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뉴스 > 오피니언 > 데스크칼럼

[데스크 칼럼] 찔레꽃과 수선화, 결국 스스로에게 달렸다

입력 2019-01-08 15:14 | 신문게재 2019-01-09 19면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20181127010010209_1
허미선 문화부장

‘찔레꽃’처럼 울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고 살았지….

소리꾼 장사익 노래의 단어 하나하나, 문자 사이사이, 손짓 마디마디, 날고 드는 숨결 켜켜이에는 처연한 이야기와 희망 그리고 온기 어린 메시지가 담겼다. 

 

그가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 데는 고(故)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곡을 붙인 동명 신곡 및 9집 앨범 ‘자화상’ 같은 마음 때문이다.

타인에 공감하고 소통하며,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정제하고 녹여낸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찔레꽃’처럼 노래하고 웃고 춤추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외딴 우물 속 한 사나이, 돌아가다 보면 가엽어지고 미워져 다시 발길을 돌리지만 또 그리워지는 ‘자화상’ 속 그 사나이는 노래하는 장사익 스스로이자 마음 속 깊게 공감하고 소통하는 누군가다. 늦깍이 소리꾼으로 첫발을 내딛던 시기, 국악계 사모임 자리마다 찾아가 “노래 한마디 하겠습니다”를 외치던 그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출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을 그의 마음 하나하나인 동시에 그를 가슴에 새긴 청자들 스스로이자 그들이 잊지 못할 누군가이기도 하다. 한해 동안 상처 입히고 고단하게 했던 세상에서 잘 견뎌낸 이들에 대한 대견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지금에 그의 ‘찔레꽃’ 같은 노래와 마음은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비춰보며 스스로의 정수를 담은 ‘찔레꽃’은 자부심의 근원이며 진화와 발전을 위한 헌화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죽음을 맞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나르시즘’을 상징하는 수선화와는 그 결을 달리 한다.

‘찔레꽃’은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으로 얻은 성과임에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아보며 피워낸다면 ‘수선화’는 그 성과에 취해 남탓으로 일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들이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고 ‘꼰대’ 같은 이전 세대와 ‘요즘 것들’을 탓하며 갈등을 골을 깊게 판다. 함께 일하는 이들을 탓하고 어려워지는 경제를 탓하고 실무자를 탓하고 수장을 탓하고…. 남탓이나 환경을 문제 삼기는 쉽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보자. 새로운 파트너 영입 후 공중그네에서 번번이 추락하는 베테랑 곡예사는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새 파트너의 인기가 오를수록 그 뾰족함의 끝은 날카롭게도 새 파트너를 겨눈다. 그가 추락하지 않고 완벽한 곡예를 선보이게 된 것은 호흡을 맞춰야만 하는 새 파트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다. 아내가 보여준 자신의 공중곡예 녹화본을 보며 추락 원인을 남탓이 아닌 자신 안에서 찾으면서다.

나르시즘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작 다른 사람 때문이고 환경의 문제라 해도 나를 돌아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과 자신의 아름다움에 갇힌 상태에서의 남탓은 전혀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곤 한다. ‘공중그네’ 속 베테랑 공중곡예사도, 장사익의 ‘찔레꽃’도, 신화 속 ‘수선화’도 자부심과 오만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얻은 깨달음과 선택의 결과다. 그렇게 모든 것은 스스로의 안에서 시작한다.

 

허미선 문화부장 hurlkie@viva100.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