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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아무나 볼 수 없는 책> 장유승

입력 2022-07-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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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을 소개한 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인 귀중본 책자들을 소상히 소개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귀중자료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조선조 효종 이전(1659)이나 중국 명조(1644년) 이전, 일본 경장(1614년) 이전의 고사본(古寫本)이나 고간본(古刊本), 국내 유일본 또는 왕이나 유명학자의 자필서명이나 장서인이 있는 자료 등등. 가끔 무심코 서점에서 집어 들었는데 뜻하지 않게 보물 같은 책을 발견하곤 한다. 이 책이 그랬다.


* 한국 목판인쇄술의 진수 ‘팔만대장경’ - 고려는 두 차례 대장경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거란의 침략이 한창이던 1011년부터 18년 동안 만들었다. 처음 새긴 대장경이라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아쉽게도 1232년 몽고 침입 때 불타버렸다. 이후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 침입을 막아내겠다며 1236년 다시 제작에 착수해 15년 만에 완성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8만 장이 넘는 경판으로 구성되어 이렇게 이름지었다. 크기는 가로 70cm, 새로 24cm, 두께 4cm 정도다. 위로 쌓으면 높이가 3259m에 이른다. 팔만대장경은 목판으로 인쇄했기에 어마아마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활자 인쇄와 달리 목판인쇄는 단일 품종 대량 생산에 적합했다. 실제 볼 사람이 많지 않았음에도 목판으로 팔만대장경을 인쇄한 것은 그 만큼 책 인쇄 자체보다 판목의 가치를 중시했고 특히 판목의 영험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 조선의 스테디셀러 ‘포은집’ - 정몽주는 비록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살해당했지만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극진한 존숭을 받았던 인물이다. 왕들도 각별히 챙겼다. 문무를 겸비했던 그는 특히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 즉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숭상받았다. 죽고 한 세기가 지나선 공자를 모신 사당 ‘문묘’에 조선왕조에선 첫 번째로 배향되었을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포은집>은 정몽주의 문집이다. 1409년 아들 정종성이 처음 간행한 이후 1903년까지 총 14회, 평균 35년에 한 번 꼴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최다 간행 문집이다. 무엇보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후손들이 국가의 배려 속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치다보니 간행 여건도 상대적으로 좋았던 덕분이다. 판목의 수명이 양호했던 점도 꾸준히 책이 발간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 제작은 활자, 보급은 목판 - 조선은 다양한 활자를 주조했다. 보급이 필요한 책이 있다면, 일단 활자로 소량 만들고 지방 관청으로 내려보내 목판으로 다시 판각케 했다. 문집 간행을 맡은 간역소에서 문집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자,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었는지를 자세히 소개한 ‘간역소일기’를 기록했는데, 의외로 간행 부수를 밝힌 기록이 거의 없다. 목판본 문집의 간행부수가 40~50부에 불과했다. 당시 문집은 비매품이라 거의 대부부 친지와 문인,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판목은 장판각을 지어 고이 모셔두었다. 판목 새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에 너무 많이 찍어 판목이 손상되면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서적 편찬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조도 153종, 3991권의 편찬 책 가운데 많은 부수를 찍은 것은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한 ‘명의록’ 정도였다. 유일한 예외가 ‘삼강행실도’였다.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중종 때 2409질이나 찍었다고 한다.

* 조선조 관보 ‘조보(朝報)’와 ‘난여(爛餘)’ - 조선시대 관보를 ‘조보’라 했다. 국왕의 명령과 신하의 보고, 조정회의 결정 사항 등이 실어 승정원에서 매일 만들었다. 수요가 많았지만 국가기밀 누설 우려 등의 우려에 인쇄가 불허되었다. 저자는 조보가 활자로 인쇄되었다면 조선의 출판문화가 한 단계 도약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난여’는 청풍김씨 병문가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가 만든 책으로 26권으로 되어 있다. 노론의 세도가로 평생을 당쟁의 와중에 보낸 그의 인생역정 산물이다. 어전에서 벌어진 신하들의 논쟁이 실록보다 매우 자세하다. 신임사화 같은 사화의 책임이 자신들이 아닌 소론에 있음을 알리는데 주력했다는 한계는 있으나 국가기록물에 버금가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 강점기 때 반출되었다가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 5월 28일 국내로 반환되었다.

