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더컬처]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 1인 9역 다이스퀴스
“저는 웃음이 아픈 사람들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웃음만큼 돈 없이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게 또 있을까요? 사람들이 주위 분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 좋겠어요. 그게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전 코미디가 참 좋아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누군가 그게 원동력이 돼 한 순간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감사해요.”
자타공인 ‘웃음 장인’다운 말이었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A Gentleman‘s Guide to Love and Murder, 10월 20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9명의 다이스퀴스를 연기 중인 정상훈은 “웃음의 핵심은 공감대 형성”이라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아마도 제 강점이 않나 생각도 들어요. 웃음에서 자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게 좀 불편해요. 그냥 흘러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웃음은. 웃으면 ‘장땡’이잖아요. 우리가 쇼츠(Shorts)나 릴스(Reels)를 볼 때 웃기니까 웃고 기분 좋아서 웃는 것처럼요.”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은 지독히도 가난하지만 사랑에도, 세상에도, 삶에도 순수했던 청년 몬티 나바로(김범·손우현·송원근, 이하 시즌합류·가나다 순)가 런던 최고의 귀족 다이스퀴스 가문의 8번째 백작 후계자였음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190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몬티 나바로와 다이스퀴스 가문 후계자들(이규형·정상훈·정문성·안세하), 오매불망 연인 시벨라 홀워드(류인아·허혜진)와 결혼 상대로 적합한 피비 다이스퀴스(김아선·이지수) 등이 펼쳐가는 좌충우돌 블랙코미디다.
2018년 한국 초연 후 2020년, 2021년에 이은 네 번째 시즌으로 이 작품의 백미는 음악, 풍자와 더불어 몬티가 백작이 되기까지 한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빨리(Quick) 죽는(Die) 다이스퀴스 가문 후계자들이다.
◇웃음 안에 담긴 탐욕 “알아주시면 감사하지만 그저 웃음 만으로도 괜찮아요!”“이 극본을 쓸 때 제가 만약 참여했다면 너무 행복했겠다 싶어요. 저는 이런 결이 되게 좋거든요.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어둠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죠.”
최고 권력 집안의 후손임을 알고도 “그저 일자리 하나”를 부탁하는 순박함과 첫사랑 연인 시벨라만을 바라보던 순정의 소유자였던 몬티는 다이스퀴스들이 죽어나갈수록 백작 자리는 물론 두 여자 모두를 가지고자 하며 인간 본연의 탐욕과 욕망을 불태운다.
“인간은 누구나 수직 상승 욕구가 있어요. 누구라도 돈을,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요. 몬티의 행동이 윤리적 잣대로 보면 잘못됐죠.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극의 구조를 너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곤 “이 작품 이후 이야기가 만약 나온다면 (마지막에 등장한 또 다른 다이스퀴스 가문의 숨겨진 후손) 천시가 백작에 오른 몬티랑 일대일로 계속 결투를 벌이지 않았을까 싶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다이스퀴스들이 다 죽어서 딱 둘 뿐이잖아요. 여전히 암투가 벌어지겠죠. 어쩌면 백작인 몬티를 죽인 후에는 가족들끼리 암투를 벌일지도 몰라요.”
내면 깊숙이 누구나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탐욕과 욕망, 이를 건드리면서도 공감대를 끌어내는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은 웃음 자체가 극이 가진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와도 같다.
“한 혈통이라는 걸 이용해 9명을 한 배우가 연기하도록 한 그 뼈대 자체가 기발한 아이디어 같아요. 그런 설정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면 좀 불편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한 사람이 계속 죽잖아요. 하물며 과격할 수도 있는 죽음의 첫 번째는 영상을 이용해 재밌게 풀었어요. 떨어져서 피가 번지는데도 사람들은 신기해 하면서 웃거든요.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정말 극대화한 작품 같아요.”
“그래서 이 작품이, 코미디가 어려운 것 같아요. 웃기는 것만큼 그 안에 페이소스(Pathos)를 담는 게 중요하거든요. 캐릭터에,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인간이 가진 탐욕스러운 부분을 담아뒀어요. 그 웃음 안에 담고자 노력했던 것들을 관객 분들이 알아주시면 너무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그저 웃음으로 끝난다고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4년만의 무대 복귀, 다시 한번 ‘젠틀맨스 가이드!’“재연 때는 코로나가 너무 심해서 관객들을 제대로 만나질 못했어요. 영상화, 띄어 앉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박수도 칠 수 없었고 맘껏 웃을 수도 없었죠. 그 아쉬움이 너무 커서 무조건 이 작품은 다음 시즌에 꼭 해야지 했는데 3연은 드라마 촬영이 겹쳤어요.”
수십년도 전 ‘스팸어랏’에서 호흡을 맞췄던 김재범
· 김대종 배우와 연극 ‘아트’ 무대에 함께 오르고 싶어 직접 발 벗고 나서 백화점 행사 7개를 영업해올 만큼 간절했던 정상훈은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 재연에 이어 4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아쉬움이 깊어진 만큼 “이번엔 무조건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온 그는 “내가 이렇게 무대를 좋아했나 싶은 생각이 다시금 들 정도로 너무 좋다”고 털어놓았다.
