를 목도하곤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키로 결심한다. 천한 무당의 딸 소화는 어쩔 수 없이 무당이 된다. 가슴 한 켠에 한을 품고 살아가던 그녀는 열혈 청년 하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이 슬픈 사랑 이야기의 배경이 벌교다.

 

고단했던 근현대사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태백산맥’ 초반부의 주요 무대가 벌교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요충지였다. 일제는 순천과 여수 보성 고흥 화순 등지와 함께 내륙 수탈의 전초기지로 포구가 있는 이곳 벌교를 택했다. 원래 낙안의 변방 갯가 빈촌이었으나 일본이 낙안의 세를 꺾으려 벌교를 떼어 보성군에 편입시켰다. 낙안은 순천에 편입되어 공중분해되었다.

 

벌교는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주먹패’가 생겨났다. ‘벌교에 가선 주먹 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데, 의로운 한국청년이 일본 경찰을 때려 즉사시킨 바람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당시 읍이었는데도 치안관서가 주재소가 아닌 경찰서였다니 위세를 알 만하다.

 

벌교 포구의 작은 들판에선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따라 근현대사의 굴곡진 상처를 어루만지듯 걸어서 읍내 한 바퀴를 돌아본다.

 

 

옛 벌교금융조합 건물. 정면 중앙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형 배치로 역사적 사료가치가 높다. (사진=남민)

 

 

1729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홍교. 원래 ‘뗏목다리’여서 이름이 ‘벌교(筏橋)’였는데 이것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현재는 보물 제304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남민).

 

일제강점기 때 본정통으로 불리던 보성여관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구(舊) 벌교금융조합’이 나온다. 단층으로 흰색과 붉은색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중앙의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형 배치가 눈에 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역사적 사료가치가 높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금융조합을 조금 지나면 조정래 태백산맥 조형물이 있고 앞길로 나가면 벌교천의 아름다운 ‘홍교’가 나타난다. 원래 뗏목다리가 있었지만 홍수에 떠내려 가자 영조 5년(1729년)에 이웃 선암사 초안과 습성 스님이 석교인 이 홍교를 놓았다고 한다. ‘뗏목다리’를 한자어로 ‘벌교(筏橋)’라 했는데 이것이 그대로 지명이 된 희귀한 사례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홍교는 보물 제304호로 지정돼 있다.

 

일제가 이 다리를 허물자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 쓰고 지켜낸 역사도 전해내려 온다. 절반이 뜯겨나간 것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설 속에서 김범우가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나오는데, 산비탈까지 가면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김범우의 집’이 있다.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의 집인데, 이 집 막내아들과 조정래 선생이 초등학생 때 자주 놀았던 곳이라고 한다.

 

김범우의 집 앞에서 벌교천을 따라 내려오면 ‘소화다리’가 있다. ‘부용교’로 불리다가 일제 소화(昭和) 6년(1931년)에 건립됐다 해서 소화교로 더 많이 불린다. 여순사건과 6.25한국전쟁 때는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벌어진 아픔도 안고 있다.

 

제석산 기슭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 앞에는 원래 박씨 문중 소유의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현부자 집’이 위치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집이다. 바로 옆의 무당 ‘소화의 집’과 함께 정하섭과 소화의 애틋한 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1930년 경전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놓인 ‘철다리’는 소설 속 염상구 등 주먹패의 무대였다. 근처에는 ‘나카시마(中島)’라는 이름의 간척지 ‘중도방죽’이 갈대밭과 함께 펼쳐져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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