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이민화 평전 - 가자, 길이 보이지 않아도> 이호준

입력 2022-06-13 09:00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
  • 밴드
  • 프린트
zzzz
고 이민화는 ‘벤처’라는 말조차 낯설던 1985년에 의료기업체 메디슨을 창업한 이후 평생을 벤처 생태계 육성에 힘 쏟았다. 1995년 설립된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아 이듬해 코스닥 설립을 주도하고 1997년에는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을 통해 벤처의 양대 인프라를 구축했다. 2009년에는 ‘기업호민관’으로 취임해 중소기업 규제 철폐에 앞장섰다. 그는 “왜 우리는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이 없을까”라는 화두로 평생을 살았다. 규제 철폐와 디지털 인프라 구축, 그리고 미래인재 육성이 그의 필생의 과제였다.



* 독서를 좋아했던 소년 - 이민화는 군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이사 다녔다. 그 탓에 친구가 없었는지 유치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일기와 독후감을 썼다. 이런 습관은 그를 다작가로 만드는 뿌리가 된다. 아버지 이수영은 육군 대령 예편 후 국방과학연구소 창설에 참여하며 국방기술 향상에 이바지한 사람이다. 이민화는 ‘원칙에 충실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세상에 베푸는 가르침이 되라’는 아버지 말씀을 평생 나침반으로 삼았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학력경시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공부 잘하고 싹수 있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 최초의 좌절과 잇단 기행 - 경기중 입학이 당연시됐던 이민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낙방을 하고 후기 중앙중에 입학한다. 그리곤 곧 사고를 친다. 중 1 때 고교입학 검정고시를 쳐 수석합격을 해 버린다. 학교와 부모가 간신히 설득해 계속 학교를 다녔지만, 이번에는 중앙중을 수석졸업하고도 경기고에 진학 않고 중앙고를 지원한다. 본인은 나중에 “민족학교라 불리는 중앙고의 창립이념이 좋아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 3 때 또 사고를 친다. 대입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를 해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다. 문·이과를 섭렵한 독특한 경력은 나중에 그에게 큰 자산이 된다.

* 대한전선에서의 첫 사업경험 - KAIST 졸업 후 첫 직장인 대한전선 중앙연구소에서 이민화하는 ‘도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고, 실패를 지원 않는 조직에서는 도전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그는 컴퓨터 단말기의 개발부터 수출까지 전 과정을 주관하면서 대형 컴퓨터용 스마트 단말기를 고수익의 한국 최고가 수출 전자제품으로 끌어올리는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실패가 성공으로 가는 학습과정이며, 실패에 대한 지원이 혁신의 근간임을 절감한다. 결과적으로 대한전선은 그가 사업가로 도약할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 주었다.

* 태생적 도전중독자 - 이민화는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과감히 뛰어들었다. 한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내려 했다. 지인들은 이민화가 ‘워크홀릭’이었다고 한결 같이 말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좀 더 많이 연구하는 습관이 평생의 습성이 된 덕분에 그는 남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것을 현실로 실현시켰다. 아내 이사랑은 “남편이 카드를 지갑 안에 넣고 다닐 필요 없이 핸드폰에 기능이 탑재될 시대가 올 것이라고 2000년 초에 이미 말했다”고 증언한다.

* 멋모르고 창업한 메디슨 - 박사과정 때 지도교수 박송배를 만나면서 그는 ‘산업과 연계된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박 교수가 초음파진단기 개발을 국제 프로젝트로 따 온 것이 의료기와 첫 인연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85년 탁월한 성능의 제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후원기업이 사업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여러 대기업에 개발을 제안했다가 퇴짜만 맞았다. 결국 1985년 7월에 이민화와 팀원들이 창업을 결심한다. 아파트를 담보 잡아 창업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후 일본이 장악했던 산부인과 초음파 시장을 장악함으로써 메디슨은 삼성GE까지 누르고 국내 시장 1위에 오른다.

