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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방구석 역사여행> 유정호

스토리가 있는 '가볼 만한 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입력 2020-06-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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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이제까지 몇 권의 역사서를 썼으며, 틈날 때마다 가족 자녀들과 역사 기행을 떠나고 이를 글로 전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갈 만한 여행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토리를 알면 그만큼 그 곳의 가치를 이해하고 흥미가 더해진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 책은 지역별로 나눠 가볼 만한 역사적 장소들을 소개한다.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가족들과 함께 다녀올 만한 곳들이, 그곳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쉽게 잘 정리되어 있어 일독을 권한다.



* 4대 관음조장 중 한 곳 ‘옥천암’ - 옥천암(玉泉庵)은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찰이다. 옥처럼 깨끗한 물(홍제천) 옆에 있는 사찰이라고 해서 이렇게 이름 지어 졌다.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한 곳이지만, 외진 곳에 위치해서인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곳의 흰색 관음보살 백불(白佛)은 보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옆에서 보면 안쪽으로 휜 것처럼 보여 이채롭다. 이 백불에는 특이하게도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모가 씌여져 있다.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 ‘억불숭유’의 나라였던 만큼,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취지로 이해된다.



* 나라와 백성의 모든 것 ‘종묘사직’ - 조선은 효(孝)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성리학’의 나라였다. 왕들이 선왕의 영혼을 담은 신주를 모셔놓고 정성껏 제사를 올린 곳이 종묘였다. 종묘는 왕들의 영혼을 모시던 곳이라, 살아있는 생명체를 두지 않았다. 심지어 ‘지당’이라는 작은 연못에 물고기 조차 놓지 않았다. 조선조에는 효 못지않게, 백성을 위한 농업진흥도 중요했다. 그래서 하늘에 제를 올려야 했지만, 당시엔 중국 황제만이 천제를 올릴 수 있었다. 조선의 왕들은 어쩔 수 없이 농사에 영향을 주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고, 그 장소가 바로 사직단이었다. 종묘사직이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위한 현명한 통지를 하라는 시대적 주문이었다.

* 조선 선조의 유일한 치적은 종묘 지키기? -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종묘가 불탔다. 당시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면서도 종묘에 있던 ‘신주’만은 잊지 않고 챙겼다. 그리고 왜란이 끝난 후 종묘를 다시 중건했다. 덕분에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될 수 있었다. 왕위 계승이 계속 되면서 후대 왕들도 지속적으로 종묘 증축에 나섰다. 현재는 19칸에 좌우 2칸의 혐실과 동서로 5칸의 월랑을 둔, 길이 101m의 세계 최장 길이의 단일 목조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 흥선대원군의 처소였던 ‘운현궁’ -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개인 사저였다. 당시 크기가 무려 9600평에 이르렀을 정도여서 그의 막강한 권세를 짐작케 한다. 안동 김씨의 멸시와 박해를 이겨내고 아들(고종)을 왕위에 올린 그는 이곳에서 서원 철폐, 호포제(군역의무) 실시 등 양반의 특권을 없애는 개혁을 추진했다. 광복 후 미 군정은 운현궁을 사유재산으로 판단해 그의 아들인 이청에게 돌려 주었다. 하지만 6.25 등을 거치며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1991년 서울시에 인수될 당시에는 2148평으로 대폭 줄었다. 일부는 팔려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일부는 덕성여대 캠퍼스로 쓰이고 있다.

* ‘백정교회’ 숭동교회 -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숭동교회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893년에 설립했다. 당시 백정이던 박성춘과 그의 자녀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양반 출신의 신도들이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어 목사가 “백정도 하나님의 자녀”라며 감싸자 양반 신도들이 홍문수골교회를 새로 세워 나가면서 ‘백정 교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두 교회는 1905년에 다시 합쳐진다. 특히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훗날 의사가 되어 독립운동에도 나서는 등 이 교회는 3.1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경교장’ - 서울 강북삼성병원 내에 위치한 경교장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금광개발로 큰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의 집이었다. 당시엔 ‘죽첨장’이라고 불렸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신병에 불안을 느끼고는 이 집을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에 내주었다. 김구 선생은 자신은 혜화동 지인의 집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이곳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청사로 쓰게 했다. 김구 선생이 이곳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한 후에는 원래 주인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다가 대만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부는 경교장을 대한민국 사적으로 등록시켰고, 2009년 8월 복원 결정 이후 2013년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 술집요정에서 백석의 기림터가 된 ‘길상사’ -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는 원래 ‘전국 3대 요정’으로 일컬어지던 대원각이었다. 그 소유주가 일찌기 남편과 사별하고 기생이 되었던 김영한이다. 그녀는 당시 시인이자 영어교사였던 백석과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6.25 전쟁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던 그녀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에서 큰 울림을 듣고는 1987년에 7000평 대지에 당시 1000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스님에게 시주하겠다고 밝혔다. 법정스님이 이를 정중히 거절하자, 10년 동안 대원각을 시주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고 결국 1997년에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김영한은 창작과 비평사에 2억원을 기증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평생 백석을 그리며 살다 1999년에 세상을 떴다.