* 사랑의 역사 ‘정사유락초(情史類略抄)’ - 중국 소주 출심의 명나라 사람 풍몽룡이 지은 ‘정사유략’은 이른바 사랑 백과사전이다. 당시 소주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검열도 없어 소설과 희곡 등이 인기였다. 스타 작가였던 풍몽룡은 각종 문헌의 사랑 이야기를 한 데 모아 24개 항목에 882개 사랑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정사유략초’는 이를 10분의 1 분량으로 요약한 책이다. 공자에게도 첩이 있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담은 ‘정아류’, 통념을 벗어난 동성애 사랑을 다룬 ‘정외류’, 일편단심 사랑 이야기를 모은 ‘정정류’, 한 눈에 빠진 사랑 이야기를 담은 ‘정사류’,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한 여인들 이야기 ‘정협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 이야기 ‘정령류’, 그리고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정감류’와 불륜을 다룬 ‘정예류’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 가운데 올바른 사랑 ‘정정류’를 가장 이상적인 사랑으로 여겼다.

* 과거시험 합격자 동기록 ‘사마방목(司馬榜目)’ -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행정직을 뽑는 문과, 장교를 뽑는 무과, 기술직을 뽑는 잡과 등 세 종류였다. 가장 인기였던 문과에 응시하려면 생원 또는 진사 자격을 취득하는 생원시와 지사시를 먼저 치러야 했다. 생원은 사서오경을 줄줄 외우고, 진사는 글짓기를 잘 해야 했다. 둘을 합쳐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 했다. 조선조 동안 230회의 사마시가 치러졌는데 1차 시험 초시(初試)는 각 지방에서, 2차 복시(覆試)는 서울에서 시행됐다. 1차 합격자는 도별로 지역할당이 이뤄졌다. 최종적으로 과거에 합격해야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생원과 진사만 되어도 지역사회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이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사마방목’이라고 했다. 일종의 동기수첩이다. 당시 사마시 동기들은 장원을 중심으로 결속을 다졌다. 장원을 지극적성으로 공경해 나란히 걷지도 않았다. 사마시 동기들은 나중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해서도 여전히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장원은 관직에 혹 등용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동기회장 노릇을 했을 정도로 존중받았다. 기수로 서열을 따지는 개념도 당시엔 없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 공신(功臣) 책봉 - ‘공신녹권(功臣錄券)’은 공신과 그 후손들의 특권을 입증하는 증명서였다. 고려시대부터 공신을 책봉하고 공신녹권을 지급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공신녹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55년 단종 폐위 후 세조를 추대한 공신들에게 지급한 ’좌익원종공신녹권‘이다. 조선의 공신은 배향(配享)공신과 훈봉(勳封)공신으로 나뉘었다. 왕이 죽으면 재위 기간 중 가장 공이 컸던 신하에게 배향공신을 주었다. 국왕 1인당 서너 명에 불과했다. 특정 사안에 공이 큰 신하가 훈봉공신이다. 건국에 도움을 준 개국공신이 대표적이다. ‘공신도감’이라는 심의기구에서 대상자와 등급을 정했다. 훈봉공신은 공의 정도에 따라 큰 공을 세운 ‘정(正)공신’과 이하 ‘원종(原從)공신’으로 나뉘었다. 정공신에게는 ’교서(敎書)라는 두루마리 문서를, 원종공신에게는 녹권(錄券)이라는 활자 인쇄책자를 발급했다. 조선의 공신 책봉은 총 28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마르고 닳도록 우대해 주겠다 약속했지만 전체 공신의 4분의 1이 자격을 상실당했다고 한다.

* 임진왜란 공신록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을 공신에 책봉한 기록이 ’선무원종공신녹권‘이다. 당시 공신은 선조를 의주까지 피난시킨 호성(扈聖)공신, 왜군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선무(宣武)공신, 임란 때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淸難)공신 등 세 가지였다. 총 109명이 정공신이 되었는데 선무공신이 8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들에게는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고 자손들에겐 관직이 주어졌다. 죄를 지으면 형량을 감면받는 보장도 받았다. 모두 정공신에만 해당되는 특혜였다. 임진왜란으로 책훈된 원종공신은 1만 2530명에 달했는데 호봉을 올려주는 정도에 그쳤다. 사대부들에게는 별 특혜가 아니었지만, 중인 이하 신분의 원종공신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였기에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한 것이었다.

