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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는 핏빛 절규가 흐른다… '빨갱이 연좌제'를 아시나요?

[문화공작소] 75주기 맞은 '제주 4·3'
영화 '지슬'의 4.3 사건, 국민들도 제대로 몰랐던 시대의 비극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중

입력 2023-04-03 18:00 | 신문게재 2023-04-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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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프레스 투어 현장사진4
제주도의 비극을 한 마디로 응축한 제주 주정공장의 내부 모습. 4.3 당시에는 많은 제주도민을 수용했던 장소로 제주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장소로 꼽힌다. (사진=이희승기자)

 

휴식과 힐링의 섬, ‘한달살기’ 열풍으로 한 때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증가를 보였던 제주도가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불린 시기가 있었다. 75주기를 맞은 ‘제주 4·3’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 당시 경찰의 발포사건 때부터 1948년 4월 3일 무장대 봉기를 거쳐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의 교전.진압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말한다. 당시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제주 4·3 당시 적게는 1만 4000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당시 제주도민의 10%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간 제주 4·3은 영화 ‘지슬’을 통해 접한 게 다였다. 제주말로 ‘감자’인 영화의 제목은 영문도 모른 채 산에 숨어 고통의 시기를 견딘 이들의 식량이자 이념의 대립을 응축한 108분짜리 수작이었다. 

지금도 항쟁 혹은 의거, 사건 등 정확한 이름 없이 ‘제주 4·3’으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진실과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기 때문이다.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도 이에 대한 표면적인 정의보다 위로와 화합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 

제주도 4.3현장
잠자다 영문도 모른채 트럭에 끌려가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해 입고 있던 옷과 고무신등을 던지며 자신의 시체라도 수습해주길 원했다고 한다. 단체 학살지와 그곳에 고인 물이 당시의 끔찍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사진제공=제주 4.3 평화재단사무국)

 

지난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특별자치도기자협회가 진행한 ‘제주4·3세계화 언론인 초청 팸투어’의 첫날은 봄비가 세차게 내렸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이름모를 희생자들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본격적인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져 2003년 정부보고서가 발간되기 전까지 ‘빨갱이’로 불렸고 그 가족들은 연좌제(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에 꿈을 접어야 했다. 평범한 은행원이 되고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국가가 이를 막았다. 후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험을 보다 끌려나오거나 아예 응시조차 못 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제주 4.3 프레스 투어 현장사진5
지난 3월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이 개관됐다. 제주항 근처에 위치해 있는 주정공장 옛터를 제주 4.3의 역사 현장으로 보전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하는 곳으로 만들어 눈길을 끈다.(사진=이희승기자)

 

제주국제공항에서 멀지 않은 관덕정과 제주북초등학교는 4·3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다. 3.1절 기념 제주도 기념대회에 몰린 군중들을 감시하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였지만 그는 이를 무시한 채 현장을 벗어나기 바빴다.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쐈고 무고한 시민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주부와  국민학생이었던 어린 소년, 평생 밭만 일구던 농부 등은 모두 등을 관통하는 총알에 의해 희생됐다. 당시 무력으로 대항하던 시위대라고 했던 군부의 발표와 달리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던 시민을 향한 발포였음이 드러났지만 사과는 없었다. 

1947년 3.1사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같은해 3월 10일 총파업으로 맞선다. 등교를 거부한 학생, 업무를 놓은 공무원과 가게 문을 닫은 상인 등 무려 90%가 넘는 참여율을 보였지만 이는 되려 38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혔고 서북청년회의 폭력과 약탈, 살인의 희생양이 됐다.

김남훈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위원장은 “이들의 만행은 악랄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어서 지금도 제주도에서 이 단체의 이름은 금기어이자 분노의 상징”이라면서 “여자들은 겁탈 당했고 남자들은 한 밤에  끌려가 고문당하다 죽었다. 아이라고 봐주지 않았고 노인들 조차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그렇게 자주독립과 분단국가를 반대했던 희생자들이 공산 폭도가 되어 반세기 넘게 기억을 말살당했다. 알면서도 차마 입 바깥으로 내뱉지 못한 ‘기억의 자살’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제주도 4.3현장1
8.15 해방이후 미군이 일본군의 무기를 태워버린 뒤 제주도 탄압을 눈감고 군사기지로 사용한 알뜨르 비행장은 해외에서 다크 투어리즘으로 찾는 이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정작 국내에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사진=이희승기자)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사태를 끌어안기보다 미국에게 갖다 바치기 급급했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지역 토벌 사령관 송요찬은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미군은 이를 묵과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제주도는 더 큰 몸살을 앓았다. 동백꽃의 붉은색이 당시 무고한 학살의 피를 머금은 듯 각 마을마다 살인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집단학살지와 애기무덤, 정방폭포의 동굴은 그 비극을 오롯이 증명한다.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마을에 살며 서로를 의심하고 물어뜯는 동시에 오랜 시간 차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포용과 화해’를 통해 아픔을 이겨내고자 손을 맞잡았다.

세계 냉전과 한반도 분단 속에 발생한 제주4·3은 70년이 넘도록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마을에 살면서도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해낸,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제주 4.3 프레스 투어 현장사진2
제주 북초등학교는 당시 가장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각종 국가 행사를 했던 곳이다. 1947년 기념식 후 제주 3.1절 발포사건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한 것으로 드러났다.(사진=이희승기자)

 

1980년대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본격적인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같은 해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사과하며 상처 회복에 나섰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제주4·3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국가추념일로 행사가 된 후 대통령 참석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세 번(2018·2020·2021년)의 추념식에 참석했고 올해도 제주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보수 진영 대통령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정식 취임 전 당선인 신분으로 지난해 제74주년 추념식에 참석한 바 있다.

제주 도민사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제주4·3의 기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4·3평화재단은 지난 2월 27일에 문화재청에 4·3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선정 신청을 했다. 국내 신청작으로 선정되면 내년 3월 유네스코에 제출되고 최종 등재 여부는 2025년 하반기에 결정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최우선 조건은 국경을 초월한 가치다. 한국에서는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5·18민주화운동 등 기록물 16건이 등재돼 있다.

제주=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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