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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파주살이 16년차’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① “여전히 할아버지, 아버지의 뜻 사무쳐요”

[허미선 기자의 컬처스케이프]

입력 2023-01-20 19:24 | 신문게재 2023-01-2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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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사진=이철준 기자)

 

“제가 고3 때(1992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임종을 지키신 저희 아버지 손을 잡고 ‘박영장학문화재단을 만들어 장학생들을 키워라’ ‘마지막 직장이자 모교였던 김제 죽산 초등학교에 매년 200권의 책을 기증하라’고 유언하셨어요. 그 재단의 영향으로 우리 (안종만) 회장님도 미술작품 컬렉팅을 하시면서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을 많이 봐오셨어요. 작업실이 없어서 호프집 등에서 그림을 그리는 형설지공 작가들을 돕는 게 숙원사업이셨죠.”

일상처럼 ‘문화예술의 중요성과 가치’를 가르치고 몸소 실천했던 그들의 큰 손녀이자 장녀인 안수연 갤러리박영 대표는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신진작가 지원사업 ‘박영 더 시프트’ 등을 이끌며 차근차근 현장 경험을 쌓아 지난해 대표이사가 됐다.

넓을 박(博), 꽃부리 영(英). 지난해 70주년을 맞은 사회과학 학술서적 전문출판사도, 파주 출판단지 내 1호로 16년차에 접어든 갤러리도 이름이 ‘널리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지닌 ‘박영’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피란지인 부산 부평동에서 ‘대중문화사’로 시작해 1954년 박영사로 이름을 바꾼 벽송(璧松) 안원옥(安洹玉) 회장의 유지와 문화예술사랑 DNA는 그렇게 장남인 안종만 박영사 회장, 안수연 갤러리박영 대표로 3대째 이어지고 있다.  

 

“2022년은 박영사 70주년이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갤러리박영이 15주년을 맞았죠. 고미술, 병풍, 환수한 미술품 등을 수집하신 할아버지가 중시하신 역사와 애국, 문화예술, 교육 등의 가치를 이어온 과정들이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무형의 가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유산이 참 많구나 깨달아요.”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사진=이철준 기자)

◇문화예술사랑 DNA 물려주신 “유난히 예뻐해 주신 할아버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는 저를 항상 무릎에 앉히고 교육의 중요성, 예술의 가치 등을 말씀해주시곤 하셨어요. 굉장히 가부장적인 분이신데 희한하게도 저한테는 안그러셨죠. 항상 ‘우리 수연이가 여의도 최고 미인’이라고 해주셨고 할아버지만 드시는 반찬도 저는 먹을 수 있었고 삼촌들이 ‘우리 집안의 유일한 천하무적’이라고 할 정도로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주셨고 교감했거든요. 그래선지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너무 많아요.”

그리곤 “박영사 70주년&갤러리박영 15주년 전시 ‘두레문화, 박영 70’展을 준비하면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던 서울예고시절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최근에 다시 찾아 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사진 속 할아버지 손에 흰 봉투가 들려 있는 거예요. 그때는 너무 철이 없어서 할아버지·할머니랑 사진 찍고 친구들한테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이 있더라고요. 얼마나 귀한 순간인데 저랬을까 후회도 들고….”

안 대표는 “제가 뭘 하면 항상 수고했다고 보답을 해주셨다”며 “그때처럼 공연을 마치거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보여드리면 용돈을 주신곤 하셨다”고 말을 보탰다.

“그렇게 주신 용돈을 저금해 통장을 보여드리면 사인을 해주시기도 하셨어요. 제가 뭔가 열심히 하면 수고했다고 용돈을 주시는 것도, 저금한 통장에 사인을 받는 것도,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너무 재밌었어요. 할아버지와의 기억은 다 좋은 것 같아요.”

