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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재난, 작은 마음이 모인 연대의 힘 ‘호랑이 바람’

[BOOK]

입력 2020-03-31 17:00 | 신문게재 2020-04-0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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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링화와 판화로 표현한 ‘호랑이 바람’(사진제공=다림)

 

시작은 낭만적인 모닥불이 될 수도 있었던 작은 불씨였다. 그 작은 불씨는 사나운 ‘호랑이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번져 ‘높은성’을 모두 태우고서야 잦아들었다. 1919년에서 2019년까지의 한국 근현대사를 개인과 그 가족의 삶을 통해 풀어낸 ‘백년아이’의 김지연 작가 신작 ‘호랑이 바람’은 2019년 4월 강원도 고성군 산불사건을 담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 판화 작업으로 표현하는 김 작가는 ‘높은성’으로 명명한 산을 태우는 화마를 표현하기 위해 터키 전통 ‘마블링화’ 기법을 적용했다. 김 작가는 “주제를 간결하게 전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리얼리티를 그냥 그리기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살릴 수 있는 비주얼 보충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극과 극, 마블링화와 판화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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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바람 | 김지연 글·그림(사진제공=다림)
“재난은 가늠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재난과 불의 추상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의도적으로 그려보니 불의 추상성 표현이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림을 아무리 잘 그리고 그래픽 작업이 정교해도 우연하게 나는 효과만큼 불의 추상성을 표현하기는 어려웠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로 뻗어갈지도 알 수 없는 불의 추상성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한 마블링화 기법의 원리는 물과 기름의 분리다.

이번 ‘호랑이 바람’에서는 물의 밀도를 이용해 작업했지만 ‘물과 기름의 분리’라는 마블링화의 원리는 불을 내는 기름과 상반되는 물과의 관련성을 내포하는 상징으로도 작용했다.

‘호랑이 바람’ 작업을 위해 이스탄불문화원에서 몇달 동안 마블링화를 배우기도 한 김지연 작가는 “우연의 효과로 표현되는 추상성이 돋보이는 마블링화는 선명하고 정교하게 표현되는 판화와는 상반되는 기법”이라며 “상반되는 두 예술이 맞아떨어지게 하기 위해 수차례 작업을 했다”고 전했다.

“불은 되도록 조그많게 넣으려고 했어요. 산도 얼마나 태워야 그들의 슬픔이 온전히 전달될까 고민도, 테스트도 많이 했죠. 프레스도 아닌 손으로 미는 판화로 하나의 그림을 위해 여러 차례 작업을 하다 보니 화재를 뉴스로 지켜보는 게 아니라 너무 제 일 같아요.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죠.”

그렇게 물과 기름의 분리를 이용한 마블링 효과와 판화, 극단의 것들이 조화를 통해 산 전체를 태우고 거주민들의 터전까지 삼켜버린 화마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호랑이 바람’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그렇게 판화로 찍고 바늘로 그려낸 마블링화가 한데 어우러져 메시지를 담을 수 있도록 반복하는 과정에서 작업실을 채운 수백장의 그림 중 추리고 추려 완성된 책이 ‘호랑이 바람’이다.


◇연대와 살아내는 사람들, 산을 태운 ‘호랑이 바람’이 희망의 ‘바람’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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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링화와 판화로 표현한 ‘호랑이 바람’(사진제공=다림)

 

“고성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으니 꼬박 1년이 걸렸어요. ‘백년아이’를 위해 역사공부를 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고양된 상태였죠. 고성에 불이 났는데 전국의 소방차가 달려오는 걸 보고 놀랐어요.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고성은 조선시대부터 큰 불이 많았던 지역이었어요. 그럼에도 그간에는 사회적 이슈가 안됐었죠. 그 이유가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니 세월호 참사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중앙정부에서 재난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었어요.”

제도화된 재난 시스템에 “경이로움을 느꼈다”는 김 작가는 또 하나 놀란 사실은 여전히 그곳에 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라며 “당장 떠나고 싶을 수도 있을 만큼 큰 재난에도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 심고 가꾸며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고 털어놓았다.