* 궁중의 주방 ‘사옹원(司饔院)’ - 사옹원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주방을 맡았기에 주원(廚院)이라고 불렀다. 관리직 30명을 포함해 무려 50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드라마 속 대장금 같은 여성 셰프는 없었다. 워낙 음식 만드는 게 고된 일이라 전부 남자였다. 사옹원에선 음식 그릇도 만들었다. 사기장만 380명에 달했다.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분원에서 제작했다. 사옹원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이 겸업했다. 제조 4명 중 3명과 부제조 5명 중 4명은 국왕의 종친들 맡았다. 왕자들이 도제조를 맡곤 했으나 명예직이라 실무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르기 전 1709년 도제조로 일했던 영조는 이 곳에 무척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갑을 훌쩍 넘긴 1770년 7월에 느닷없이 사옹원을 방문해 관원들에게 말을 하사했다. 이날의 일을 기록한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영조사마도(英祖司馬圖)’이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집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 - ‘협주명현십초시’는 당나라 시인 30명의 시 각 10편 등 총 300편을 싣고 주석을 달아 해설한 책이다. ‘협주’는 주석, ‘십초’는 10편씩 뽑았다는 뜻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그 중 두 권이 있다. 백거이 유우석 온정균 두목 등 당나라 말기 시인들과 함께 4명의 신라 시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최치원 박인범 최승우 최관우처럼 당나라에 유학하고 현지에서 과거(빈공과)에 급제한 이들이다. 이 책에는 당나라 시를 전부 모은 ‘전당시(全唐詩)’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가 100여수에 가깝다. 이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는 사료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주목한다. 10세기 무렵 어떤 이가 ‘십초시’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14세기에 승려 자산(子山)이 주석을 달아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승려는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과거 시험을 위해 간행되었을 것으로 관측된다.

* 1478년판 한국문학전집 ‘동문선(東文選)’ - 우리나라 문학전집의 전통은 1487년 ‘동문선’의 편찬에 이르러 규모와 수준에서 정점을 찍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文選)‘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선에서 이만큼 방대한 책은 없었다. 우리나라 모든 시문을 모으겠다며 1460년 세조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550여 명의 작품 4300여 편이 수록되었다. 총 130권으로 목록만 3권에 이른다. 1518년에 추가로 속편 23권이 더 편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문인과 작품을 총망라했다. 고구려 을지문덕부터 신라 최치원, 고려 김부식 정몽두 이색, 조선의 정도전 변량 신숙주 등의 글이 실렸다. 왕자의 난에 죽임을 당한 정도전과 계유정난 희생자 성상문 박팽년의 글로 차별없이 실렸을 정도로 문학적 가치를 중시했다. 지금은 사라진 고려시대 문헌이 대량으로 인용되어 사료적 가치도 높다. 1478년 처음 간행된 이후 1713년까지 9차례나 간행되었다. 유교와 불교. 도교 세 종교가 공존했던 과거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평이다.

* 조선 성리학 선구자 이황의 ‘퇴계잡영(退溪雜詠)’ - 1576년에 간행된 이 책은 최계 이황이 은퇴를 결심한 1546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565년까지 약 20년간 지은 시를 엮은 책이다. 퇴계가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퇴계의 친필을 그대로 본떠 목판에 새기고 찍어낸 책이라 더욱 주목된다. 퇴계의 친필 원본은 계명대 동산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목판본이 꽤 비슷하다고 한다. 퇴계는 다른 유학자보다 월등한 학자이거나 인격자는 아니었고, 수십 종의 저술도 주자학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지 독창적인 사상이 담기진 않았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점은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선구자였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퇴계의 주자학 이해는 당시 조선에서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퇴계 이후 비로소 조선 유학자들의 성리학 이해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 수석합격자 모법답안 모음집 ‘동국장원책(東國壯元策)’ -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논술이 중요했다. 문과는 초시(初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3차에 걸쳐 치러졌는데,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서 출제된 책문(策文)이 오늘날의 논술이다. 주로 정치 현안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현재 국가의 제도 중 개혁이 시급한 것을 논하시오’,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할 방법을 논하시오’, ‘성군이 다스린지 얼마 안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혼란해 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런 책문에 답하려면 경전과 역사에 해박해야 했다. ‘동국장원책’은 1396년부터 1447년까지 25명 과거 시험 장원급제자와 차석(4편)의 답안지를 모은 책이다. 장원급제자 가운데는 최초의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은 정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정인지는 중시에서도 장원급제해 유일하게 두 편의 답안지가 실려 있다.

* 한중 문화외교의 기록 ‘황화집(皇華集)’ - 조선과 명나라는 사신(使臣) 왕래가 잦았다. ‘황화집’은 명나라 사신과 그를 맞은 조선 관원들이 주고 받은 시를 모은 책이다. ‘황화’란 활짝 핀 꽃이란 뜻으로, 사신을 의미한다. 시를 주고받는 것을 수창(酬唱)이라고 한다. 중국 사신과의 수창을 특별히 ‘황화수창’이라고 했다. 의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은 관원은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명승지에 들러 잔치를 열고 수창을 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은근히 자존심 싸움을 펼쳤다. ‘황화집’은 1450년(세종 32)부터 1633년 명나라의 마지막 사신 ‘정룡’이 다녀갈 때 까지 20여 차례 만들어졌다. 이후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수창은 막을 내렸다. 젊고 능력있는 문신을 선발해 휴가를 주고 글짓기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관원들에게 매달 작문 숙제를 부여하는 월과제(月課制) 모두 황화수창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제학(大提學)’이 가장 영예로운 관직으로 꼽혔던 것도 중국 사신과의 수창을 주관했기 때문이다.

