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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고래 도시가 산업 수도로… 富로 이어진 역사

[근현대사의 흔적들] ⑦울산

입력 2021-05-18 07:00 | 신문게재 2021-05-1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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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전경.  사진=남민

 

◇ 울산서 고래 탐험했던 ‘인디애나 존스’ 실존모델 앤드류스

 

1911년 겨울. 벽안의 서양인이 울산 동양포경회사에 들어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울산으로 들어온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라는 20대 탐험가였다. 

 

울산에서 6주 동안 머문 그는 직접 고래잡이 배를 타고 거친 바다로 나가 40마리 이상의 귀신고래를 연구했다. 귀신고래가 북쪽에서 내려와 울산 앞바다에서 다시 회귀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그의 연구 덕분에 전 세계 고래 중 유일하게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는 명칭이 생겼다.

 

앤드류스는 이후 백두산 탐험을 거쳐 중국과 몽골로 들어가 세계 최초로 공룡알 화석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탐험가의 전설로 남았던 그는 훗날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이 된다.

 

당시만 해도 “고랫배 반년 타면 논 20마지기 생긴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고랫배는 황금을 캐는 배였다. “울산 군수 하느니 고랫배를 타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선원들 밥을 해주는 최말단 ‘화장’의 한 달 월급이 도시 숙련기술자의 두 배 가까이 되었으니 고랫배 선원들은 앞다퉈 남극으로 고래잡이 가는 일본 포경선을 탔다. 태평양전쟁을 치러야 했던 일본은 고래 기름이 중요한 군수물자이기도 했다.

 

고랫배를 타려면 든든한 ‘백(배경)’이 있어야 했다. 선원 중 결원이 생겨야 충원되는데 이때 연줄을 가진 사람만이 겨우 승선할 수 있었다. 미리 일자리를 청탁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주로 십대 소년들이었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이 된 앤드류스의 흉상. 사진=남민

 

고래잡이 배에는 보통 12명의 선원이 승선하는데 ‘포수’가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이 자리는 언감생심이었다. ‘나가수’라는 대형 참고래를 많이 잡아야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실적이 안 좋으면 계약 기간 중에라도 가차 없이 해고되었다. 실적 좋은 포수는 더 나은 포경선에서 높은 임금으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포획한 고래는 빨리 해체하지 않으면 부패하기에 최대한 빨리 장생포로 이송해야 했다. 고래 해체장 등 관련 시설이 있던 장생포는 특별한 것 없던 바닷가 어촌에서 급속도로 도시화가 되어 갔다. 근대사에서 고래 어업으로 큰 부를 일군 울산은 현대사에서도 ‘산업 수도’라 불릴 만큼 산업화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울산은 전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고장이 되었다.

 

‘고래의 도시’ 울산의 역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시작된다. 고래를 비롯해 각종 동물들과 사냥하는 장면들이 200여 점 새겨져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풍속도로 국보 제 285호다. 선사시대에는 울산 시내를 관통하는 태화강 하류의 상당 부분이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래가 지금의 울산 시내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던 것으로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중상류의 지류인 대곡천에 위치해 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 내부 모습. 사진=남민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부위별로 회나 수육 찌개 등 여러 형태로 요리된다. 고래잡이가 1986년부터 금지됐음에도 장생포에는 여전히 고래고기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다만 지금 고래고기는 혼획(다른 물고기 그물에 걸려 잡힌 것)이나 좌초된 경우 인위적인 포획이 아님을 확인 받은 후에야 식용으로 이용 가능하다.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문화마을이 있어 포경산업이 활발했던 당시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고래 여객선을 타고 바다 여행을 나가면 운 좋은 날 고래를 만날 수도 있다.

 

언양 성당 전경. 오른쪽 탑이 있는 건물이 성전이고 왼쪽 파란 지붕이 사제관이다. 사진=남민

 

◇ ‘영남알프스’에서 싹 틔운 천주교 씨앗 

24살의 동정녀 김아가다는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천주교 탄압이 극심하던 1860년 경신박해 때, 아버지와 오빠가 체포되자 자신도 스스로 체포되어 갔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서 간신히 풀려난 그는 산속을 헤매다 천주교 신자들이 은거하던 죽림굴에 다다르게 된다. 언양읍 서쪽 가지산의 1069m 8부 능선에 위치한 죽림굴은 천혜의 은신처였다. 당시 조선인 두 번째 신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가 사목 방문차 들렀다가 박해를 피해 4개월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당시 최양업 신부는 장티푸스로 고비를 맞고 있었는데 김아가다의 극진한 간호 덕에 살아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아가다가 열병으로 눕게 된다.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교우들의 마지막 기도문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묘소는 이장을 거쳐 현재 가지산 살티공소의 살티 순교성지에 있다.