* 세계시장에 도전하다 - 메디슨은 ‘Gold Quaility, Silver Price, Royal Service’ 전략으로 고품질 제품을 20~30% 싸게 팔고 신속한 기술서비스로 돌파했다. 소형 초음파기기 SA88와 SA1500·SA600 등으로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항공 마일리지가 250만 마일이 넘도록 발 품을 팔아 70개국에 대리점을 확보했다. 2000년에 메디슨은 한국 의료기 수출의 70% 이상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초음파 회사 크레츠 테크닉을 인수해 세계 첫 실용가능한 3차원 초음파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의료기 메이저리그에 입성한다. 배 속 아이의 하품하는 모습에 부모들은 환호했다. 기형아도 미리 알 수 있어 고가에 팔려나갔다.

* 돈벼락, 하지만 날개 없는 추락 - 1998년에 메디슨은 경상이익 720억의 최대 실적을 올린다. 하지만 영업이익은 150억 원이고 대부분이 사내외 벤처기업의 평가이익과 처분이익이었다. 돈벼락을 맞은 듯 했지만 ‘착시’였다. 당시 메디슨의 부채는 2000억 정도였다. 보유 유가증권 평가액이 1조 5000억 원에 달했던 이 때가 부채 청산의 적기였다. 하지만 이민화는 “코스닥을 탄생시킨 사람이 코스닥에 충격을 주는 대규모 매각은 할 수 없다”며 한컴 등 보유주식 매각을 거부했다. 눈 앞의 이익보다 사회적 가치를 지킨 것이다. 곧 IT 버블 붕괴가 시작됐고 메디슨은 44억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처리된다.

* 이민화가 남긴 ‘메디슨 문화’ - 메디슨 문화는 한 마디로 ‘혁신의 문화’였다. 메디슨의 기업 이념은 ‘기술에 의한 세계 도전’이었다. 첫 실패는 용인되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혁신’이었다. 혁신 성과를 내기 위한 목표관리도 중시했다. 상하 합의로 늘 120% 목표 설정을 원칙 삼았다. 다른 기업들보다 10년 앞서 360도 다면 평가도 시행했다. 개인 차원의 목표관리는 임직원들에게 기업가정신을 심어주었다. 300명 남짓 직원 중 100명의 기업가가 배출됐다. 메디슨 출신 기업인들의 모임이 ‘메디슨 OB’다. 이민화는 이를 ‘메디슨 마피아’라 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초생명기업’이라고 명명했다.

* 벤처기업협회 닻을 올리다 - 성공한 벤처기업가 13명의 CEO가 1년 동안 저녁에 모여 밤 늦게까지 기업 운영 환경과 제도 개선 방안 등을 얘기하다 ‘벤처 생태계 구축’에 의기투합한다. 대부분 KAIST 출신이었기에 KAIST 기업인동우회, 줄여서 ‘과기회’로 불렀다. 이민화와 터보테크의 장흥순, 비트컴퓨터 조현정, 휴맥스 변대규 등이 주축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민화가 회장을 맡아 1995년 12월 2일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벤처 비전 2005’를 발표하고 자금문제 해결을 위한 코스닥 설립과 기술보증제도 도입, 인력유치를 위한 실험실 창업 허용, 주식옵션제 등을 추진할 것을 밝혔다.

* 벤처기업의 젖줄 ‘코스닥’ - 당시 벤처업계 최대 애로는 자금조달이었다. 굴뚝산업 중심의 증권거래소는 상장요건이 까다로웠다. 벤처는 연구개발비와 자본이 충분치 못해 상장할 수 없었고, 성장지표가 없어 상장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협회는 1996년 정부에 벤처 활성화를 위한 코스닥 설립을 공식 제안했고 7월에 코스닥이 설립된다. 이민화는 한글과컴퓨터 휴맥스 비트컴퓨터 등 당시 대표 벤처기업들을 강제로 등록시켜 시장 활성화를 도모했다. 일부 과열현상을 보이고 기업 사냥꾼이 등장하는 등 초기 부작용도 있었지만, 이런 선도적인 벤처 선배들 덕분에 후발 벤처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 벤치기업특별법을 만들다 - 창업 벤처 육성을 위해선 벤처만의 기술과 인력을 위한 지원 등 벤처 압축성장을 위한 지원 법률이 필요했다. 1997년 3당 전격 합의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덕분에 공무원들이 벤처기업을 보는 인식도 달라졌다. 정부 조직에도 영향을 미쳐 중소기업청이 벤처기업부로 승격됐다. ‘벤처’의 정의도 ‘연구개발 중심형 중소기업’으로 확정했다. 당시 벤처인증기관 선정을 놓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는데, 협회는 인증기관이 되면 권력기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별도 인증기관을 두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특별법은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도 수출된다.

