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마로우 바이 투게더의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의 멜로디는 신나지만 가사의 의미가 깊습니다.” (말레이시아 누리꾼)
“방탄소년단의 ‘봄날’ 가사는 매우 희망적입니다.”(슬로바키아 누리꾼)
K팝, K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면서 한국어의 ‘말맛’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는 해외 팬들이 늘고 있다. 그간 한국어는 영미권 언어와 문장구조, 문법이 다르고 동사활용이 변화무쌍해 ‘배우기 힘든 아시아 언어’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K팝 가수들이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오징어게임’ 같은 K드라마가 글로벌 OTT 플랫폼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한국어를 배워 깊은 뜻을 이해하려는 글로벌 누리꾼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음악 스타트업 기업 스페이스오디티(대표 김홍기)의 K팝 팬덤 플랫폼 ‘블립’(blip)이 한글날을 맞아 주최한 ‘내 인생의 한글 가사’ 공개 모집에는 약 6만명의 K팝 팬이 몰렸다. ‘내 인생의 한글가사’는 K팝 팬들이 자신에게 특별한 아티스트의 노랫말을 선택해 사연과 함께 올리는 이벤트다.
좋아하는 곡과 가수는 다양하다. 아이돌 가수 중에는 여자친구, 아스트로, 인피니트, 세븐틴, 데이식스, 방탄소년단, 몬스타엑스, 샤이니, 온앤오프, NCT드림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솔로가수 중에는 아이유, 이승윤, 이무진, 디오(엑소), 김재환, 안예은 등이 고루 인기를 얻었다. 트로트 가수인 영탁, 김호중, 임영웅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국가별로는 미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서 참여도가 높았다.
K팝 팬들이 ‘인생가사’로 꼽은 이유를 읽다 보면 ‘K팝=퍼포먼스 위주의 보는 음악’이라는 공식이 깨진다. 일례로 JJ프로젝트의 ‘내일, 오늘’의 “이 길일까 저 길일까/내 선택들이 점점 두려워져”를 택한 말레이시아 팬은 “이 가사는 내 삶과 감정을 묘사한다”고 적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K팝 팬은 “최근 부친상을 당한 뒤 슬플 때 이 노래가 위로해줬다”며 방탄소년단의 ‘둘! 셋! (그래도 좋은 날이 더 많기를)’을 꼽았다. 한 태국 팬은 레드벨벳의 ‘오 보이’에서 “배운 적 없었던 말로 입을 열고/오직 널 담으려 감은 눈을 뜨고/나조차 정말 몰랐던 날 발견한 걸” 가사에 대해 “첫사랑을 잘 표현한 가사”라고 평했다.
대체로 해외 팬들은 K팝 가사에서 희망과 위로, 긍정의 힘을 얻는다고 입을 모았다. K팝 팬이기도 한 페루 출신의 스페이스 오디티 인턴사원 안나(24)씨는 본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K팝 가사는 영어, 스페인어와 달리 특유의 은유법으로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한다”며 “‘마음이 답답하다’는 문장은 영어나 스페인어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한국어는 특유의 비유와 은유로 다양한 문장력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인피니트, 박효신의 팬이기도 한 안나씨는 박효신의 ‘굿바이’ 중 “이젠 멈춰버린 화면 속에서/내게 여름처럼 웃고 있는 너/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굿바이”를 자신의 ‘인생가사’로 꼽았다. 그는 “노랫말과 같은 이별경험은 없지만 가사가 주는 느낌이 좋다”며 “K팝 가사를 좋아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체로 힘든 상황을 겪을 때 노랫말이 힘이 된다고 한다”고 전했다.
스페이스 오디티의 김홍기 대표는 “과거 중장년 세대가 ‘굿모닝 팝스’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를 공부했다면 글로벌 MZ세대는 K팝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어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있다”며 “팬들이 남긴 사연을 읽어보면 K팝의 가사 자체가 이들에게 위로를 안기고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스페이스 오디티 측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와 손잡고 가장 많은 응모를 받은 작품 가사를 시각화해 12월 중 온라인 전시를 진행할 계획이다. 아울러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메타버스 전시로도 선보일 방침이다.
◇K드라마, K팝으로 한국어 배우기 열풍…‘오징어게임’ 이후 증가세
K팝과 함께 K드라마도 K컬처 팬들에게 한국어교재로 활용도가 높다. 유튜브에 ‘K DRAMA’를 검색하면 한국 드라마의 특정장면을 교재로 한국어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는 사이트가 줄줄이 게시된다. 과거 한국인들이 미국 시트콤 ‘프렌즈’로 영어를 배우듯 글로벌 MZ세대는 ‘사이코지만 괜찮아’ ‘사랑의 불시착’ ‘나의 아저씨’ 같은 인기 드라마를 교재 삼아 한국어를 배우곤 한다.
방탄소년단과 같은 인기 K팝 그룹이 예능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등 자체 콘텐츠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집중적으로 한국어를 알려주는 채널도 있다. 유튜브에서는 ‘방탄소년단과 함께 한국어 배우기’라는 이름을 단 채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어 배우기 붐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인기에 따라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오징어게임’ 출시 이후 한국어 학습에 대한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도 ‘오징어게임’ 방영 후 언어학습 애플리케이션인 듀오링고의 한국어 학습자가 영국에서는 76%, 미국에서 4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아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도 눈에 띈다. 방탄소년단 소속사 하이브의 독립법인 하이브 에듀는 지난해 8월 출시한 한국어 교재 ‘런! 코리언 위드 BTS’(Learn! KOREAN with BTS)는 전 세계 30여개 국가 및 지역에서 30만권 가량 판매됐다.
영국 셰필드대와 미국 미들베리대, 프랑스 에덱비즈니스스쿨 등 7개국 9개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 교재로 채택돼 사용 중이다. 하이브는 올해 4월 ‘런!코리언 위드 타이니탄’(Learn! Korean with TinyTAN)을 내놓기도 했다.
㈜한터글로벌은 지난 7월 글로벌 K팝 팬덤을 위한 ‘K팝 딥다이브 딕셔너리’(K-pop Deep-dive Dictionary)를 선보였다. ‘K팝 딥 다이브 딕셔너리’는 ‘최애’ ‘입덕’ ‘옵’ ‘공굿’ 등 팬들 고유의 은어를 소개한다. 한국인 중장년들에게도 낯선 언어지만 K팝 팬들은 필수로 알아야 하는 단어로 꼽힌다. 한터글로벌 측은 “일상 언어와 차별되는 용어의 장벽으로 인해 K팝에 거리감을 느꼈던 글로벌 팬들이 K팝에 쉽게 입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