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이어령 80년 생각> 김민희

후대 위한 '보물섬 지도' 만들고 있는 이어령의 상상력 그리고 창조력

입력 2021-02-02 07:00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이 책은 이어령 교수와 그의 마지막 제자라는 저자가 쓴 사실상의 ‘이어령 회고록’이다. 이어령 교수의 80년 인생을 돌아보며 제자가 대신 써 준 자서전인 셈이다. 결코 회고록은 쓰지 않겠다고 밝혀온 스승을 위해 제자가 바치는 선물인 셈이다. ‘창조적 생각의 탄생을 묻는 100시간의 인터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창조와 상상력의 상징’ 이어령 교수의 철학과 소신, 후대에 바라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꽤 오랜 동안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는 후학들에게 삶에 도움이 될 ‘보물섬 지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책무라고 말한다.

 

 

 

* 돌잡이로 ‘책’을 잡았다는 이어령 - 한 살 때 돌잡이로 이어령은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한다. 책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마냥 기뻐했고 그 후로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한다. 일본에서 열린 도쿄국제도서전 때 한 일 양국의 천재 두 명을 붙여 ‘디지털 시대, 왜 책인가’라는 주제로 일본의 세계적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와 한일전에서 맞붙었을 때 이어령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은 돌상에서 잡은 책이며, 책을 읽어주신 어머니가 나의 두 번 째 책”이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 ‘천재’를 알아본 ‘백락’ ? 저자는 이어령이 ‘창조적 인물을 알아보는 눈 밝은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실제로 이어령은 “나는 천리마(천재)가 아닌 (천재를 알아본) 백락이야”라고 말해 왔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중국 춘추시대 사람이다. 이어령은 그러나 이렇게 찾아낸 사람들과 굳이 인위적으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찾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어령은 미국을 부러워 한다. 그는 “미국이 아직도 기회의 땅인 것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리마를 마음껏 달리게 해 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문화 풍토와 사회 환경, 톱-다운 방식의 교육체계가 그 머리 좋고 빛나는 천재들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있다”고 아쉬워한다. 

 

* 이어령이 알아본 천리마들 - 이어령은 1984년 1월21일자 조선일보에 쓴 ‘귤이 탱자가 되는 사회’라는 글에서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백남준을 제대로 알렸다. 세계적 화가가 된 중국의  이우환은 그가 다짜고짜 “왜 한국만 서양식으로 띄어쓰기를 하느냐”고 따진 것을 계기로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음으로 양으로 후원했다. 잊혀질 뻔 했던 천재 작가 이상을 발굴해 낸 것도 그의 혜안 덕분이다. 건축가 김수근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김덕수의 사물놀이 뒤에서 보이지 않게 큰 역할을 했다. 국악인 안숙선과 국수호는 물론 박완서 황석영 김승옥 최인호 등 무명이었거나 어려운 사정에 처한 예술인과 문학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아래아한글을 만든 가난한 대학생 이찬진을 과학기술처 이상희 장관에게 연결시켜주어 결실을 맺도록 도운 것도 이어령이다. 

 

* 포스트 코로나에 던질 키워드 ‘눈물 한방울’ - 이어령은 ‘눈물 한 방울’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한 눈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나의 눈물이 남을 위한 눈물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단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인 늑대 사회인 듯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귀한 영혼의 빛, 영원한 약속같은 36면체의 찬란한 눈물 한 방울을 남기기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길 그는 원한다. 

 

* “나는 천재가 아니라 호기심 많은 질문쟁이” - 이어령은 천재를 가르는 기준은 선천성인데, 자신은 그런 천재성을 타고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창조력과 상상력의 원천을 ‘물음느낌표(?+!)’라고 밝힌다. 1962년 미국의 마틴 스펙터가 고안한 부호다. ‘왜?’ ‘어떻게?’ 하는 물음표가 있어야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는 느낌표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어령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질문을 끊임없이 해대는 아이였다. 엉뚱하게 혼자 딴소리를 하는 그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얄밉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의견충돌이 많았다고 한다. 자연히 고독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고 그 결과가 타우마제인(taumazein), 즉 지적 호기심이었다고 한다. 이어령은 “나를 키운 8할은 물음표였다”고 말한다. 

