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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서포루 발아래 바닷가 마을… 굽이굽이 소설이 됐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②통영

입력 2021-04-13 07:00 | 신문게재 2021-04-1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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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통영 - 박경리기념관
박경리기념관 앞 박경리 동상. 그가 평소 존경했던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남민)

 

◇ ‘토지’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토지’를 쓴 국민작가 박경리(1926~2008)의 고향은 통영이다. 박경리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직후 결혼해 1948년 인천의 금곡동으로 이사했다. 인천에서의 2년 동안 그는 1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대작 ‘토지’의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25살의 젊은 박경리는 ‘살기 위해’ 어린 딸 아들을 안고 통영으로 내려온다. 항남동 오거리에서 수예점을 운영하며 입에 풀칠을 하던 그는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과 고향에서의 아픈 추억으로 다시 고향을 떠나게 된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8살 아들까지 먼저 보내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김동리’라는 멘토가 생겼다. 그의 추천으로 이름까지 ‘박금이’에서 ‘박경리’로 바꾸고 문학의 세계에 들어선다. 통영에서 일어난 파란만장한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김약국의 딸들’이 1962년에 세상에 나왔고 이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어 그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가 나오면서 작은 어촌도시 통영이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그에게 통한의 아픔을 준 고향이었지만, 운명적으로 박경리 문학의 주춧돌이 된 곳 역시 통영이었다. 오랜 문화와 예술을 전승해온 통영은 문화예술의 도시였다.

통영 시내에서 박경리 문학의 향기를 좇아가려면 세병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임진왜란 직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으로, 그 중심 건물인 객사가 세병관이다. ‘통영’의 지명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따왔으니 호국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세병관은 일제 치하에서 박경리 선생이 초등학교로 사용했던 건물로 국보(제305호)다. 50년 만에 통영을 찾은 그는 이 기둥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진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전경. 임진왜란 직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사진= 남민)

 

세병관 앞 마을이 박경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간창골’이다. 원래 관청이 많이 있던 곳이라 하여 ‘관청골’이라 불리던 것을 사투리로 이렇게 부른다. 이곳에서 우불꾸불 골목길을 따라 오르거나 밖으로 나와 차도 옆 인도를 걸어 오르면 서문까꾸막(‘가파르다’는 뜻)이라고 부르는 ‘서문고개’가 나온다. ‘김약국의 딸들’ 주무대다. 간창골부터 서문고개까지 어느새 박경리의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박경리 선생 생가 터는 서문고개 정상에서 서포루 가는 좁은 골목길 안에 있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고 집도 바뀌었지만 담 벽에 ‘박경리 선생 생가 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 길 오른쪽 언덕 아래는 명정동으로 역시 소설 속 무대가 됐던 공간들이다. 근처 서포루에 올라 바라보면 세병관과 간창골, 서문고개, 박경리 생가, 명정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는 통영항 전경이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원주에서 생활하다 통영으로 이주하려 집터까지 보고 올라갔는데 이듬해인 2008년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살려던 집터는 결국 유택이 되어 버렸다.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던 그는 한산대첩의 현장인 바로 그 바다를 바라보는 미륵도에 잠들어 있다. 그 곳 ‘박경리기념관’에서는 생계를 잇던 재봉틀, 대작의 벗이 되어 준 손때 묻은 사전, 육필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자 현대문학의 큰 획을 그은 작가의 모습을 동시에 느껴볼 수 있다.

기념관에는 아담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높이 135cm의 아주 작은 동상이다. 평소 선생의 철학처럼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토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에 아직도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아쉬워한다. ‘토지’에 담긴 감성적인 개념을 ‘land’로 번역해선 서양인들에게 도저히 설명이 안 되니, 한국인 고유 정서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달동네서 관광마을로 변신한 ‘동피랑’

 

사진 통영- 동피랑벽화마을
동피랑은 벽화마을로 유명하다. ‘동쪽 벼량’이라는 뜻의 동피랑은 한 때 빈민촌의 상징이었다. (사진= 남민)

 

한때 통영에서는 ‘동피랑에 산다’는 말은 금기어였다. 시적인 어감을 주는 이름과는 달리 동피랑이라는 단어는 엄혹한 가난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통영 사람들은 벼랑(절벽)을 편한 발음으로 ‘피랑’이라고 부른다. 동피랑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다. 통영에는 ‘서피랑’도 있다. 정량동과 중앙동에 걸쳐있는 동피랑 마을을 옛날에는 ‘꼭대기’란 뜻으로 ‘먼당’이라고도 불렀다. 나이든 주민은 지금도 이렇게 부른다.

