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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진중권

이 시대 진보 지배층의 위선과 독선, 소통단절을 고발하다

입력 2020-11-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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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동양대 표창장 위조 논란을 계기로 이제는 가장 우리 사회 진보 지배층에 가장 뼈아픈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다.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는 그가 모 신문에 게재했던 글들을 정리한 책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논객 답게 그의 지적은 매섭고 아프다. 반대 진영 사람들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판과 지적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대부분 지적을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괘변’으로 폄하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만큼 그의 글은 날카롭고 예사롭지 않다. 가장 진보를 잘 아는 사람의 비판이다. 어느 진영이든 한번 쯤 곱씹어 봐야 할 대목들이 많다. 진보가 바꿀 수 있을지, 보수가 배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 ‘대안적 사실’에 기꺼이 속아주는 대중 -  동양대 표창장 사건으로 한때 떠들썩했다. 저자는 자칭 ‘어용지식인’ 유시민 씨에게 표창장 위조 사실을 미리 얘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시민 씨는 ‘대안적 사실’ 즉, 얼마든지 만들고 변경할 수 있는 가짜 사실을 제작해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투였다고 한다. 사실을 날조하는 ‘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실천으로 덧칠한 셈이다. 저자는 자기부터 솔선해 속아줘야 제 주변의 대중도 따라서 속을 것이라며 “나 혼자 꿈을 꾸면 그저 꿈일 뿐이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 된다”는 오스트리아 건축가 훈데르트바서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는 대중이 가진 선의의 상상의 욕망을 선동가들이 반동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그것으로 정의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의견이 다른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회를 편으로 갈라 아마겟돈의 결전을 벌인다고 비판한다.

 

* 진위(眞僞)보다 호오(好惡)가 기준되는 세상 - 저자는 오늘날 대중이 스스로를 콘텐츠 소비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이 매체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니즈의 충족’이라고 말한다. 그 니즈란 물론 듣기 싫은 ‘사실’이 아니라 듣고 싶은 ‘허구’다. 지루한 ‘사실’보다는 신나는 ‘거짓’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최근에 정통 레거시 매체들도 대안 매체의 행태를 따른다는 것이다. 2017년 정권 교체 후 나꼼수의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 주진우 등 대안 매체 운영자들이 대거 레거시 매체로 진출하면서, 객관성을 잃은 편파적 진행과 왜곡에 가까운 당파적 보도가 횡행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시청률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식의 접근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황우석 사태를 보도한 저널리즘 영웅 한학수 PD마저 조작방송을 내보내고 있다고 한숨을 내쉰다. 대안 매체가 대중에게 신뢰를 받는 것은 그동안 레거시 매체가 거짓말을 해 온 탓이라는 유시민 씨는 나아가 대안 매체가 창작하는 대안적 세계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한다며 저자는 “사실과 허구가 뒤바뀌고 있다”고 비판한다.

 

*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권이 아니다? - 저자는 문재인 정권이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역대 정권들은 감추려다 실패한 비리가 드러날 경우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로 치부해 당사자들을 도려내는 식으로 처리했는데, 이 정권은 부패한 자들을 도래내는 대신 외려 끌어안고 아예 그들에게 맞춰 세계를 날조하려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노골적 선동과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특히 문재인 정권을 촛불정권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원래 민주당 사람들이 박근혜 탄핵에 반대했기 때문이란다. 조국 교수도 당시 소추안 통과에 필요한 의석이 부족하고, 통과돼도 황교안 당시 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며, 헌법재판소 구성상 인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 정권 사람들은 원래 촛불을 든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다는 얘기다. 저자는 문재인정권은 이른바 ‘친노폐족’이 운좋게 국정농단을 만나 권력을 거저 얻은 것에 더 가깝다고 극평을 한다. 

 

* 뜯어고치겠다던 부정적 검찰상을 그대로 따라하다 - 검찰청법에는 법무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다.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해 주려 독일과 일본의 법을 참조해 만든 조항이다. 정작 독일에선 이제까지 수사지휘권 발동 사례가 아예 없다. 일본에서도 1954년 뇌물 정치인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한데 그나마 당시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이런 엄청난 수사지휘권을 우리 법무장관은 고작 사건을 배당하는데 썼다며, 저자는 “코미디”라고 꼬집었다. 더욱이 아직 수사도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벌써 사건의 성격을 ‘검언유착’으로 고정하니, 당연히 수사도 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자기들이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부정적인 검찰상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힐난한다.