* 벤처창업 로드쇼와 섬머스쿨 - 1996년 하반기에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을 순회하며 창업을 촉진하는 ‘벤처창업 로드쇼’를 펼쳤다. ‘한국의 빌 게이츠여 모여라’가 캐피 프레이즈였다. 2005년까지 벤처기업 4만 개를 만들 것이란 ‘벤처 비전 2005’의 일환이었다. 로드쇼는 대학가 벤처 붐의 계기가 된다. 1997년부터는 ‘섬머 스쿨’을 만들어 벤처 경영인 가족들에게 휴가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워크 홀릭인 벤처경영인들에게 이 여름 휴가에도 가족은 뒷전이었다. 당시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벤처기업인들은 주당 평균 100시간, 일요일을 제외하면 하루 17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 고사 직전 아래아한글을 살리다 - 1998년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에 2000만 달러에 매각된다. 그런데 매각 조건에 아래아한글 개발 중지 조항이 들어있었다. 벤처기업협회는 한컴 매각이 1조 원 넘는 국부 손실이라고 판단하고, 곧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에 돌입했다. 외환위기 때라 투자유치가 시급했기에 국정원까지 “허가 없는 모금운동은 불법”이라며 발목을 잡았다. ‘100억원 투자 국민추진운동’을 시작했지만 모금액은 7억이 전부였다. 황철주와 조현정의 도움으로 15억까지 만들었으나 턱도 없었다. 이민화는 메디슨 이사회를 소집해 50억 투자를 결정한다. 이후 ‘빌려 쓰는 소프트웨어’ 운동이 성공해 한컴 매출이 크게 늘면서 아래아한글 살리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민화의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MS의 워드프로세서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 인터넷 활성화 이끈 ‘인터넷 코리아’ 운동 - 인터넷 코리아 운동은 한국의 인터넷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넥슨 네이버 다음 옥션 등이 그 덕택에 성장했다. 이민화는 ‘10만 웹마스터 양성 운동’부터 전개했다. 30만 명의 대졸 미취업자 중 10만 명을 양성하자는 복안이었다. 한국 전체에 초고속 인터넷을 깔아 새로운 시장 창출을 모색했다. 1000만 인터넷ID 갖기 운동과 인터넷IP 육성 캠페인, 전자상거래 대상 제도 등 인터넷 대중화를 위한 다각적인 사업에 정부지원도 끌어들였다. 정부가 빠르게 인터넷망을 깐 덕분에 인터넷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저자는 “우리의 행운은 코스닥과 벤처기업특별법이라는 두 가지 벤처 육성 인프라가 준비된 후 외환위기를 맞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 버블 붕괴와 벤처협회 회장직 사임 - 2000년 초만 해도 1조가 넘던 벤처기업들 가치가 그 해 말에 1000억 원 이하로 폭락했다. 기업사냥꾼 진승현·이용호 게이트까지 터져 ‘반 벤처’ 정서가 폭발했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민화가 총대를 메고 2000년 2월 벤처기업협회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회장 취임 후 4년 3개월 만이었다. 그는 이임사에서 “벤처기업협회가 한국의 산업정책을 완전히 바꿨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한국이 벤처대국으로서 21세기를 이끌고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통산업의 구조조정은 결국 기술개발에 의해 이뤄질 것이라며 기술 도입에 더욱 적극적일 것을 당부했다.