일제 강점기가 본격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은 교통과 생활이 편리한 항남동을 독차지해 부잣동네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주변 주민들은 모두 산비탈로 떠밀려 가야 했다. 통영항과 중앙시장에서 막노동하던 외지인들과 주변 빈민들이 가파른 산비탈의 초라한 움집으로 하나둘씩 모였다. 그렇게 모여 산 곳이 이곳이다. 강풍이라도 몰아치면 온 마을 지붕이 모두 날아갔기에, 이곳에 살았던 노년층은 지금도 태풍 생각만 하면 치를 떤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곳은 이제 관광마을로 탈바꿈했다. 쓰러져 가는 집들로 철거 대상 위기를 맞았던 2007년 10월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이 철거에 반대하며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이듬해 전국에서 미대생 등이 몰려와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은 일약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 ‘빈민촌’의 대명사에서 이제는 ‘벽화마을’로 누구나 와보고 싶어하는 동네가 됐다. 전국 여러 곳에 벽화마을이 있지만 동피랑 벽화마을은 유난히 인기를 끈다. 그림의 양이 풍부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그림이 많은 데다 2년마다 그림을 바꿔 그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상에 오르면 강구안을 비롯해 사방이 확 트인 전망을 볼 수 있어 여행객이 몰린다. 부작용도 있다. 외지 젊은이들이 들어와 사업으로 돈벌이가 되니 형제까지 불러 ‘사업확장’을 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원주민들의 터전이 ‘자본’에 다시 밀려나는 모양새다.

 

사진 통영-케이블카와 통영시가지
해발 461m의 미륵산은 케이블카 여행지로 큰 인기다. 아름다운 통영항과 남해 수많은 섬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진=남민

 

◇ 함께 둘러보면 좋을 통영의 명소

 

▲충렬사 = 통영은 명실상부 ‘이순신의 도시’다. 충렬사는 세계적인 해전인 한산도대첩을 비롯해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606년에 지은 국가 사당이다. 후대에 동재와 서재를 짓고 묘비를 세웠다. 정조는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어제제문을 하사하는 등 유서 깊은 사당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 춘추향사,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탄신기념제가 열린다.

 

▲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와 루지 = 통영항 앞바다에 떠있는 해발 461m의 미륵산에는 케이블카로 여행할 수 있다.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통영항은 물론 산 정상에서 쪽빛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수많은 섬들을 조망하는 경치가 빼어나다. 전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케이블카 명소다. 맑은 날에는 쓰시마까지 볼 수 있다. 케이블카 아래로는 루지로 스릴감 넘치는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 통영운하 야경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쫓긴 왜군이 수없이 수장된 곳이다. 판데목, 송장목으로도 불렸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운하를 확장 개통했다. 지금은 통영대교가 놓여 해질 무렵 저녁놀과 함께 비춰지는 오색등이 황홀한 야경을 선사한다. ‘동양의 나폴리’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이곳은 통영대교와 운하의 뱃길, 그리고 해저터널이 있어 국내 유일 3중 교통로를 갖고 있다.

 

▲ 소매물도 =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지상낙원으로 불러도 좋을 섬이다. 하루에 두 번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건너편 등대섬까지 가볼 수 있는 데다 수려한 경치를 선사한다. 두 섬을 연결하는 바닷길에는 ‘몽돌’이 유명하다. 옛날 김해김씨가 들어가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에 1800년대 후반 소매물도에 입촌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남매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담긴 남매바위 등 곳곳의 기암괴석도 절경이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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