박영사 본사에 위창 오세창 선생의 작품이, 집 벽에는 김기창, 김창열 작가 등의 작품들이 늘 걸려 있는 환경에서 문화예술, 교육의 중요한 가치를 배운 갤러리박영의 안수연 대표는 지난해 70주년을 맞은 박영사의 설립자이자 자신의 할아버지인 안원옥 회장의 유지를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었다.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사진=이철준 기자)

 

전라북도 김제에서 빈농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난 안원옥 회장은 공부에 대한 염원으로 전주사범대학에 진학해 부안초등학교, 김제 죽산초등학교 등에서 9년여간 교편을 잡았다. 그러던 중 발발한 한국전쟁통에 출판사를 시작한 안원옥 회장은 출판을 비롯해 교육, 문화예술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운보 김기창, 의재 허백련, ‘세한도’를 일본에서 가져왔고 박영사 초기 로고 작업을 한 소전 손재형 등과 가까이 지내며 여러 작가들을 후원했고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미술품 환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저희 할아버지 호가 벽송, 푸른 소나무예요.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늘 ‘일본에 가면 소나무가 참 많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다 가져간 것들’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죠.”

그렇게 우리 것을 되찾고자 했던 안원옥 회장이 소장해온 안중근 의사의 탁본 두점을 비롯해 운보 김기창,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형, 위창 오세창, 심전 안중식, 심산 노수현, 연담 김명국 등의 작품들과 갤러리박영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프랑스 팝아티스트 로베르 꽁바스(Robert Combas)의 메시지, 토마스 엘러가 제작한 박영사의 ‘경영전략’ 도서의 조형작을 비롯해 임상빈, 랠프 를렉, 조나단 켈런 등이 ‘책’을 소재로 한 작품 등은 박영사 70주년&갤러리박영 15주년 전시 ‘두레문화, 박영 70’展에 담겼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으로 또 다시 일어선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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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사 70주년과 갤러리박영 15주년 특별전 ‘두레문화, 박영 70’展(사진제공=갤러리박영)

 

“처음엔 화가 많이 났어요. 잡지사에서 8년 정도 기자로 일하다 결혼해 미국에 갔다 돌아온 게 2008년이었는데 아빠가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해 계셨어요.”

당시는 논과 밭뿐이던 파주라는 허허벌판에 쇼핑몰을 조성하고 뉴욕세계무역센터 등의 설계자인 미노루 야마사키에 의뢰해 갤러리를 만들어 작가 레지던시 사업을 하는 안종만 회장을 향한 “출판계의 이단아냐” “왜 출판사가 갤러리를 하고 미술작가들을 지원하냐” 등의 원망과 곱지 않은 시선이 팽배했던 때였다.

“너무 앞서 가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광야를 걷고 계셨더라고요. 굉장히 외롭고 힘들어 보이셨어요. 칭찬받아 마땅한 일임에도 외로워진 아빠가 불쌍하고 안타까웠어요. 문화예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아빠를 나라도 도와야겠다 했죠.”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사진=이철준 기자)

그렇게 안 대표는 대학 3학년 때부터 박영사에서 아르바이트생로 시작해 교정, 교열, 기획, 편집, 인쇄 등 혹독하게 출판업무를 체득한 아버지 안종만 회장의 전철을 밟아 마냥 평탄치만은 않은 갤러리박영 일을 돕기 시작했다. 

 

“공간을 무료 제공하고 월세, 보증금, 관리비 등도 저희가 부담하는 작가 인큐베이팅, 평론가와 작가 매칭 프로그램, 그들의 작품 전시, 작품 판매를 위한 각계 CEO 투어 및 아트페어 참가 등을 진행했죠.”

전시 및 공간 운영은 물론 작가 인큐베이팅, 레지던시, 평론가와 작가 매칭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며 주변에는 사람으로 들끓었지만 그 역시 “늘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금융위기가 들이닥친 2008년, 2009년에는 소장품 10여점을 팔아야 할 정도로 박영사가 어려워지면서 한창 진행 중이던 작가 레지던시 지원을 조기 중단해야하는 “황당하고 허무한” 사태까지 발생했다.