* 전설의 용문사 은행나무 -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위치한 용산사 입구에는 높이 42m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조선 세종은 이 나무에 종3품에 해당하는 당상직첩을 하사해 신목(神木)으로 귀하게 대접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많은 양의 열매를 떨궈온 용문사 은행나무를 경기도와 강원도에 분포하는 수많은 은행나무의 뿌리이자 어머니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 조선조 왕릉 조성의 엄격한 원칙 -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조성하는데 몇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왕이 왕릉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에도 ‘한양 사대문 10리 밖 100리 안에 왕궁을 두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 규칙을 무시한 왕릉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강원도 영월의 장릉이다. 북한의 개성에도 정종과 왕후를 모신 후릉,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가 있는 제릉이 있다. 경기도 파주에도 2개의 왕릉이 있다. 인조가 묻힌 장릉,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가 있는 삼릉 두 곳이다.

* 왕들의 장인’ 한명회와 삼릉 -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을 탄탄히 하기 위해 큰 딸을 세종의 사위인 영천부원군의 며느리로, 둘째는 신숙주의 며느리로 들였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그는 더 큰 꿈을 품고 셋째 딸을 훗날 예종이 되는 세조의 둘째에게 시집 보내 장순왕후로 만들었다. 하지만 모자 모두 산후병과 질병으로 곧 세상을 떠나 한명회의 뜻은 좌절된다. 그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넷째 딸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훗날 성종)에게 또 시집 보낸다. 공혜왕후도 19세에 요절하면서 한명회의 권력은 시들해진다. 예종과 성종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그지만, 폐비 윤씨의 죽음으로 벌어진 갑자사회로 인해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파주 삼릉은 공릉(장순왕후) 순릉(공혜왕후) 영릉(효장세자와 효순왕후)가 모은 곳이다.

* 숙종의 여인들, 그리고 장희빈 -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3명의 왕후에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 등을 두었다. 숙종은 처음 두 왕후를 아낀 탓인지 자신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을 같은 곳에 만들라고 했고 이곳이 명릉이다. 이 가운데 인원왕후는 서얼 출신인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인물이다. 숙종의 유일한 원자를 낳았음에도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무덤인 ‘대빈묘’는 죽어서 두번이나 이장되었다가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후궁의 묘 앞에 ‘원’이라고 쓰는 것과 달리 ‘묘’라고 이름 붙여져 격도 낮아졌다.

* 끈임없이 박해당한 추사 김정희 - 김정희의 일생을 둘러보려면 세 곳만 가보면 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예산의 추사고택,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제주도 유배지, 그리고 마지막 여생을 마무리했던 과천의 ‘과지초당’이다. 김정희는 중국 북경에서 배운 금석학으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내는 등 탁월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안동 김씨에 의해 무수히 유배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65세 때 함경도 북청으로 1년 동안 유배를 다녀온 후, 그는 아버지 김노경이 지은 별서였던 과천의 과지초당으로 옮겨 4년 동안 세상을 만들 인재를 육성하며 세월을 보내다 1856년 이곳에서 71세로 생을 마감했다.

* 하륜과 조준의 ‘하조대’ - 동해 바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강원도 양양의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말년에 들러 남은 삶을 정리했다고 해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천하의 권력자들이 머물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장소라는 의미다. 이것 무인등대는 동해 일출 장관의 담는 사진 코스로도 유명하다.

* 단종이 마지막으로 머문 ‘청령포’ - 비운의 왕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죽은 청령포는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다. 강원도 깊은 산골인데다 바다의 섬과 같은 지형을 갖춰 세간의 이목이 차단된, 자연이 만든 천혜의 감옥‘이었다. 남한강 상류의 한 지류인 서강이 3면을 에워싸고 흐르며,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이뤄져 배를 타고 들어가지 않는 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단종은 숙종 때 단종이라는 모효를 부여받고 왕으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즉위 2년에 청령포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금표비‘를 세워 단종이 머물렀던 청령포의 격을 높여 주었다.

