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사가 학교 복도를 지나던 중이었다. 저만치에 늘 문제의 중심에 있던 아이가 다른 아이를 뒤쫓아가 가방을 던져 맞추더니 다가가 때리기까지 했다.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두 아이를 불러다 화해를 시키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부딪힌 거라고 발뺌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봤다”며 사과할 것을 요구했지만 맞은 아이가 그 사과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서다. 상대방이 사과해도 진심이 아닐 것이 자명하고 신뢰가 없는 아이의 사과를 받고 화해를 하는 건 더욱 하고 싶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 거부였다.
친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단호한 결심과 판단이 의아했는데 살펴보니 그럴 법도 했다. 그를 때린 아동은 친한 친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학교 안에서 거칠 것 없이 행동했다. 친구들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자기 행동을 지적당하면 뉘우치거나 사과하기는커녕 이를 부인하거나 교사의 지시까지 대놓고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린아이라도 상대의 진심을 가름할 요량은 갖췄을 수 있고 사과받고 싶지 않은 거부의 권리, 화해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은 수용돼야 한다.
화해가 완벽한 문제의 결말인 듯 갈등 해결을 종용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화해가 강요된다면 그건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아직 어리다고 함부로 그 마음을 재단하거나 지시해선 안 된다. 헤아리는 게 우선이다. 상대를 위한다는 이유로 화해가 강요된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이는 종종 부모들이 자녀들을 상대로 수없이 저지르는 무의식적 ‘만행’이기도 하다.
다행히 교사는 금방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맞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 폭력이라는 문제 상황을 서둘러 종결하려 했던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좋은 게 좋다지만 정말 그럴까. 내게 좋다고 너에게도 좋다는 확신은 지나친 자기 중심성에서 기인한다. 너와 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서로의 위치와 입장이 제각각이고 사람의 마음도 한둘이 아닌 데다 시시각각 움직이는데 말이다.
추석 명절을 앞둔 딩크족 내외는 8년째 자녀출산을 요구하는 부모를 또 어떻게 봬야 할지 고민이 컸다. 아무리 설명해도 명절마다 반복되는 은근한 언급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조모와 함께 사는 30대 싱글 직장인은 명절이면 조모를 보러 집에 몰려오는 친척들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한가위를 보내는 패턴이 됐다. 안부를 묻는다는 명목 하에 결혼 얘기를 밥상머리에 얹는가 하면 다 큰 조카들 용돈으로 목돈을 뜯겨야 하는 게 싫어서 찾게 된 궁여지책이다.
아무리 일리 있고 바람직한 방향의 이야기라도 전달방식이 ‘강요’라면 불편하기 마련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혹은 다양한 신념의 소유자에게 사회적 통념이나 올바름, 유익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압력과 간섭은 적절하지 않다. 자기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는 본인의 때에 본인의 속도와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무엇이 옳다고 또 이래야 한다고 가르치고 명령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고 책임지며 드러내는 일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저마다의 방식이 온전히 수용돼야 한다. 자신과 다른 상대의 마음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경청하고 헤아리는 만큼 포근한 세상에 좀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안미경 예담심리상담센터 대표·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