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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바이든과 오바마> 스티븐 리빙스턴

입력 2020-09-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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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흑인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 조합 역시 ‘오바마-바이든’이 최초였다. 둘은 처음에는 유난히 설화가 많은 바이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역대급 브로맨스’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특급 케미를 보여 주었다. 버락과 조 둘은 곧 미국을 상징한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바이든은 당시 역대 가장 권한이 있는 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지금 공화당의 트럼프에 맞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바이든 당선 이후 펼쳐질 미국의 장차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오바마가 아직 공개 지지 선언을 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의 정치관과 개인적 성향 등을 미리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 너무 다른 두 사람,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 - 조 바이든은 자부심 강한 아일랜드인으로, 29세에 상원에 당선된 불세출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죄우우면 않는 솔직한 화법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설화가 끊이질 않았다. 반면 오바마는 늘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혹 말 실수를 해도 유머와 위트로 위기를 모면할 줄 아는 달변가였다. 천재적인 두뇌에서 나오는 탁월한 정치력이 장점이었다. 바이든이 외향적인 문학도였다면 오바마는 내향적인 학구파였다. 바이든이 우왕좌왕 시끌벅적한 할아버지였다면, 오바마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아버지에 가깝다. 그런 탓에 처음 상원에 들어갔을 때 오바마는 상원의 터줏대감 바이든의 수다를 몹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 바이든을 이끌기도, 눌러앉히기도 한 오바마 - 오바마는 민주당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바이든을 러닝 케이트로 발탁해 부통령 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첫 4년 임기를 마치고 2012년 재선에 나섰을 때, 힐러리로 부통령을 교체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2016년에는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던 바이든을 눌러앉히고 힐러리를 대선 후보로 밀어 바이든을 낙담케 했다. 나중에 바이든은 “당시 오바마는 내가 힐러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오랜 예비 싸움으로 당이 분열될 경우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힘을 못 쓸까 우려해 나를 눌러 앉혔다”고 말했다.

 

*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배우자감을 바꾼 오바마 - 오바마는 네덜란드계 일본 여성 셰일라 미요시 예거와 교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본질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신의 정체성임을 깨닫고 정치에 뛰어들면서 그녀와 이별을 고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겠다는 욕구와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시카고에서 정치를 시작하는 한, 그 지역 정치 환경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과 결혼을 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대상이 지금의 부인 미셸이다.

 

* 9.11을 계기로 ‘미국 구하기’ 나선 오바마 - 미국은 9.11 테러의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죄수들을 고문하고 성폭행까지 한 사실까지 드러나 미국인의 자긍심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부시 패거리의 야만성과 거짓말에 비해 오바마는 지성과 이성, 변화와 희망을 상징했다. 그러던 와중에 인종 문제가 커졌다. 이 때 오바마는 “여러분의 조상을 버리세요. 흑인과 백인, 이 두 혈통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그의 일부이며 더 나아가 미국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라는 연설로 ‘담대한 희망’을 전파했다. 이 연설이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바이든도 오바마의 이런 진솔함괴 용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부당한 처우를 겪은 경험이 있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인 인간적 교감을 갖기 시작한 전환점이 이 인종 연설이었다. 

 

* 버락과 조의 교감 - 후보 경선 운동 중 치받기는 했지만 오바마는 정적 바이든의 정치 기술과 깊은 연륜을 흠모했다. 특히 그에게는 백인 노동자 유권자들이 취약점이었다. 펜실베니아 같은 러스트벨트 지역에서 힐러리에게 패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이든은 그런 지역에 강점이 있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젬병에 가까왔던 오바마에게 확실한 우군이었다. 둘은 공통의 기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스포츠광이라는 점이었다. 둘은 경쟁 상대인 한편으로 스포츠맨 특유의 ‘팀워크’를 선호했다. 바이든은 그러나 이제까지 정치를 하면서 단 한번도 누군가의 부하였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는 오바마의 비전을 치하하고, 정신력과 따뜻한 마음도 높이 평가했다. 중산층을 도와야 한다는 구호에도 동의했다. 결국 그는 초기에는 말 실수로 어렵게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성실하고 총명한 대통령 파트너로 성장했다. 백악관 내에서도 오바마의 핵심 브레인으로 부상했다. 

 

* 바이든 “권한 있는 부통령 자리를 달라” - 바이든이 경선에서 물러나고 오바마와 힐러리가 대선후보 최종 경쟁을 할 때, 그는 오바마에게 “당신이 이긴다면 뭐든 부탁한 대로 하리다”라고 약속했다. 오바마는 러닝메이트로 그를 지목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 부통령은 늘 대체 인력이었을 뿐이다. 실제 국가를 통치하거나 국정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보직이었다. 1812년부터 1990년까지 거의 27년 동안 부통령 없이 국정 운영이 이뤄져 온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래서 바이든의 요청에 “대통령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구경만 하는 역할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입법 과정에 조언자 자격으로 참여하길 원했고,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길 바랬다. 대통령에게 포괄적인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먼데일 전 부통령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 오바마는 흔쾌히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면서 “조 바이든은 그냥 좋은 부통령이 아니라 위대한 부통령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 실수 제조기 바이든 - 바이든은 부통령직 수락 후 당내 토론회에서 “힐리러가 부통령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아니 나보다도 나을 것이다”라고 말해 설화에 휩싸였다. 자칫 오바마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때는 대선 경쟁자인 매케인이 여성 신예 정치인 세라 페일린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직후였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구설수 제조기’라고 폄하했다. 급기야 선거 캠프와의 조율 없이 정책방향을 내놓자 오바마까지 “도대체 바이든은 언제까지 헛소리를 해댈 거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둘이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도 한동안 바이든의 설화는 계속됐다. 하지만 곧 바이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며 현실을 이해했다. 이후 둘은 장거리 경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후 ‘브로맨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찰떡궁합을 이뤘다. 