* 당나라 소정방의 탑으로 오해받았던 정림사지 석탑 - 백제 석탑 가운데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정림사지 오층석탑 뿐이다. 국보로 지정된 이 석탑은 오래전부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쌓아올린 ’평제탑‘으로 불려왔다. 소정방이 이 탑의 1층 탑신 사면에 백제를 평정했음을 자랑하는 ’평제기공문‘을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가 1942녀 부여를 방문했다가 이곳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고 적힌 기와를 발견해 고려 현종 때 이미 이 절이 정림사로 불렸음을 확인한 후 석탑에 대한 곡해도 풀렸다. 정림사지 오층탑은 목탑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석탑으로 꼭 갖춰야 할 안전성을 갖춰, 한반도 탑 건축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 안동 김씨도 건드리지 못했던 송시열의 ‘화양서원’ - 충북 괴산을 대표하는 관관명소인 화양구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조그마한 화양서원이 보인다. 이곳은 조선 중기 최대 세력가였던 우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이다. 송시열은 사약을 먹고 죽었으나 숙종 때 복원된 이후 그를 삼기는 서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당시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 중에 임금이 직접 이름이 지어 내려준 사액 서원만 37곳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양서원은 그 중에 최고의 힘을 가진 곳이었다. 강원도와 삼남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사를 지낼 때 마다 ‘화양묵패’라는 공문서를 전국에 돌려 제사에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올리도록 강제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

*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진천농다리’ - 충북 진천은 김유신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 있는 진천농다리는 1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돌다리로 유명하다, 돌을 반듯이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어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94m에 이른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은 것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던 6.25 등 나라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다리가 크게 운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 단재 신채호를 있게 한 부인 박자혜 - 신채호는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애국자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1978년이 되어서야 충북 청주시에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묘소 밑에 책을 읽는 신채호 선생 동상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동상 하나의 주인공이 부인 박자혜 여사다. 그녀는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이 되려 북경으로 갔다가 신채호를 만나 그의 인물됨과 독립을 위한 큰 뜻에 감명받아 결혼에 이르게 된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의열단이 거사를 위해 국내로 들어올 때마다 숙식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신채호 선생이 여순감독에서 1936년 사망하자 그녀도 시름시름 앓다 삶을 마감했다.

* 인도승려가 창건한 화엄종의 본산 ‘화엄사’ - 전남 구례에 위치한 화엄사는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창건해 한 때 3000여명의 승려가 거주했던 대형 사찰이다. 화엄종은 불교 종파 가운데서도 왕과 자배층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즉 하나인 것이 모두요, 모두가 하나라는 입장이었다. 왕이 곧 국가요, 국가는 왕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호국불교’였다. 자장대사와 의상대사, 원효대사 등 화엄종 대가들은 중국 불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 않고, 우리 정서와 문화를 반영해 한국 불교를 만들어 냈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은 당연히 의병 활동을 했고, 그 이유로 왜군에 의해 화엄사는 폐허가 되었다. 훗날 벽암대사가 조선 인조 때 중건했다.

* 대한민국의 ‘삼보사찰’ 통도사·해인사·송광사 -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가리켜 삼보(三寶)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이 있다. 불보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의미하며 통도사를 일컫는다. 법보는 부처님의 진리가 담긴 말씀인데,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합천 해인사가 법보를 상징한다. 승보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깨닫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스님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순천 송광사다. 이들 세 사찰을 우리나라 삼보사찰이라고 부른다.

* 조계종의 본산 ‘송광사’ - 송광사는 전남 순천에 있다. 고려조에 지눌 대사는 당시 사채놀이와 노비를 활용한 수공업으로 막대한 부를 올리는 불교계를 혁신하기 위해 송광사에 내려와 새로운 신앙결사운동을 펼쳤다. 불교의 쇄신을 위해 자정 운동을 펼친 그는 마침내 이곳에서 선종과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을 개창해 대한민국 대표 종파로 자리매김 하게 했다. 송광사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늘 짚고 더니던 지팡이를 꽂아두었다는 고향수가 있다. 지눌이 열반에 들자 따라 죽었는데 현재까지도 썩지 않고 800년 가까이 앙상한 기둥처럼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송광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았는지는, 4000명을 먹일 수 있는 쌀 7가마분의 밥을 담는 ‘비사리구시’가 증명해 준다.