 

* 공공의 영역에 침투한 음모론 -  저자는 우리나라 음모론의 대명사로 김어준을 소환한다. 대체 박근혜 정부에서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켜 얻을 이익이 무엇이길래 ‘누군가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켰다’고 얘기하고 나중에는 세월호 항적을 속이려 무려 1000여척의 선박 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찬다. 저자는 최근에 이런 음모론이 진지해야 할 공론의 장에 까지 침투했다고 개탄한다. 야당의 음모론이야 그저 좌절감의 표현이라지만, 여당은 반대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어 위헙하다고 경고한다. 조국 전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임명되자마자 대통령 탄핵부터 준비했다고 주장했다며, 정권을 담당한 이들까지 음모론적 기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자칫 현실감각을 상실해 국정운영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이런 모습들이 거의 매일 나타나는 듯하다고 한다.

 

* ‘노사모’와 너무도 다른 ‘문재인 팬덤’ - 팬덤이 팬과 다른 점은 콘텐츠를 팬픽이나 팬아트의 형태로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팬덤은 자신이 객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냥 정서적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팬덤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키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술적 믿음’에 빠지기 때문이란다. “우릴 믿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봐”라는 식이다. 노무현의 노사모 활동은 팬에 기초한 정치였다. 다른 커뮤니티와 싸우지 않았고 예의를 지켰다.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 후에 “이제 뭐 하실 겁니까” 묻자 “감시! 감시!”를 외쳤고, 그를 제대로 감시하려 모임도 해체했다. 그러나 문재인 팬덤은 다르다. 노사모의 토대가 후보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지지였다면, 문 팬덤은 후보자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유착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그러니 그를 감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지지는 철회해도 사랑은 철회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팬덤이라고 말한다. 대통령이 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주는 이상한 사태가 그래서 벌어진다고 지적한다.

 

*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 -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의 이루지 못한 꿈, 그 꿈을 대신 이뤄야 할 문재인의 운명, 그리고 그 과업을 이어 완수해야 할 조국의 사명. 조국은 졸지에 ‘현생 노무현’이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자신이 죽어도 진보는 살아야 했기에 그 절망적 순간에도 지지자들을 향해 “이제 나를 버리라”고 요구했다. 그에게는 꿈과 자기만의 철학, 비전이 있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그저 노무현의 친구였다는 이유에서 폐족이 된 친노의 복수와 복권을 위해 불려나올 운명이었을 뿐이라고 혹평한다. 조국 전 장관도 노무현을 닮기는커녕 그의 상징되는 가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부패한 권력이 선한 척하려면 부패를 잡는 검찰부터 악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것이 조국이 맡았던 사명의 실체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조국을 노무현으로 만들려다 노무현을 조국으로 만든 것”이라며 비판하면서 “노무현이라는 상징자산은 그렇게 더럽혀졌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런 짓을 자칭 아용지식인이 노무현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그 재단의 공식 채널을 통해 한다는 게 문제라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꾸짖는다.

 

* 헌법 위에 떼법 -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신천지 코로나 사태 때 총회장 등을 살인죄와 상해죄로 고발하고 총회장을 연행해 강제로 코로나 검사를 받게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법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공권력을 과도하게 남용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사이비 종교 신도에게도 헌법이 보장한 신앙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데 여기엔 대중을 시원하게 해주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포퓰리스트 욕망이 깔려 있었다고 꼬집는다. 8.15 광화문 집회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발생하며 대중의 분노가 이 집회를 허용한 판사에게 쏟아지자 정세균 총리와 추미애 법무장관 등이 모두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판사의 이름을 따 ‘박형순 금지법’까지 발의됐다. 저자는 “다들 미쳤다”며 타인의 집회에 반대하는 것과 그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설득한다. 그러면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경성(硬性)이라면, 현 정권의 코로나 긴급조치는 연성(軟性) 독재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특히 운동권 시절 586 세대가 공유했던 전체주의 문화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비판한다.

