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기자의 사적라이프] 내가 사랑한 티셔츠
'집안에서의 교복'으로 불린 흔하디 흔한 옷
기발한 문구와 다양한 그림에 평상복에서 외출복으로
대략 난감하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결심하며 ‘물건 버리기’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유독 더운 여름이었지만 5월부터 8월까지 산 티셔츠만도 도대체 몇 벌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목에 옷깃(카라)이 없는 라운드 티만 말이다. 패션철학은 간단하다. 되도록 단정함을 추구하자인데 티셔츠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색과 소재가 좋아도 카라가 없는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도 늘 내려놨다. ‘티셔츠=집에서 입는 옷’이란 고정관념도 있었고 그런 옷은 차고 넘쳤으며 굳이 돈 들여 살 옷인가에 대한 확고함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 있는 티셔츠들은 취재 출입처에서 받은 홍보용과 출장지에서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몇번 빨면 목이 늘어나거나 프린트 부분이 희미하게 벗겨지기도 하는 싸구려부터 면 40수 이상의 쫀쫀함을 자랑하는 제품까지 다양하다. 일단 사이즈만 맞으면 집에서 편하게 입기에 이 만한 게 없다. 하지만 집 밖에서는 다르다. 티셔츠라면 피케 디자인(두세개의 단추가 있고 카라가 붙은 스타일)이 아니고선 분리수거장이나 슈퍼에 갈 때도 반드시 환복한다. 그런 패션철학의 소유자임에도 올 여름엔 순전히 티셔츠를 위해 지갑을 열었다.
시작은 생일 선물이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광팬인 나를 위해 지인이 오스칼이 그려진 핑크색 티셔츠를 보냈다. 삼청동 어딘가 구제옷 가게에 걸려있는 걸 발견하곤 “예쁘다”고 한 마디했던 걸 기억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티셔츠의 기준은 만원 이하라는 생각을 깨는, 4만 5000원짜리였다. 선물로 받았으니 과감히 문 밖에 입고 나갔다.
한때 신인류의 등장으로 불렸으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우리 X세대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만화 속 오스칼은 남장여자지만 되려 여자들이 더 빠져 버릴 정도로 마성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였다. 그런 오스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이런 티셔츠는 어디서 사냐?”며 반가워했다.
어느 새 ‘들장미 소녀 캔디’가 프린트된 해외 사이트의 결제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국내에 사이즈가 없다는 핑계로 인터넷 상거래에 중독돼 있는 상태였고 알고리즘이 쇼핑의 세계를 침범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일본어 가타가나가 써 있는데 좀 걸렸지만 어차피 집에서 입을 거라 누가 볼까 싶었다.
사실 티셔츠라는 게 은근히 까다롭다. 사실 이 옷은 잘만 입으면 세상 힙한 패션 피플이 될 수도 있다. 반면 한 순간에 무쓸모의 아이콘으로 등극할 수도 있다. 어깨 봉제선이 딱 맞고 반팔이어도 끝을 살짝 접어 입는 것은 미남의 대명사 제임스 딘이 박제한 젊음의 상징이다. 멋 부린다고 몇 치수 크게 입는 건 되려 티셔츠를 욕보이는 짓이다. 살은 가릴 수 있어도 옷 특유의 자연스러운 멋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데 술로 비유하자면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를 굳이 얼음이 아닌 물에 희석해 마시는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뒤늦은 티셔츠 사랑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본 ENA드라마 ‘남남’을 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극 중 17살 차이나는 친구같은 엄마와 사는 배우 최수영이 무심한 듯 입고 나온 종이인형이 그려진 흰색 티셔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라 부분이 파란색으로 돼 있어 시원해 보이기도 하고 왕년에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던 향수를 자극하는 프린트였다. 하지만 역시나 똑같은 디자인은 국내 품절이었다.