모든 원망이 그에게로 향했고 갤러리박영의 평판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면서 그 마저도 “아버지가 안쓰러우면서도 원망이 들기 시작했다.” 현수막을 걸었다는 이유로 신고가 접수돼 직접 경기도지사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말도 없이 매일 서울에서 파주까지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질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출근을 했던, 스스로 평한 대로 “성격이 급한” 안 대표는 “문화예술 사업은 진짜 혹독하고 어려운 일이다. 제대로 하려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면서도 “혼자 아등바등하다 사람에 실망하고 ‘소용없다’ 한탄하는 저를 다독이고 끌어준 분들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혼자 동동거리는 저를 보고 ‘미술사업, 특히 아무 것도 없는 파주에서의 갤러리 사업은 시간이 지나 연륜이 쌓여야 한다’ 해주신 홍대 교수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숨 고르기를 하면서 작가들과 네트워킹을 하고 안쓰러우면서 원망스럽기도 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견딜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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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사 70주년과 갤러리박영 15주년 특별전 ‘두레문화, 박영 70’展 중 독일 토마스 엘러의 'The bounty'(사진=허미선 기자)

그렇게 15년이 흐르면서 파주에는 대규모 출판단지가 조성됐고 350여명의 미술작가들이 모인 예술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평탄치만은 않은 길을 굳건히 걸어온 갤러리박영은 ‘레지던시 프로젝트’ ‘신진작가공모전’ ‘박영작가공모전’ 등 작가 발굴·지원 프로그램으로 2023년 개관 예정인 카이스트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된 이진준 작가를 비롯해 김범수, 이지현, 이주형, 자신의 작품을 갤러리박영 입구에 자진 설치한 김원근 등 작가들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저희 레지던시 프로그램 ‘스튜디오박영’ 2기였던 이주형 작가는 이제 꽤 유명해요. 유명 게임회사를 다니다 화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온 후 화재가 난 건물에서 작업을 했던 작가죠. 저랑 동갑내기 친구인데 처음 스튜디오박영에 지원했을 때는 그 작품세계가 너무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미술을 되게 오래할 것 같았고 작업실이 필요한 사람이었죠.”

세종시에 주거 중인 이주형은 2년쯤 전 안 대표를 찾아와 “오늘의 이주형은 갤러리박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내 시작인 이곳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며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지난해 봄 갤러리박영에서 열린 이주형의 ‘깊은 구지’라는 전시는 “인간의 불안을 주제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꽤 성황을 이뤘다.”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 안수연 대표(사진=이철준 기자)

 

안 대표는 “갤러리박영 8주년쯤 됐을 때 저랑은 당시만해도 인연이 없으셨던 양만기 작가님이 찾아오셨다”이라며 “덕성여대 교수로 후학 양성과 국가사업은 물론 글로벌 프로젝트로 바쁘신 분이셨다. 줄리안 오피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글로벌 작가”라고 부연했다.

“처음 보는 저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갤러리박영이 여기에서 시작해줘서, 금세 문 닫지 않고 8년을 버텨줘서 우리 같은 작가들이 파주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안종만) 회장님은 뵙기가 힘드니 따님께라도 만나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고. 그날 엄청 울었어요.”

사람들에 실망해 누군가를 만나는 게 불편하던 때 만난 양만기 작가는 그 후로 꾸준히 안수연 대표, 갤러리박영과 인연을 유지했다.

“양 작가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답답할 때 찾아가 하소연을 하면 다독여주시고 좋은 자리에 늘 불러주시고 10주년 ‘십년감수’ 전시에 줄리안 오피와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출품해주시고…. 주저앉으려고 하면 누군가 일으켜주고 또 주저앉으려는 찰나 다른 누군가가 일으켜주고…사람이 제일 힘들었지만 저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역시 사람이었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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