* 개방혁신에 도전한 기술거래소 - 이민화는 벤처 육성의 해법으로 인수합병과 기술거래를 꼽았다. 이것이 기술벤처와 전통 제조업의 동반출구라 생각했다. 특히 M&A로 대기업은 혁신적 기술을, 벤처는 글로벌 시장을, 엔젤투자자는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며 기술거래소 활성화에 앞장 섰다. 특허거래가 미래 산업경쟁력의 핵심이라 판단하고, 정부와 의기투합해 2000년 3월에 기술거래소를 설립한다. 이민화는 2006년 7월부터 2009년 4월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협회 회원사에서 78억 원을 확보해 민관 체제로 구축했다. 하지만 정부출자기관이라는 한계 탓에 결국 2009년 한국산업기술진흥원으로 재편된다.

* ‘단호한 쌈닭’ 이민화 -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이민화는 존경받는 교육자이기도 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이기도 하다. 시대를 앞서 간 개척자이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거친 실패자이기도 하다. 고집불통인가 하면 유연한 협상가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단호한 쌈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민화의 손위 처남인 이재성은 “그는 늘 갑옷을 입고 다니는 장수 같았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든 상대가 누구였든 논쟁을 피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선 양보가 없었다. 관료들도 그를 막지 못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데 가장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 실험실 창업운동(Lab Venture) - 이민화는 창업 저해 요소들로 사무실 구하기, 실험설비 갖추기, 사람 구하기, 다니던 직장 그만두기 등을 꼽았다. 전국 1만 곳 연구실에서 21세기 벤처대국이 가능할 것이란 계산을 했다. 마침 김대중 대통령이 만든 규제개혁위원회에 그도 위원으로 참여 중이었다. 교수와 연구원, 학생들이 바로 창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중소기업청과 협력해 10개 이상의 각종 규제 철폐가 이뤄졌다. 전국 수십 곳 대학과 연구소를 찾아 다니며 실험실 창업운동을 설파했다. 1년에 5000개 벤처 창업이 목표였다. 대학들은 “신성한 상아탑에서 웬 장사꾼이냐”는 식이었지만 그의 수고 덕분에 300여 개 대학의 창업교육센터에서 5000개 이상의 기업이 배출되었다.

* ‘기업호민관’ 이민화 - ‘기업호민관’은 중소기업의 불합리한 규제를 발굴해 상시적·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독립기관이었다. 이민화는 가장 먼저 공인인증서 문제 해결을 목표로 잡았다. 벤처 혁신을 가로막는 엑티브X 독점을 타파해 2020년 6월 자율적으로 다양한 인증 기술을 채택할 수 있도록 했다. 30만 원 미만 소액결제는 스마트폰으로 즉시 가능하도록 했다. 다음은 보복 금지 정책과 연대보증 문제 해결이었다.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형성되려면 꼭 필요한 제도였다. 연대보증 문제는 연대보증인에 대한 채권 회수 유보로 해결했다. 마지막은 대·중소기업 공정거래였다. 기술탈취예시제, 가격인하 입증 책임제, 단체신고제, 원가계산서 신고제, 현장 강제 실시 제한, 기술임치제도 활성화 등이 그 결과물이다.

* 디지털 병원의 꿈 - 디지털병원은 병원의 모든 운영시스템과 의료전달체계를 컴퓨터화하고 병원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개념이다. IT융합형이다. 세계 병원 시장 수요는 3000억 달러가 넘는데 절대강자는 없다고 본 그는 디지털병원이 의료산업의 블루오션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일부 종합상사의 끼어 들기에 결국 저수익 사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민화는 2008년에 전자산업진흥회와 함께 다시 디지털병원 전략을 되살려낸다. 2010년에는 수출조합까지 공식 출범시켜 초대 이사장을 맡는다. 2021년에는 의료기기 전문기업 메디아나가 조합의 사업을 이어받아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펼치고 있다.