“너무 너무 좋아요. 무대는 진짜 솔직하거든요. 연습 양 만큼, 고민한 만큼 그대로 드러나죠. 때로는 과할 때도 있고 예상을 빗나가기도 하지만 제가 고민해서 만들어 놓은 코미디가 검증받는 느낌이랄까요. 캐릭터 변화를 좀 더 주기 위해서 속도를 높이거나 늦추는 등 계산이 딱 맞아 떨어지면 그대로, 안맞아 떨어져도 그것대로 너무 재밌어요. 무대에서 너무 너무 행복해요.”
그리곤 “제일 기분 좋은 소리는 아무 정보 없이 오신 분들이 극을 다 보고서야 놀라시면서 하시는 ‘9명이 다 다른 사람 아냐’라는 말”이라며 “짜릿하다”고 부연했다. ‘김종욱찾기’부터 1인 7역의
‘아이러브유’, 40여개의 역할을 소화한 ‘구텐버그’ 등 웬만한 대학로 작품의 멀티는 다 거친 그는 스스로 의 표현처럼 ‘멀티의 시초’이자 ‘퀵 체인지 스페셜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퀵 체인지 동선을 짜주기도 했어요. 한쪽에서 분장팀이 수염을 떼는 동시에 의상팀이 모자를 씌우고 재킷 소매에 팔을 끼우고 뒤로 제끼면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안경을 쓰고 무대로 들어가요. 나오자마자 10초 안에 인물에 대해 설득을 시켜야 해요. 관객들이 그 인물에 빨리 빠져들어 몰입할 수 있게요. 유야무야 앞뒤 인물이 섞이면 매력도, 완성도도 떨어지거든요.”
“애덜버트가 똑바로 서 있다면 에스퀴스는 한쪽으로 삐딱하고 헨리는 안짱다리로 서서 스누피처럼 손을 꽈요. 목소리도 하이와 로우로 변화를 계속 줘요. 9명 인물 중 확 구분되지 않아서 고민 중인 다이스퀴스가 에스퀴스 2세와 헨리죠.”
그는 “에스퀴스 2세 목소리를 좀 더 느끼하게 하고는 있는데 좀 더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애덜버트는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다보니 목에 무리가 가서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다 나쁘지만 제일 나쁜 다이스퀴스는 레이디 히야신스가 아닌가 싶어요. 나쁜 짓을 해서 혹은 물려받으면서 권력을 가지고 부를 누리는 건 보기에도 나쁘잖아요.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남의 돈을 자기 돈인 양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단속에 걸려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보컬특훈 그리고 전혀 다른 매력의 세 몬티와 다이스퀴스 정문성“다양한 방법으로 죽는데 저는 빨리 죽는 편이에요. 이 작품은 특히나 노래의 힘이 너무 좋거든요. 빨리 죽고 넘버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을 좀 부리고 있죠. 그래서 이번에 돌아오면서는 노래에 진짜 많이 투자를 했어요.”
이를 위해 정상훈은 거미와 조정석 부부에게 보컬특훈(?)을 받는가 하면 성악과 출신의 ‘하데스타운’ ‘영웅’ ‘노트르담 드 파리’ ‘웃는 남자’ ‘명성황후’ ‘레미제라블’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의 뮤지컬 배우 양준모 그리고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 앙상블들에게 묻고 또 물으며 연구를 거듭했다.
“뮤지컬에서 노래는 감정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많이 묻고 배웠어요. 감정을 충분히 담으면서도 목을 보호할 수 있는 창법, 고음을 올리는 노하우, 호흡법 등에 대해 연구를 진짜 많이 했어요.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아요.”
정상훈은 “몬티도, 다이스퀴스도 너무 다양해서 재밌다”며 “연습실부터 무대까지 진짜 열심히들 한다. 묘하게 긴장감도 있고 좀 더 돋보이기 위해 치열하게 연구하면서 상승 효과,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손)우현이는 장난꾸러기에요. 개구지고 되게 열정이 넘치죠. 애가 힘이 좋아요. 우현이가 얼굴 잘생긴 흙수저에서 금수저가 되는 몬티라면 반대로 (김)범이는 진짜 귀족이었는데 자리를 뺏겼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죠. (송)원근이는 워낙 뮤지컬을 오래 해온 배우다 보니 경력직과 경력직이 맞붙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늘 내가 이긴다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죠.”
3연부터 다이스퀴스로 분하고 있는 정문성은 정상훈과 tvN 드라마 ‘빅 포레스트’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다. 그는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였다”고 떠올렸다.
“코미디도 어떻게 그렇게 잘하고 딕션도 맛깔 나는지…딱 헨리 같아요. 헨리에서 파생된 문성이를 정말 사랑하거든요. 팔색조 같아요. 무슨 연기든 그렇게 잘해요.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유연성도, 호흡도 되게 좋죠.”
◇그저 열심히 할 뿐 “행복이 퍼져나가길 바라요”“관객들의 취향은 정말 다양해요. 관객 모두를 설득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에요. 반만 설득해도 대단한 거죠. 다만 그건 분명해요. 열심히 하면 무조건 설득이 된다는 사실이죠.”
이어 정상훈은 “배우가 열심히 하면서 에너지를 주려고 애쓰면 관객들을 감복하게 만든다”며 “나태해지지 않고 요령 피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거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게 당연한 제 일이기도 하죠.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을 보고 많은 분들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행복함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랍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