 

* 무너지는 진보의 도덕성 - 저자는 우리 진보의 도덕적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원래 도덕성은 진보에게 ‘생명’이었다. 노무현 노회찬 두 사람이 그것에 흠집이 났기에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당은 도덕성을 그저 승리에 방해되는 걸림돌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대표적인 예로 ‘검찰 쿠테타’라는 프레임을 든다. 이 프레임은 “검찰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려고 조국 일가를 내사했다”는 유시민 씨의 주장에서 출발했다고 비판한다. 절반이 사실로 드러나고 법원에서도 표창장이 허위라고 확인해 주었건만, 지지자들은 ‘대안적 사실’ 만들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법원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판사가 미친 것”이라고 외친다. 어느새 한국의 정치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짓이 허용되는 거대한 난장판으로 변했다고 저자는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사회의 나머지 영역들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가 없다 - 미국 전략사무국(OSS)은 나치 선전의 기본규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절대 흥분을 가라앉히지 말 것, 자신의 결점이나 오류를 인정하지 말 것, 절대로 비난을 용인하지 말 것, 한 번에 하나의 적에 집중해 잘못된 모든 것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 저자는 민주당 정권이 딱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는 이는 바로 고발한다. 대안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을 진영으로 갈라 친구의 잘못은 덮고 상대는 절대악으로 만든다. 저자는 “이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으로 규정하지는 않더라도, 최근 민주당 정권의 커뮤니케이션이 강한 전체주의적 특성을 보인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 대통령에 대해선 “자기 철학이 없이 이미 주류가 된 586에게 옹립당하고 관리당하고 있는 처지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는 나라를 쥐고 흔드는 이들 586 세력이 민주주의를 학습한 적이 없다며, 홍세화 선생마저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가 없다”고 지적했음을 상기시킨다.

 

* 진영수호의 늪에 빠진 정대협 - 위안부 운동의 대모인 김문숙(93세) 씨에 따르면 윤미향 씨가 대표가 된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모금에 집착했다고 한다.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로 인정받은 심미자 할머니도 “운동의 본말이 전도되었다”며 2004년에 모금 활동 금지 소송을 낸 바 있다. 나아가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비판했다. 남산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겨진 247명의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 심 할머니의 이름은 빠져 있다. 정작 많은 모금이 이뤄졌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 난방 지원도 못받고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 이미 명성교회가 쉼터를 제공했음에도 외진 곳에 새 쉼터를 마련했다. 할머니들이 쉬는 곳에서 민중당 행사가 열린 것은 또 무엇인가라고 되묻는다. 소식지 발행은 남편에게, 쉼터 관리는 아버지에게 맡겼다고 비판한다. ‘할머니들을 위한 운동’에 정작 ‘할머니들’은 빠져 있다. 윤미향은 한 추종자의 석사 논문에서 위인으로 추앙받았고, 이 논문을 쓴 이의 자제는 정대협이 관리하는 김복동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우연일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문완장파 - 저자는 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간단히 다음처럼 분류한다. 우선 ‘조금박해’로 불리는 조웅천 금태섭 박용진 김해영 등 소신파가 있다. 이해찬과 윤호중 정청래 같은 완장파도 있다. 그리고 두 부류 사이에 별 색깔없이 거수기 노릇을 하는 대다수 의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헤게모니를 쥔 것은 친문 완장파로, 이들의 견해가 곧 민주당의 당론이 된다. 완장파는 원칙의 보편성이나 논리의 일관성에 구애받지 않고, 보편성과 당파성을 더 중시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보편적 추상적 기준의 ‘원칙이성’은 없고,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하는 ‘기회이성’을 맹신한다. 조국 가족에는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막던 장관이 채널A 기자의 피의사실은 줄줄이 흘리는 등 법무장관마저 기회이성이 이미 확립되어 법질서까지 흔들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친문 완장파에게는 모든 개별적 경우가 규칙을 새로 제정해야 할 ‘제헌적 상황’이라며 그래서 저자는 “매 순간 그들은 혁명가”라고 비꼰다.

 

* 추종자들에게 짓밟혀 두번 죽은 노무현 - 지난 총선 때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이 노무현 대통령 묘약을 참배하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에 대해 저자는 “노무현 정신을 유린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민주당이 노무현을 철저히 이용해 먹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도덕성을 생명으로 여기라’는 메시지를 남겼는데, 친문은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노무현은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성했지만 친노는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입진보’들에게 돌린다고 비판한다. 노무현의 꿈을 운명으로 끌어안은 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도 세상은 노무현의 꿈에서 더 멀어졌다고 꼬집는다. “그런 의미에서 바보 노무현의 죽음은 실은 그를 닮고 싶어한 모든 바보들의 죽음이기도 하다”고 안타까와 한다. 그래서 저자는 “노무현의 시대에 노무현이 없다”고 지적한다. 노무현은 분명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외쳤으나 추종자들은 ‘반칙과 특권이 세습화되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맹비난한다. 그래서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두 번 죽었다고 말한다. 한번은 적의 손에, 한번은 친구의 손에. 적은 그의 육신을 죽였지만 친구는 그의 정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 사라진 문재인 대통령 - 저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철학이 없다고 비판한다. 남이 써준 원고나 읽는 의전대통령 같은 느낌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청와대가 문 대통령이 원고를 교정하는 사진을 올렸다며 “철학의 부재를 교정의 존재로 반박하는 격”이라며 한심해 한다. 저자는 현 정권의 윤리 관념을 ‘야쿠자 도덕’이라고 정의한다. 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사업만 합법적으로 한다고 야쿠자가 어디 윤리적이더냐”고 꼬집는다. 조국 전 장관도 범법만 아니라면 된다는 참모의 건의로 임명을 강행했다며, 야쿠자 도덕이 이 나라 공직 임명의 기준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여기에 대통령은 낙마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공식석상에서 얘기하며 ‘내 식구’ 철학을 드러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대통령에게 철학이 있었다면 제 식구에는 더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라 했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 “이 나라는 유시민의 날조와 김어준의 선동으로 대통령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며 “사실상 이들이 이 나라의 정신적 대통령 역할을 해 온 것”이라고 면박을 준다.

