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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이보다 더 섬뜩한 복수의 말이 있던가 "당신,부셔버릴거야"

[문화공작소] 1999년 드라마 '청춘의 덫',심은하X이종원의 통속 멜로
당시 '사랑 방해꾼'영주 역할의 유호정,시대를 앞서간 여성 캐릭터로 재해석

입력 2020-11-24 17:30 | 신문게재 2020-11-2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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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의 리즈시절이 담겨있는 1999년작 ‘청춘의 덫’.(사진제공=SBS)

 

무려 21년 전 드라마다. 하지만 배우도 패션도 연기도 여전히 세련됐다. 꾸준히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로 꼽혀온 ‘청춘의 덫’은 ‘마녀의 필력’이라 불리는 김수현 작가의 초기작이다. 1999년 방송된 심은하와 이종원이 주연으로 나선 작품으로 1978년 방송된 이효춘, 이정길 주연의 ‘청춘의 덫’을 리메이크했다.

 

방송 당시 20년만에 ‘젊은 피’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점과 “당신 부셔버릴거야”라는 명대사를 차지게 소화한 심은하의 열연으로 40%대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 리메이크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지고지순한 순종형의 여인과 야망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애증과 화해를 다룬다. 이종원이 가난한 집안의 장남 동우 역할로 ‘나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과 상황이 비슷한 윤희(심은하)와의 사이에서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딸 혜림(하승리)을 낳고 사실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청춘의 덫’의 빌런으로 치부됐던 영주 역할의 유호정.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멋진 여성이었다.사진제공=SBS)

문제는 동우가 사주의 딸 영주(유호정)와 사랑에 빠지면서 불거진다. 동우는 윤희와 다른 매력에 헤어나오지 못한다. 대학 동창이자 부자 집 딸 수연(김나운) 덕분에 동우가 다니는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 중인 윤희는 누구나 인정하는 여성상의 표본이다. 조용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참한 외모, 덤으로 마음까지 착하다. 아픈 예비 시부모와 줄줄이 딸린 시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천사표로 내년 봄이면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동우의 양다리는 금방 탄로 난다. 회사 내에 “공주의 간택을 받은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내 남자’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윤희의 충격은 컸다. 울어도 보고 빌어도 봤지만 동우는 사랑보다 야망이 큰 남자였다.

 

‘사랑하는 남자이자 아이의 친부’를 놔주는 게 윤희가 마지막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비극은 어린 딸 혜림이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시작된다. 위독한 딸의 마지막을 위해 단 한번만 와달라고 울부짖는 윤희. 하지만 동우는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도 ‘자신을 잡으려는 술수’라며 영주와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자식을 잃은 어미는 변한다.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를 파멸로 이끌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사람도 한번쯤 들었을 애증이다. 하지만 ‘청춘의 덫’은 거기에 맛깔나는 대사의 향연이 숨어있다.

 

당시에는 본의 아니게 남의 남자를 빼앗은 ‘재벌가 첩의 자식’으로 치부됐던 영주는 사랑했던 동우의 과거를 알고 쿨하게 떠난다. “내 결혼식 망쳤다고 남의 꽃밭까지 망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 옆에서 평생을 헌신했지만 성북동 큰 엄마(김용림)에 가려 호적에 오르지 못한 엄마(정영숙)에 대한 애틋함과 원망을 모진 말로 내뱉기 일쑤였던 그는 최근 재방송 후 “진정한 대인배” “지금 보니 심은하 보다 멋지다” “김수현 드라마 최고의 캐릭터” 등 호평의 주인공이 됐다.

 

유호정은 과거 영화 ’써니’의 인터뷰 당시 ‘청춘의 덫’에 대해 “지금이라도 영주 같은 인물이 온다면 무조건 출연할 것”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보인바 있다. 심은하 역시 윤희가 처한 상황을 격한 연기로 소비하지 않는다. 영주의 오빠이자 곧 회장이 될 영국(전광렬)에게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사랑에 빠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충분히 계산한 완급 조절로 소화해 내는 연기는 이 드라마의 백미다.

 

여자를 2주 만에 갈아치워 별명이 ‘이주일’인 영국은 방탕한 생활로 점철된 난봉꾼이었지만 그가 내면에 숨겨둔 상처와 외로움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윤희는 그를 마음으로 품는다. 자신을 잡아 준 여자에게 진심을 다하는 영국 역할의 전광렬은 이 드라마를 통해 ‘워너비 남편’감으로 떠올랐다.

 

더불어 빠질 수 없는 것은 여배우들의 패션 대결이다. 단군 이래 ‘고급스러운 여성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디자이너로 평가되는 지춘희 디자이너가 당시 심은하의 의상을 맡았다. 극 초반 그가 입었던 수수한 터틀넥과 치마는 대부분 무채색이다. 비서실 근무라는 보수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윤희가 가진 단정함이 반영된 결과였다.

 

본격적으로 영국의 약혼녀와 아내로 나오는 후반부는 우리가 아는 ‘재벌가 며느리룩’의 정석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드라마 초반의 수수한 옷과 후반의 럭셔리한 옷의 가격이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고가였다는 것. 심은하는 ‘청춘의 덫’ 속 의상에 반해 훗날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지춘희 디자이너에게 맡겼다는 후문이다.

 

최근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샤넬 할머니로 불린 정영숙의 사모님 패션은 또 어떤가.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기본으로 롱 드레스와 호피를 평소에 입는 과감함에 ‘투 머치’란 없다. 지금 봐도 멋짐 그 자체다. 여기에 진부한 재벌가 다툼을 배제하고 형의 죽음 이후 묵묵히 키워온 회사를 조카에게 물려주는 숙부(김무생)의 어른다움도 멋지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무생이 보여주는 연기의 품격은 ‘청춘의 덫’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스터피스다.

 

물론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이나 멘트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금이라면 바로 쇠고랑을 찰 사내 성희롱과 영국에게 “당신의 신발이 되겠다”는 윤희의 대사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물 같은 느낌조차 1999년작 ‘청춘의 덫’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결론은 권선징악의 표본이다. 욕심을 앞세운 동우와 영주는 파혼하고 희생의 아이콘인 윤희는 영국과 안락한 결혼생황을 이어간다. 그때는 그렇게 ‘끝난 드라마’로 알았지만 마지막 신에 비밀이 있었다. 공항에서 “내가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았다면, 너 올래?”라고 헤어졌던 영주의 말을 곱씹는 동우의 미소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울리는 전화벨. 그것은 다른 회사에 들어간 그를 찾는 업무용 호출이었지만 시대를 앞서간 열린 결말이었다. 그동안 ‘욕하면서 보는 진부한 드라마’에 지쳐 있었다면 ‘청춘의 덫’은 분명 당신이 사랑했던 드라마의 초심을 되찾게 만들 것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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