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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국수’ 김인 9단 영면…文 대통령 조화 보내

입력 2021-04-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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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1
6일 김인 9단의 영결식이 열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김인 9단을 애도했다.(사진제공=한국기원)

 

한국 현대바둑의 산 증인이자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이 영면에 들어갔다.

6일 오전 9시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김인 9단의 영결식장에서 진행됐다. 영결식에는 고인의 장조카인 김종길 씨가 영정과 위패를 들고 입장한 가운데, 고인의 부인 임옥규 여사와 아들 김산씨, 며느리 김지선씨 등 가족이 뒤따랐다. 한국기원에서는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를 비롯해 한상열 부총재, 윤승용 부총재, 곽영길·김상규·서효석·전재만 이사와 이종구 고문, 양재호 사무총장, 조훈현·이창호 9단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 고인 약력 보고와 추모영상 상영, 추도사 순으로 진행됐다.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는 “한국 현대바둑의 발전을 이끈 선구자였던 김인 국수는 평소 소탈한 성품으로 전문기사뿐 아니라 바둑계 구성원 모두에게 존경받는 어른이었다”면서 “한국바둑계 구성원 모두가 김인 국수의 뜻을 받들어 바둑 보급과 발전, 국위선양을 위해 온 힘을 쏟을 것이며 바둑이 더욱더 사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 대표로 나선 아들 김산씨는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치열한 승부사의 삶을 보지 못했다”면서 “아버지의 기록과 존경을 표하는 주위 분들을 보며 그 대단한 업적을 느낄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 지난한 세월을 보내셨는지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으며 느끼고 체감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영결식
한국 현대바둑에 큰 영향을 끼친 김인 9단의 영결식이 6일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에서 열린 가운데, 유족들이 고인을 애도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기원)

 

영결식 후 오전 9시 30분 빈소인 연세대 신촌장례식장 발인 이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마친 유족들은 오후 2시 20분경 고인이 평생을 바친 한국기원을 찾았다. 상주인 김산 씨가 위패를, 신진서 9단이 고인의 영정을 들고 한국기원 2층 대국장을 둘러본 후 도열한 임직원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장지인 경기도 광주 시안추모공원으로 향했다

김인 9단의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고인의 업적을 기렸고, 일본기원 고바야시 사토루 이사장이 조전과 조화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국 베이징바둑협회 자샤오위안 주석 등이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다.

한국기원장으로 거행된 영결식은 2006년 조남철 9단에 이어 두 번째다. 한국기원은 바둑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고인의 업적을 기려 정부에 훈장 수여를 상신했다. 

 

김인 9단
영결식 운구는 박치문 위원(중앙일보)과 목진석, 강동윤, 박정환, 신민준, 신진서 9단이 맡았다.(사진제공=한국기원)

 

한편, 김인 9단은 1943년 전남 강진 생으로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의 아성을 무너뜨리면서 바둑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23세의 나이로 조남철에게 3-1로 승리해 국수 타이틀을 쟁취했다.

15세인 1958년 프로기사로 입단해 19세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조남철 9단의 소개 편지로 기타니 미노루 문하생이 된 김인은 기타니 도장 사범 시절 조치훈 9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1963년 스승 기타니 9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본 생활 20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이후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 패왕 7연패 등 국내 기전을 휩쓸었다. 1978년 13기 패왕전과 4기 기왕전에서 각각 조훈현, 김희중 9단에게 패하며 마지막 타이틀을 내놨다.  

 

김인 조남철
1971년 운당여관 특실에서 열린 김인 9단(왼쪽)과 조남철 9단의 15기 국수전 도전4국 복기 장면.(사진제공=한국기원)

 

이목이 수려하고 기품 있는 김인의 대국 태도는 팬들을 매료시켰다. 중후한 기풍을 지닌 김인은 상금과 대국료로 가난한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많이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남배는 김인 9단이 타이틀을 잃자마자 사라졌다. 대회 스폰서였던 모 대학 이사장이 오직 김인 9단만을 위해 만들었던 대회였다.

바둑이 지닌 도(道)의 가치를 고수했고,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한 김인 9단은 TV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고집스레 참가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변치 않는 ‘청산(靑山)’으로 불리며 한국 바둑의 부흥을 이끈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고 있다.

김상우 기자 ksw@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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