 

* 서당의 반란 -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을 다스리기 위한 특급처방으로 이어령의 부모는 그가 여섯 살 쯤 되던 해에 서당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의 기이함은 계속된다. 서장 훈장이 ‘하늘 천 땅지 검을 현 누를 황’을 외우게 하자 대번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파란데요?”라고 당돌하게 묻는다. 그 길로 그는 서당에서 쫒겨났고 다시는 서당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나중에야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에 묻힌다’, ‘하늘나라로 갔다’는 표현에서, 천자문에 왜 하늘을 검다고 했는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 이어령의 ‘어려운 독서론’ - 이어령은 “우리는 남편을 서방(書房)이라고 부른다”며 “그 만큼 책을 귀하게 여긴 민족임을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도 어려운 독서를 통해 추리력이 길러지고 뇌세포도 활성화되었다며, 아이들에게 수준 높은 책을 읽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너무 단순한 내용의 책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두뇌개발을 오히려 제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반짝이는 두뇌를 활성화시키려면 능동적 독서, 추리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독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 <우상의 파괴>로 ‘붓 깡패’ 별명의 얻다 - 이어령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자 마자 22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실었다. 당시 문화 권력의 정점에 있던 김동리를 포함해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했고 그런 문단 풍조를 맹신하는 젊은이들까지 몰아세웠다. 덕분에 ‘붓 깡패’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문단 원로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그분들을 우상으로 섬기는 내 또래의 젊은이들을 향해 던진 불화살이었다”고 회고한다. 

 

* ‘천재’ 이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다 - 이어령은 자칫 누구도 쳐다보질 않을 뻔했던 작가 이상의 진면목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대학 4학년때 당시 서울대 문리대 <문리대학보>에 ‘이상론-순수의식의 뇌옥(牢獄)과 그 파벽(破壁)’이라는 평론을 발표해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천재 작가 이상을 세상에 소개했다. 그리고 자칫 영영 묻혀 버릴 뻔했던 이상의 작품 상당 수를 발굴해 <문학사상>에 실었다. 그는 이상을 “동시대 감각으로 내게 감동을 준 최초의 작가”라고 표현했다. 

 

* ‘갓길’, ‘즈믄둥이’… 토착어에 생명을 불어넣다 - 무심코 쓰는 말 가운데 이어령이 만든 것들이 많다. 저자는 “이어령은 낡은 말에 숨결을 불어넣어 새로운 개념어를 탄생시키는 데 귀재”라고 말한다. 도시의 자투리 땅에 세운 작은 공원을 ‘쌈지공원’이라고 이름 붙였고, 새천년 밀레니엄 베이비를 ‘즈믄둥이’라고 칭했다. 동북아로 굳어져 가던 동아시아 지역의 명칭을 한·중·일로 회자케 한 것도 이어령이다. 그 많은 말 만들기 가운데 최고봉으로 그는 ‘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들었다. 한국 문화 풍토에 관한 신문 연재를 기획하면서 만든 말이다. 토착어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속도로 표지판 가운데 ‘갓길’도 초대 문화부장관 시절에 바꾼 말로 그가 큰 애착을 갖고 있다. 