 

* 세월호 아이들이 고맙다는 문재인 대통령 - 저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세 번 정도 ‘뜨악’한 적이 있다고 술회한다. 첫 번째는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경쟁자였던 이재명·안희정 후보가 문팬덤에게 극심한 문자테러를 가하는 패악질을 저질렀을 때 “경쟁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표현한 때라고 한다. 두 번째는 대선후보로 세월호 분양소를 방문해선 방명록에 ‘미안하다. 고맙다’고 적었을 때란다. 도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가장 직접적인 사건은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임명한 법무부장관을 끝내 거부한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저자는 공사를 구분 못하고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 보이니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내 사람이 먼저다’로 변질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 특유의 패밀리 철학이 결국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을 번번히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 우상이 된 대통령 - 노무현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었다면 문재인은 수직적 커무니케이션으로 정확히 대극을 이룬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은 참여정부의 연장이 아니라 실은 단절”이라고 단언한다. 두 대통령의 차이는 현장 방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대비된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은 “정치쇼는 하지 않겠다”며 재임 중 가능한 현장 방문을 삼가려 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이미지 쇼에 매우 강하다. 문 팬덤들도 ‘뭉클, 울적’ 같은 표현으로 연출의 정치미학적 효과를 보여준다. 저자는 노무현의 감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문재인의 감동은 철저히 계산되고 연출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노무현은 권위주의 타파를 실행했지만, 문재인은 권위주의 타파를 연출한다고 지적한다. 

 

* 대한민국 주류의 교체 - 저자는 ‘진보가 과거의 보수가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다. 과거에는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이 그래도 머리 숙여 사과는 했는데, 문재인정권 사람들은 오히려 잘못을 적발한 사람들에게 성을 낸다고 지적한다. 그냥 비리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그 행위가 잘못이라고 말해주는 ‘윤리기준’을 건드린다고 말한다. 아예 그 기준을 바꿔버림으로써 자신들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대안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아빠 챤스’는 기회의 평등함이 되고, 문서위조는 과정의 공정함이 되고, 부정입학은 결과의 정의로움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제 절대적 진리는 사라졌으며, 이제 진리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제작된다”고 토로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배층이 되어 자기계급을 대변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안타까워 한다. 비판해야 할 현실을 자신들이 만들었기에 그들은 더 이상 비판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 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조차 잠재우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새 획득한 권력을 가지고 이제 그들은 세계를 날조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전통적 지식인이 멸종한 상황에서 말이다.

 

* 진보가 만드는 폐허 - 저자는 박원순의 죽음으로 이 시대 진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진보라는 이름의 광풍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여성 문제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자칭 페미니스트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하필 성 추행 혐의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한계가 그의 개인적 한계만은 아니라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위선은 우리 세대의 위선이며, 그의 어리석음 역시 우리 세대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를 표방해 온 한 세대의 위선과 어리석음이 이 사회를 폐허로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저자는 전한다. 그의 무책임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가 버려두고 간 피해자를 지켜줬어야 했지만 진보는 오히려 그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고 비판한다. 50만명이 서울시장(葬) 반대 국민청원에 서명했음에도.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피해자를 ‘피해호소여성’으로 바꿔 부르며 피해자를 두 번 죽였다. 피해자가 사라지면 가해자도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일까. 저자는 “도대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저 숭고한 사명감으로 얼마나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는다. 저자는 “그들이 짓는 아방궁에서 그저 거대한 폐허, 완벽한 파국만을 볼 뿐”이라고 안타까와 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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