* 너무 앞서간 ‘유헬스케어(u-healthcare)’ - 유헬스케어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뜻)와 헬스케어(healthcare)의 줄임말로, 요즘의 원격의료와 유사한 개념이다. 언제 어디서든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이민화는 이 분야에서만은 한국이 IT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디지털병원과 시너지를 이루면 미래 의료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의료보험 등 제도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은 시기였다. 기득권의 반대도 있었다. 의사보다 통신사업자가 돈을 더 많이 벌기 때문이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간 구상이었다.

* ‘KAIST 2.0’을 주창하다 - 이민화는 2009년 7월에 KAIST 초빙교수로 임용된다. 벤처와 기업가정신, 실전 창업지도 벤처 2.0 등을 강의했다. 프로젝트 기반의 수업 덕분에 그의 학생 가운데 상당 수가 스타트업 현장에서 두각을 보인다. 그러다 KAIST 안에 산업계와 호흡을 같이 하는 교수가 거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KAIST 2.0’ 계획을 학교 측에 제시했으나 거부당한다. 그는 KAIST가 한국의 이공계 중심 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문과 창업의 선순환을 통해 세계적인 이공계 대학, 열린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스마트 캠퍼스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 영재기업인 육성을 위한 꿈 - 이민화는 2009년에 당시 KAIST 이광형 교무처장(현 총장), 고정식 특허청장과 함께 특허 기반의 혁신형 영재기업인 과정 개설을 추진한다. 2009년 8월 기획에 착수해 곧바로 9월에 영재기업인 교육원을 열었다. 특허를 비롯해 트리즈(창의적 문제해결 이론), 인문학 등을 기본으로 미래학과 지식재산, 기업가정신 등을 가르치며 미래 지향적 균형 인재를 키우려 했다. 2009년 12월에 5대 1 경쟁률 속에 101명을 모집한 후 2021년까지 12기가 진행되었다. 이민화는 ‘협력하는 괴짜’를 선발해 가르치고 싶어했다. 2019년 10주년 행사 준비에도 열심 이었다. 특허청장은 그에게 감사패를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행사 바로 일주일 전에 유명을 달리한다.

* 필생의 꿈 ‘창조경제연구회’ - 이민화의 인생 후반기를 상징하는 프로젝트가 2009년 발족한 창조경제연구회(KCERN)였다. 정부에 직접 정책을 제안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구글 같은 기업이 못 나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규제 때문이라고 봤다. 그리고 벤처와 대기업이 서로 다른 역할 속에서 협력하는 것이 창조경제라고 파악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가져가 썼지만 그는 “반찬은 많은 데 손 가는 것은 없다”며 비판했다. 그가 세운 미션은 ‘국가혁신’이었다. 혁신과 창조성을 기반으로 10년 내 진행되지 않으면 나라가 힘들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창조경제연구회는 창업자 연대보증제 폐지를 시작으로 크라우딩펀딩 구축과 공인인증서 폐지를 이끌어 냈다. 기술금융 전략, M&A 활성화, 핀테크 규제 해소 등 주요 국가혁신 정책에 기여했고 디지털 헬스케어 전략 등 국가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 이민화의 4차 산업혁명 - 이민화는 ‘4차 산업혁명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융합을 만드는 세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한국은 세계 최악의 규제 국가”라며 규제철폐를 특히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의 진화된 모델이 공유경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모 모빌리언스(Homo Mobiliance)’라는 말도 만들어 냈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모바일 정보가 생활화된 현대인’을 뜻했다. 스마트 산업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전제로 지속가능한 ‘스마트 시티’를 역설하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의 실증은 스마트시티에서 구현된다고 했다. 스마트 산업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스마트 시민이 행복을 추구하고, 스마트 행정이 예측과 맞춤의 공공인프라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이 기사에 댓글달기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
  • 밴드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

카카오게임즈

청심플란트치과

신천지예수교회

안양시청

거창군청

수원문화재단

용인시의회

안동시청

한국도로공사광주전남본부

구리시의회

한국언론진흥재단

영암군청

목포시청

삼성생명

영양군청

세종특별자치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