 

* ‘어용’ 비판에도 ‘진영’에 흔들리지 않다 - 어지러웠던 시기에 <세대>라는 잡지가 어용지 모양새로 창간됐다. 하지만 이어령은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권두언에 ‘지성의 등화관제’라 제목을 붙혀 군사문화 속에서 당당히 소리내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힘 없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참여시인 김수영과의 3개월에 걸친 지상 논쟁을 통해 이른바 참여론자들의 나약함을 꾸짖었고, 한승헌 등의 필화 사건 때는 법정에서 그들을 감쌌다. “작가는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이라는, 이어령의 유명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발언도 이 때 나왔다. 저자는 “이어령 교수가 지키고자 한 것은 특정 문학이 아니라 문학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 일본 지식인들을 놀라게 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 - 이 책은 일본어로 먼저 쓰여져 외국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첫 한국인 저작물이다. 1973년 우연한 프랑스 출장길에서 잠시 일본에 머물 때 사적인 술자리에서 이어령이 일본 문화에 관해 거든 얘기를 듣고 나중에 스노베 료조 당시 주한일본대사의 권유로 책을 내게 되었다. ‘일본이 참다운 대국이 되려면 더 작아지면 안된다. 오니(도깨비)가 되지 말고 잇슨보시(난쟁이)가 되어야 일본은 더욱 빛날 것이다’ 라는 게 요지다. 편견 없이 바라보았기에 일본인의 정곡을 찌르는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88 서울올림픽과 ‘굴렁쇠 소년’ - 굴렁쇠 소년 윤태웅은 ‘바덴바덴의 소년’으로 불린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차차기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하던 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올림픽 개막식 1분 동안 굴린 굴렁쇠는 전 세계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원으로 만들어진 굴렁쇠를 이어령은 지구, 올림픽 마크의 원, 동양의 사상으로 보았다. 한국의 어린이가 굴리는 굴렁쇠는 미래의 한국, 미래의 지구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 - 이 노래는 지금껏 올림픽 주제가 가운데 최고 인기곡으로 꼽힌다. 음반만 1700만장 이상이 팔렸다.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가 곡을 만들고 미국의 톰 휘틀록이 작사를 맡았다. 두 사람은 영화 ‘톱 건’의 주제가인 ‘Take My Breath Away’를 함께 만들어 골든글로브 상을 받은 명콤비다. 이 곡을 공식 주제곡으로 선정하기 전에 유명 트로트 가수 K씨의 노래로 음반까지 제작된 상태였지만, 이어령과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새로운 주제곡으로 바꾸기로 했다. 대신 가사에 ‘벽을 넘어서’‘아리랑’‘서울’ 등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키워드를 넣도록 했다. 결국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희대의 명 가사가 탄생했다.

 

*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3불 3가 운동’ - 88서울올림픽 성공으로 문화의 저력을 실감한 정부는 문화부를 문화공보부로부터 분리 출범시키면서 이어령을 초대 장관으로 전격 임명했다. 얼떨결에 장관직을 수락한 이어령은 문화 행정에서 딱딱한 관료주의 벽부터 허물어야겠다고 판단하고 ‘3불 3가’ 운동을 제안했다. 3불(不)은 문턱 없이 말하기, 생색내지 않고 말하기, 사심 없이 말하기였다. 3가(可)는 문화의 우물가에 두레박 놓기, 부뚜막의 부지깽이 되기, 바위의 이끼되기 였다. 꼭 필요한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면서,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현실을 생명의 이끼로 덮자는 것이었다. 문화부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문화부 전화 착신음을 까치 소리로 만들고, 획일적인 명조체를 안상수체로 바꾸는 등 많은 변화를 꾀했다. 

 

* ‘한예종’을 탄생시킨 5분 스피치 - 토종 예술영재의 인큐베이터로 자리잡은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옥,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발레리노 김기민 등을 배출했다. 영화 ‘곡성’의 나홍진 감독,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 외에 영화배우 장동건 오만석 이선균 박소담 김고은 박정민 이제훈 등을 배출했다. 해외로 나가야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예술영재들이 이곳에서 육성되고 스타로 발돋움했다. 1991년 12월 30일 이어령이 문화부 장관 임기 마지막 날에 극적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 제정을 밀어붙힌 덕분이다. 당시 다른 부처 장관들도 산하에 인재 양성 교육기관을 설치하려 했기에 반발이 많았으나 국무회의에서 마지막 5분의 발언 기회를 얻어 결국은 관철시켰다. 그 때 이어령은 “유학을 가지 않고도 최고 수준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자”고 역설했다.