 

죽림굴은 울산 언양 일대의 천주교 발상지로 불린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해 들어온 한국 유일의 석굴 공소였다. 프랑스에서 온 리델 이 신부와 깔레 강 신부는 그들만의 암호로 이곳을 ‘영남알프스’라는 은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향의 알프스를 빗댄 표현이었다. 

 

오늘날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는 ‘영남알프스’는 박해를 거치며 한 종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산파 역할을 한 산이다. 1241m의 가지산을 비롯해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9개나 있는 이 곳, 3~4월까지 눈으로 덮인 영남알프스에서 100년 이상 신자들은 은거해야 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옹기를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시장에서 전국의 천주교 박해상황과 신부들의 방문 일정 등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해시대가 지나자 ‘성당’이 마을로 내려왔다. 1927년 마침내 언양 구교동의 옛 향교가 있었던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언양성당은 부산교구에 이어 이 일대에서 두 번째 본당이 세워졌다.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에밀 보드뱅(Emile Beaudvin. 한국명 정도평)은 1932년 석조 성당 준공 기념미사에 이어 1936년 축성식을 가졌다. 외동아들인 보드뱅 신부는 프랑스에서 전 재산을 팔아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성당을 지었다고 전한다.

 

본관 성전은 석조 고딕양식으로 장방형의 신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중앙에 현관이 있고 그 위쪽에 종탑을 세웠다. 측면에는 5개의 버팀 기둥을 세웠다. 기둥 사이의 원형 창 아래 쪽에는 두 개의 아치형 창을 설치했다. 뒤편은 붉은 벽돌로 마감한 것이 이채롭다.

 

옆의 구 사제관 건물은 평면 중앙에 현관을 배치하고 좌우에 방을 뒀다. 경사지를 활용한 건축으로 전면에 기둥을 세워 지은 모습이 아슬아슬하면서도 정겹다. 3면이 개방된 베란다 구조다. 뒤쪽 광장에서 바라보면 지붕 위에 3개의 돌출 창이 설치되어 있다. 채광을 위한 섬세한 배려다. 지금은 신앙유물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사제관은 다시 지었다.

 

언양성당은 한 성당에서 두 명의 주교(대주교 서정길 요한, 주교 최재선 요한)을 배출한 전국 유일의 성당이다. 본당과 구 사제관(현 신앙유물전시관)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회관과 사제관 수녀원 사택 유치원, 그리고 순교자 묘가 있다. 신앙유물전시관에는 126권의 서적과   서류 59권, 성물 150점, 민속품 320점, 사진 40점 및 기타 48점 등 총 743점의 유물이 비치되어 있다.

 

 

간절곶에 우뚝 서 있는 우체통. 사진=남민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울산의 명소

 

▲ 반구대(盤龜臺) =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라 해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언양읍 대곡리 호숫가에 선사시대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암반에는 고래와 곰, 멧돼지, 사람 등이 조각되어 있어 국보로 지정돼 있다. 교미하는 동물, 새끼를 밴 동물 그림들은 번식과 사냥을 기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언양 유배 생활 때 자주 들러 마음을 달랬다 하여 ‘포은대’라고도 부른다.

 

▲ 간절곶 = 겨울철에는 포항 호미곶보다 1분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새 천년 밀레니엄 첫 해돋이(2000년 1월 1일 오전 7시 31분 17초)로 유명하다. 해안가 언덕 위의 등대와 커다란 우체통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주는 곳으로 인기다. 짙푸른 바다와 기암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변과 함께 근처에는 아담한 해수욕장도 있어 많이 찾는다.

 

▲ 대왕암 송림 = 고깃배에 바닷길을 안내하던 울기등대로 유명했던 곳이다.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바위섬 대왕암은 경치가 매우 빼어나다. 신라 문무대왕비가 죽어 호국룡이 된 후 이 바다에 잠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진입로에 우거진 600m 길이의 송림은 심신을 맑게 씻어줄 산책로다. 

 

▲ 신불산 억새평원 = ‘영남알프스’ 간월산과 영축산 중간에 있다. 천황산과 함께 억새평원으로 유명하다. 해발 1159m의 신불산에서 남쪽 영축산 쪽으로 향하면서 펼쳐지는 억새평원은 가을 등산의 백미다. 신불산 남쪽 영축산 아래에는 통도사가 있고 동쪽에는 언양불고기로 유명한 언양읍이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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