 

* ‘반면교사’ 무소불위 부통령 딕 체니’ - 조 바이든은 과거의 부통령과 같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전임자였던 딕 체니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부시 대통령과 함께 했던 체니는 백악관을 장악한 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상적으로 권력을 휘들러 비난을 자초한 인물이다. 충성을 가장해 부시 대통령을 속이고 조종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의 권한이 워낙 광범위하고 독단적이라, 나중에는 누가 대통령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는 말까지 나왔다. 

 

* 인종갈등 불러온 게이츠 교수 체포 사건 - 오바마의 압승으로 인종장벽이 무너졌다는 평가까지 받고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 하지만 곧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학자 중 한명이던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 교수 체포 건이 터졌다. 집이 닫혀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모습을 신고받은 경찰 크로울리 경사가 그를 칩입자로 오인해 험하게 다룬 것이 화근이었다. 오바마가 이 얘기를 전하면서 “아시다시피 이 사건과 별개로 이 나라에는 아프리카계와 라틴계 미국인들이 경찰에게 부당하게 취급당한 역사가 아주 길고 깁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예요”라고 말 한 게 불을 지폈다. 경찰과 공공안전요원들의 집단 반발이 이어졌고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오바마는 크로울리 경사에게 전화로 사과했고 나중에 게이츠와 크로울리 경사를 2009년 7월30일 저녁 백악관으로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 - 이 조합은 미국 역사상 최초였다. 게이츠 사건도 결국 흑인 대통령과 백인 부통령이 나라를 이끌고 있으니 흑인 교수와 백인 경찰도 서로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바이든은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기에 어떤 의미에서 백악관에서 가장 흑인다운 백인이었다는 평을 듣게 됐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오바마, 게이츠, 크로울리 세 사람이 만날 때 바이든이 예고 없이 배석해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으로도 둘의 관계는 잠재적인 신뢰의 상징이 되엇다. 일각에서는 바이든이 오바마보다 미국 흑인의 의식에 더 익숙하고 친숙했다는 평도 나왔다.

 

* 아프간 사태에서 보여준 바이든의 강단 -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갈 지를 놓고 바이든과 나토 최고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장군이 맞붙었다. 바이든은 아프간에 국가를 세우기 보다는 파키스탄의 지역 테러분자들과 알 카에다를 제거하자는 쪽이었다. 반면 사령관은 아프간 병력 증강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자기 제안대로 작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전략적 패배의 위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바마는 결국 바이든의 손을 들어 주었다. 1년 이내에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평가 분석하고 그 다음 7개월이 경과한 후 2011년 7월부터 미군병력 감축을 시작한다는 지시을 내렸다. 그리고 사령관을 쳐냈다.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를 회복하고 부통령을 지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버럭과 조는 더욱 가까워진다.

 

* 바이든의 실수, 그러나 이슈 선점한 ‘동성결혼’ - 오바마가 아직 찬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때, 바이든이 TV 생방송에 나가 동성 결혼 찬성 입장을 밝혔다. 사실 오바마는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좌고우면했다. 1996년에는 동성 결혼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했다가 2004년 미국 상원 후보였을 때는 지지를 철회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인종 불평등에서 동성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민감한 주제마다 입을 다물었다. 오바마는 바이든의 언급에 처음에는 당혹해하고 화를 냈지만 결국 바이든 덕분에 자신의 생각을 천명했고 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민감한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리더십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 바이든 아들의 죽음으로 더욱 가까워지다 - 2014년 4월 경 바이든의 장남 보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보는 아버지 덕분에 자기 것이 되었을 모든 특권을 거부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를 알아보고 속도위반 딱지를 면해주려던 경관에게 딱지를 떼도록 했고, 9.11 테러 직후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 겠다며 주 방위군에 입대해 이라크 파병을 나갔다. 문제는 조가 의원들 가운데 개인 재산이 가장 적은 편에 속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들의 치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저당잡혀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오바마가 책을 팔아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거부했다. 보가 죽던 날 대통령은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부통령 관저에서 바이든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보의 장례식에서 오바마는 “조, 당신은 제 형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 바이든에게 준 깜짝 선물 ‘자유훈장’ - 바이든은 오바마의 판단에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절대로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오바마의 지성과 담대함에 경외감을 느꼈다고도 말했다. 오바마는 “우리 임기는 끝나가지만 지난 8년의 위대한 선물은 이제 시작”이라며 “우리는 영원히 가족으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는 바이든에게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하는 깜짝 이벤트를 열어 주었다.

 

*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무리? - 2019년 4월 초 민주당원 19명이 2020년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다. 바이든은 노동계급 유권자들 사이에 득표력도 높고 특히 트럼프가 이긴 주들에게 가장 경쟁력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였다. 일흔 네살에 당선되면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될 것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예상 외로 오바마가 지지 의사를 피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대변인을 통해 “두 분은 지난 10년간 특별한 유대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그 관계는 여전합니다”라는 상투적 멘트만 내놓았을 뿐이다. 부통령 직을 끝내기 전에 일생일대의 야심이었던 대선 출마를 좌절시켰던 오바마였기에 많은 말들이 나왔다. 전임 대통령이 애매한 입장을 취하자 바이든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는 “예비선거 시즌에 오바마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트럼프에 맞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다.(최근에야 오바마가 측근에게 "트럼프를 막기 위해 바이든을 도와야 겠다"고 얘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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