 

* 노태우 대통령의 ‘참용기’에 고개숙이다 - 한국은 1991년 9월에 유엔에 가입했다. 관례에 따라 기념물을 선정해 보내야 했는데 당시 외교부는 신라 금관 복제품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주무 장관인 이어령이 “관광 기념품 같은 모조품을 국가 상징물로 보내선 안된다”며 대안으로 최초의 한글 활자본인 월인천강지곡의 활자본을 복원하고 이를 인쇄했던 당시 활자를 재주조한 조형물을 제작해 기증하자고 요구했다. 논란이 길어지고 결론이 나지 않자 이어령은 직접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재가를 받아낸다. 이 때 노 대통령은 이어령에게 “이 장관, 참용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참아라의 참, 용서하라의 용, 기다리라의 기, 이것이 참용기”라며 노 대통령은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라고 말한다. 순간 천하의 이어령도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 ‘천재끼리 알아본다’ 백남준과의 우정 - 이어령은 1984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귤이 탱자가 되는 사회’라는 글을 올렸다. 당시로선 한국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비디어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소개하며, 창조적 예술가가 싹틀 수 없는 국내 풍토에 관해 지적한 글이었다. 백남준은 서울올림픽 후 해외 기자들에게 이어령 교수의 실명을 언급하며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이 세계적인 작품이었다”고 화답했다. 이를 계기로 둘은 급속히 친해져 만날 때마다 달걀 모양의 돌맹이나 향나무에 낙서나 그림을 그려 교환하며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다. 백남준의 비디h오 아트를 리사이클로 변환시킨 것이 대전엑스포전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령은 백남준 사망 후 백남준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기꺼이 맡았고 지금도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 아직 못 이룬 두 개 프로젝트 - 이어령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아직 현실화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일명 ‘세계의 길’ 프로젝트다. 산등성이 폐도로를 이용해 전주와 금산 무주구천동을 잇는 둘레길 조성 프로젝트다.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지역 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줄 수 있게 만들어주자는 취지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지자체 수장이 교체되면서 사실상 무산된 상태다. 다른 하나는 남고산성 개발 계획이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성 남고산성을 서예 명장들이 모이는 곳, 한국의 서예 역사를 재현하는 마을로 개발하려는 계획이다. 한지와 한옥을 유명한 전주이니 부채공장과 한지 공장 등을 세워 ‘서예의 명당’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 즈믄둥이 탄생 생중계 프로젝트 - 이어령은 ‘생명’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다. 그는 새천년준비위원장을 맡아 관련 이벤트를 기획하면서, 새천년에 국내에서 처음 태어난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 이른바 즈믄둥이(밀레니엄 베이비)의 탄생 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세계를 향해 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즈믄은 천(千)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고려가요에도 등장하는 말이다. 문제는 당시 하루에 시냉아가 1600명 정도 태어나는데 첫 아이가 어디에서 나올지 알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부인과협회와 공조해 가능한 아이의 수를 압축하고 압축해 최종 후보 6명을 선정했다. 해당 산부인과 분만실을 광화문 행사장에 설치된 컴퓨터 모니터와 광키이블로 연결했다. 결국 2000년 1월1일 0시 0.1초에 경기도 안양시 성심병원 산부인과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이 장면은 생생하게 전 세계에 타전됐다.