* 조선왕조실록을 끝까지 지킨 전주사고 -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서울의 춘추관 외에 충주 전주 상주 3곳에 문고를 보관하는 건물인 사고를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도망가기 바빴던 시기에 종9품의 하급관리 참봉 오희길이 인근에 덕망있던 손홍록에게 전주사고의 책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해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힘겹게 숨겼다. 충남 금산의 조헌과 의병들이 왜군을 막아준 덕분에 전주사고의 책들은 내장산에서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 나중에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5개 실록을 새로이 만들어 강화도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춘추관 등 전국 5곳에 보관된다. 현재 복원된 전주서고는 1층 없이 2층에 책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다. 진본은 서울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 1909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가 창건한 동국사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대웅전부터 다르다. 일제는 당시 불교를 이용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해주려 했으나, 실상은 한국 불교 교단을 장악해 식민 통지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사찰의 병합과 이전 등에 모두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주지 임명권도 총독부가 가져갔다. 당시 동국사는 부처님을 모시던 경건한 사찰이라기 보다는 일본인들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타락한 장소였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의 고창 선운사 말사로 운영되고 있다.

* 후손을 번창시킨 금관가야 김수로왕 - 진흥왕이 이끄는 신라군에 멸망한 대가야와 달리 금관가야는 왕족들이 스스로 나라를 갖다 바쳐 신라 지배층으로 편입되었다.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는 42년에 건국해 432년에 패망할 때까지 다른 어떤 가문보다 많은 자손을 남겼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주 이씨가 모두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이 세 성씨가 현재 4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경북 영주 - 영주는 불교와 유교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통일신라에서 고려까지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화엄종의 본산인 부석사가 봉황산에 있다. 그 아래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이 태어난 풍기가 있다. 이 가운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화엄 사상을 전파할 최적지로 택한 것으로 유명한다.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 독립운동의 중심지 ‘무섬마을’ - 영주에 위치한 무섬마을은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만든 오지의 섬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150m 길이에 폭 30cm의 얕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람의 왕래가 어려운 이곳에서 김화진이라는 사람이 일제 때인 1928년에 ‘아도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일제의 눈을 피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덕분에 광복 이후 무섬마을에서 독립운동가 5명이 서훈을 받았다.

* 제주의 몰락을 지켜본 ‘도두봉’ -제주공항과 멀지 않은 곳에 ’제주시 숨은 비경 31‘에 속하는 도두봉이 있다. 해발고도 63m에 불과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으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안이 무척 아름답다. 제주도를 오랫동안 통치했던 탐라국의 수도였던 현재의 도두동을 이곳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주변국과 싸우지 않고 지내기 위해 친선 사절단을 보낼 때마다 이들의 안전한 귀가를 기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 원시숲을 그대로 보존한 ‘제주 비자림’ - 비자림은 제주 구좌읍에 조성된 비자나무 군락지다. 나무 잎이 한자 비(非)자와 닮았다 해서 비자나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비자나무는 예로부터 목재 상품성이 높아 국가 토목공사에 반드시 쓰였고,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큰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열매는 구충제나 변비 치료제로 특효가 있고, 씨에서 짠 기름은 고급 식재료로 쓰이는 등 버릴 것이 없는 제주의 보물이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외지의 수탈품목 1위 품목이었다. 비자림은 45만 제곱미터에 500~800년생 나무들이 2800여 그루에 이른다. 세계에서 단일 수종으로는 가장 큰 숲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옥황상제의 연못 ‘천제연’ - 천제연은 예부터 옥황상제를 머시는 7명의 선녀가 물놀이를 즐기기 위해 내려오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래서 옥황상제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천제연이라고 불렸다. 천제연폭포는 제주도 화산 지형을 잘 보여주면서 다양한 전설이 내려로는 유명 장소이자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기억하고자 위령비가 세워진 곳이다. 제1폭포부터 제3폭포까지 3개의 폭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1폭포만 보고 내려간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우리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려 이곳 인근에 소와 돼지를 잡는 도살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 일제가 군사기지로 건설하려 했던 ‘성산 일출봉’ - 성산 일출봉은 5000년 전 바닷속에서 화산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다. 바다에서 분출된 뜨거운 용암이 차가운 바닷물과 부딪히면서 형성된 ‘수성화산’이다. 분화구 위 99개의 봉우리가 성(城)처럼 보인다고 해 ‘성산(城山)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천혜의 광광지지만 일제 때는 해안 절벽에 24개의 인공 동굴을 만들어 태평양 전쟁의 해양 기지로 활용하려 했다고 한다. 지금도 광치기해변에서 일출봉을 바라보면 인공 동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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