* 매사냥의 바이블 ‘응골방’ -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매사냥을 즐겼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매사냥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 진평왕은 마니아였다. 고려시대에는 응방(鷹坊)을 설치해 매를 관리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 세종도 즐길 정도로 매사냥은 왕과 귀족들을 위한 스포츠였다. 매사냥을 즐기던 연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스포츠로서의 매사냥이 사라졌다. 왕실은 매사냥꾼 응사(鷹師)에게 꿩고기의 납품을 맡겼다. 숙종 때 등록된 응사만도 1800명에 달했다. ‘응골방’은 고려인 이조년이 지은 책이다. 좋은 매를 고르는 법부터 먹이 주는 방법, 길들이고 훈련하는 법이 담겼다. 매사냥할 때 주의점, 매의 건강을 관찰하는 법과 응급처치 방법 등이 모두 망라되었다. 꿩 사냥용 매는 짧으면 1~2년, 길어야 3~4년 안에 죽거나 달아난다고 한다.

* 기근 대책서 ‘중간구황활민보유서(重刊救荒活民補遺書)’ - 중국 송나라 동위가 편찬한 ‘구황활민서’란 책이 있다. 기근에 관련된 278조목을 뽑아 조정에 바친 책이다. 이를 338조목으로 보충한 것이 ‘구황활민보유서’이고, 1445년에 거듭 간행된 책에 ‘중간’이라는 말이 또 붙었다. 명나라 때 중국책이라 귀중본으로 분류된다. 기근 대책의 역사, 구체적 기근 대책, 역대 황제들이 반포한 조칙(詔勅)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진대법(賑貸法), 곡식 수매로 물가를 조절하는 상평법(常平法), 기근에 대비해 곡식을 저장하는 의창(義倉)과 사창(社倉) 운영방법 등이 자세하다. 부자에게 기부를 권장하는 권분(勸分)도 포함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당시 기근 대책이 시장원리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곡식 가격이 오른다고 억지로 낮추면 역효과가 나니 국가 개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그때 이미 불평등이 굶주림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 효도 지침서 ‘수친양로신서(壽親養老新書)’ - 연로한 부모를 돌보아 오래 살게 하는 취지의 효도 실천서다. 중국 송나라 진직(陳直)이 편찬한 ‘양오봉친서’라는 책을 원나라 사람 추현(鄒鉉)이 보충해 편찬했다. 1권은 양로봉친서를 보충해 수록했고, 2권은 효도 관련 명언 및 고사를 담았다. 3권과 4권은 부모의 건강을 위한 음식 조리법과 약 제조법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3권과 4권이 없는 낙질이다. 1권에 중요한 내용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음식으로 치료하는 법’에는 아침에 진하게 내린 술 한 잔과 속을 다스리는 약을 드리고, 아침 전 간식으로 돼지와 양의 콩팥을 넣은 좁쌀죽을 드리라고 했다. ‘기분을 좋게 하는 법’에선 노인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우니 혼자 있게 하거나 혼자 자게 해선 안된다고 적었다. 이밖에 진맥 건강 진단법, 의약 건강 유지법, 바람직한 주거 환경과 가정 형편 등도 담았다. ‘노인에게 가장 좋은 음식’으로 놀랍게도 우유를 꼽았다. 혈맥을 고르게 보충하고 살을 찌워 준다며, 고기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 지옥을 피하는 법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 불교 의식 가운데 ‘예수재(預修齋)’가 있다. 죽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살아서 미리 공덕을 닦는 제사다. 죽은 이의 영혼을 천도하는 영산재(靈山齋), 떠도는 귀신들을 천도하는 수륙재(水陸齋)와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3대 의례다. 불교에 도교가 혼합된 ‘시왕 사상(十王思想)’이 있다. 저승의 열 명의 왕의 재판을 거쳐 망자(亡者)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저승관이다. 저승에는 진광왕 초강왕 송제왕 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태산왕 평등왕 도시왕 전륜왕 등 10명의 왕, 즉 명부시왕(冥府十王)이라고 존재한다고 믿었다. 죽은 이는 49일 동안 7일 간격으로 7회, 100일째, 1년째, 3년째 되는 날까지 모두 10번의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생전의 업에 따라 결정되는 재판 결과로 천상과 인간, 축생, 수라, 아귀, 지옥의 ‘육도(六道)’ 가운데 어디로 갈 지가 결정된다. 생전에 아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저승 시왕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으면 지옥행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책은 1576년 안동 광흥사에서 간행되었다. 31편에 걸쳐 예수재의 절차를 설명했다. 예수재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염라대왕의 등장이었다고 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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