 

* “위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 진짜 창조” - 이어령의 ‘꼬부랑고개 이론’이 있다. 모든 고개는 직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절대로 직선으로 가지 않고 지그재그로 많은 시행착오와 위기를 넘기며 전개된다는 얘기다. 그는 “‘위기는 기회다’라는 명언을 버리자”고 말한다. 위기는 기회가 아니라 그저 위험한 상황일 뿐이라며, 위기가 닥쳐서야 부랴부랴 해결 방안을 찾지 말고 위기가 오지 않도록 분석하고 대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로 또 같이’ 라는 말도 ‘따로 서로’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에게 의존하는 사회도, 독립된 갸체가 남을 지배하는 사회도 아닌, 윈-윈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주의 - 디지털이 차가운 컴퓨터 정보공학의 세계라면 아날로그는 따뜻한 인간애와 생명의 가치가 살아 숨쉬는 세계다. 이어령은 2006년 후기 정보사회의 키워드로 이 둘을 결합한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차가운 디지털의 대척점에 있는 따뜻한 아날로그를 끌어 안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AI(인공지능)가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폐해를 불식할 구원투수가 될 수 있다고 낙관한다. AI 디지로그 덕분에 진짜 꿈같은 세상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날로그의 접촉과 디지털의 접속은 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라고 강조한다. 디지로그를 잘 발달시키면 빈부격차가 오히려 줄고 육체적·지능적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자기복제가 무한대로 가능해진 ‘비트경제’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가 공짜로 제공되는, 전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출현할 것이라는 전망한다. AI로봇이 인간의 직업을 빼앗아갈 것이란 전망에 대해서도 “바보 같은 걱정”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정보화시대에 AI는 우리에게 평등과 행복을 약속해 주어야 하며, 그렇기에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주의로 가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생명자본주의란 생명 가치가 보편적 문화로 반영되고, 물질적인 가치가 아닌 공감과 기쁨이 참 가치가 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 남을 배려하는 젓가락 문화 - 이어령은 2015년 한·중·일 문화도시 프로젝트에서 청주가 중국 칭다오와 일본 니키타와 함께 문화수도로 선정되자 ‘젓가락 페스티벌’을 제안한다. 청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출토지인데다 고분에서 수천점의 젓가락이 출토된 곳이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가 탄생한 곳이라는 데 착안했다. 그는 젓가락에서 한국의 배려 문화를 얘기한다. 숟가락이나 포크로 한 번에 퍼먹지 않고 콩알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혼자 독식하지 않고 이기심을 억제하는 마음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중국 젓가락은 큰 식탁에서 음식 운반을 위해 길어야 했고, 일본은 밥그릇을 턱밑까지 대고 먹느라 젓가락이 길 필요가 없었다고 분석한다. 우리는 중간이란다. 숫가락 젓가락이라는 말은 ‘손가락’의 연장에서 나온 말이라며, “먹는 도구의 이름이 인체와 연결된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고 말한다.

 

* “아이들 창조교실 만들고 싶어” - 이어령은 ‘못다 이룬 창조’ 가운데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저자의 질문에 ‘어린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을 위해, 놀면서 배우는 창조교실을 만들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여러 번 시도는 해 보았지만 기존 학교 교육 시스템을 건드리는 일이라 잘 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본대로 얘기해야 하는데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거짓과 잘못된 옷을 입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도 “우물물을 마시려 하지 말고, 우물물을 파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 

 

* “나는 보물섬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 - 이어령은 “나는 경천동지할 만한 것들을 얘기한 적이 없다”며 “창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안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수정해 가고 있다. 이른바 ‘해녀와 전복론’이다. 바다 깊숙이 좋은 전복을 발견한 해녀가 ‘내일 좋은 사람이 오면 따다 줘야지’ 하며 뭍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전복은 점점 크는데 해녀는 이제 늙어서 전복에 갈 수 있는 힘이 없다. 마지막에는 전복으로 가는 보물섬 지도 밖에 못그려 주게 된다. 이어령은 “내가 요즘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그런 보물섬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아 가려면 각자가 독립된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리고 “하루를 살아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삶이야 말로 독립된 주체로 우뚝 사는 삶의 경지”라고 후배들을 독려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