재미난 그래픽 티셔츠를 내놓기로 유명한 유쓰배쓰의 제품으로 페이퍼돌 카키는 정가가 4만 8000원이었지만 마침 20%가 세일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키털트에 가까운 티셔츠 중독자겠지만 유명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조차 티셔츠 예찬 에세이를 내놓은 적이 있다. 수집한 적도 없는데 상자가 넘치도록 쌓이게 됐다는 옷더미 속에서 잘 선별한 티셔츠를 보며 쓴 글은 ‘내가 사랑한 티셔츠’란 부제를 달고 정식으로 출판됐다. 제목은 무려 ‘무라카미 T’라고 심플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 책을 찾아보다 마침 성수동에 열린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 팝업 행사가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평일 오후에도 무려 웨이팅이 20분이 넘었다. 그 곳에서 만난 여대생 두명의 옷차림이 흥미로웠다. 둘 다 태극기가 팔뚝에 패치로 붙어있고 뒤에는 각각 ‘KOREA ARMY’와 ‘ROKNAVY’라는 영문이 써 있었다. 누가 봐도 패스트 패션(최신 유행을 즉각 반영한 디자인, 비교적 저렴한 가격, 빠른 상품 회전율로 승부하는 옷)이 훨씬 익숙할 듯한 연령대와 외모에 영 안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비밀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풀렸다. 일명 ‘로카티’로 불리는 곰신(군대 간 남자 친구나 애인을 기다리는 여자들을 일컫는 말)들의 유니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친구들이 이렇게 입고다니는 걸 은근 기뻐한다나. 연인이 있음을 표시하는 무언의 표현인 셈이다. 게다가 땀 흡수가 용이한 쿨론 소재여서 여름에는 실용적인 면에서도 만점이란다.
그렇게 아련한(?) 첫사랑을 추억하며 또다시 R.O.K.A.F(대한민국 공군)가 그려진 남색 반팔티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요즘 줌바 수업 때마다 입고 다니는데 여간 편한게 아니다. 구김도 없고 건조도 빠르다. 사실 남편은 아직도 왜 이 티셔츠를 샀는지 모른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빨래를 개다 말고 “이 쌩뚱맞은 티셔츠는 뭐야?”라고 물어보길래 “OO(아들이름)이 유니폼 멋진 공군가면 좋잖아”라고 얼버무렸다. 사실 그건 엄마로서의 로망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밀덕(밀리터리 덕후)으로 자란 아들은 벌써부터 가장 기간이 짧은 곳에 가겠다고 우기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티셔츠의 세계를 정의하자면 끝도 없다. 목 부분도 V넥, U넥, 라운드넥, 터틀넥, 보트넥 등 모양이 다르다. 원단에 따라 두께와 촉감이 천차만별인 건 물론이고 소매와 밑단의 길이, 사이즈, 핏 등에 따라 스타일도 다양하다. 일본에는 아예 흰색 티셔츠만 전문으로 파는 매장이 티셔츠 중독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매장의 홈페이지에는 “흰색은 무색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물드는 색이죠. 흰색은 개성이 없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개성을 끌어내는 색이죠. 흰색은 무난하지 않아요. 당신을 속이지 않는 색이죠”라는 소개글을 보면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그 이후 2벌의 티셔츠를 더 구매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재미난 로고가 눈에 띄어서다. 어린시절 주구장창 먹었던 아폴로와 쫀드기, 아폴로 같은 간식을 가슴에 새긴 지구 문방구의 제품들은 이미 MZ세대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다. 레트로 아이템들의 인기 역주행은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지만 이 티셔츠를 입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간 날은 어제보다 어려진(?) 기분마저 들 지경이다.
올 여름 마지막 티셔츠는 여러 장 구매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하니 반응이 정말 좋았다. 로렉스의 고급진 황금빛 로고와 짙은 녹색으로 이뤄진 이 제품은 알파벳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어느 명품 옷 못지 않은 부티가 영혼을 흠뻑 적시는 느낌이다. 명품 시계 브랜드 ‘Rolex’를 ‘RELAX’로 바꿔 파는 판매자에게 존경의 박수를. 따라 산 사람만도 열명이 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