“화재로 산 하나가 전소했을 때 그냥 두면 100년 뒤에나 복원이 가능하다는 통계가 있어요. 땅속 미생물까지 다 죽어버려서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꾸준히 가꾸고 보살피면 30년이면 회복된대요. 그만큼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죠. 한국은 그렇게 가꿔 왔어요. 조선시대의 대형 화재, 일제강점기의 무차별적인 벌목, 6.25전쟁 등으로 꼴찌 산림국이었지만 꾸준히 땅을 다지고 나무를 심고 가꾸며 보듬어 오늘에 이르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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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바람’ 김지연 작가(사진제공=다림)
이어 김 작가는 “지금도 고성의 사람들은 컨테이너 박스에 머물면서, 여전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며 살고 있다”며 “인간이 이래서 훌륭하구나를 느꼈다. 연대와 스스로 자기 삶을 돌보는 힘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수차례의 화재에도 상처를 보듬고 산과 들을 가꾸며 지금까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서 대물림된 연대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꾸는 힘과 인간의 위대함을 ‘호랑이 바람’에 고스란히 담았다.

“고성에 갈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있었어요. 불탄 나무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학교의 아이들은 뭘 하고 있을까, 절망을 겪은 우리 사회 시스템은 어떻게 발전될까, 어떤 사회적 관계와 문화들이 새롭게 만들어질까…늘 절망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멋진 걸음이 있었거든요.

이는 펜데믹(전세계적인 대유행) 현상을 보이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코로나19가 터지자마자 12월 은행권에서 나온 통계들이 있었다”며 “앞으로 인터넷, 온라인 유통이 엄청 발전한다고 예측했는데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간 너무 바빠서 하지 못했던 가족들과 음악 같이 듣기, 밥 해먹기 등의 문화,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면 마스크를 손수 만들어 보내주시거나 장애인이 마스크 몇장을 나눔하는 등을 통해 정말 지켜야하는 가치, 소중한 것들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예술가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어떻게 도움을 주고 즐거움을 만들어줄까 늘 고민하는 사람이에요. 절망 속에서도 터전을, 자신들의 삶을 다지는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희망, 달라질 세상 등을 함께 얘기하고 싶었죠.”

제목 ‘호랑이 바람’ 역시 무서운 화마와 다시 딛고 일어서는 연대의 힘과 인간의 위대함을 모두 담고 있다. 작은 불씨로 산 전체를 태운 ‘호랑이’ 같은 ‘바람’은 하나 하나의 인간들이 연대하고 가꾸며 ‘호랑이’처럼 질주하며 큰 ‘바람’(Hope)을 이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직면과 인정 그리고 딛고 설 수 있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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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링화와 판화로 표현한 ‘호랑이 바람’(사진제공=다림)

 

작업을 하면서 가장 뭉클하고 감정이입이 컸던 장면으로 김 작가는 “다 타버린 산에 오른 아이가 타다 남은 시뻘건 나무를 안아주는 그림”을 꼽았다.

“얼마나 막막하고 무섭겠어요. 그런데 거길 올라간다는 건 용기죠. 누구나 살면서 재난 같은 일을 겪죠. 그런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게 직면이에요. ‘호랑이 바람’에서 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직면’하는 용기고 시뻘건 나무를 안아주는 마음은 ‘인정’이죠. 제일 어렵지만 직면과 인정이 해결과 극복의 시작이죠. 문제를 직면하고 인정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저만의 삶의 태도가 그 두 장면에 들어가 있어요.”

매 그림 등장하다가 산이 전소된 후 사라진, 그리고 마지막 장에 다시 돌아오는 ‘새’의 상징성은 희망이자 바람을 담은 “새들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라는 구절을 꼽씹게 한다.

“살 수 없어 보금자리를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는 새들을 통해 희망, 회귀본능 등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온난화, 환경문제 등 무엇이든 다시 돌릴 수 있는 건 돌려보자고 얘기하고 싶었죠. 더불어 언제든 도와줄 누군가가 있음을, 혼자가 아니라고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호랑이 바람’에서 집중하는 건 ‘한 발짝 더 가까이’예요. 개인으로서는 스스로의 삶을 가꾸는 데 주인이 되기 위해 재난에 지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내 삶을 가꾸는 힘을 키우자는 다짐이기도 하죠.”

더불어 김 작가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다른 사람의 아파하는 모습을 내 이야깃거리로 끌어오지 말자”다. 까맣게 타버린 산을 바라보는 이들의 까만 뒷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들, 아이가 껴안은 타다 남은 시뻘건 나무 주위로 쓰러진 나무들에 삶의 터전을 잃고 주저 앉아버린 사람들이 겹쳐 보이는 건 그래서다.

“제 몫은 리얼리티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리얼리티를 담은 그림을 통해 어떻게 연대하고 스스로의 삶을 바꿀까를 고민하는 건 독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늘 책에서 제 지분은 10%라고 생각해요. 독자들마다 그림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들이 ‘호랑이 바람’처럼 번져가거든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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