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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격동의 세월 견디며 희망의 홀씨 날리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⑫서울

입력 2021-06-22 07:00 | 신문게재 2021-06-2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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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전경
덕수궁은 오른편의 한옥 궁궐과 왼편 서양식 건물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특이한 궁궐이다. 사진=남민

 

◇ 서울 도심 근대화 물결 ‘정동길’

평안북도 오산학교가 폐교되자 김소월은 1922년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해 온다. 이곳에서 1902년생 동갑내기 나도향을 만나 절친한 벗이 됐다. 둘은 근대화 물결이 쇄도하는 정동의 한복판에서 문단의 든든한 벗이 되어 시와 소설로 꿈을 키워 나갔다.

김소월은 1920년 <창조>에서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했으나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배재학교로 온 1922년부터다. 그 해 <개벽>에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등을, 1923년엔 <개벽>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과 <배재> 2호에 ‘신천지’, ‘왕십리’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샛별로 떠올랐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1923년 졸업한 김소월은 곧바로 일본 동경상과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 무렵 가세까지 기울어 생활고에 시달리며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2년 후인 1925년에 시집 ‘진달래꽃’을 내며 절정기를 맞았지만 할아버지도 자신도 사업에 잇따라 실패하며 염세증에 빠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1934년 고향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복용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김소월의 흔적
김소월의 편집후기. 사진=남민

 

청년 김소월이 1년간 공부하고 시심을 키웠던 곳은 서울 정동길 야트막한 언덕 위의 배재학당이다.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영어와 지리, 수학, 과학 등을 가르치며 우리나라 최초로 ‘학칙’도 도입했다.

서양 각국이 조선으로 몰려와 저마다 공사관 자리를 잡았던 정동에 아펜젤러는 학교와 교회를 설립해 이 땅의 아이들을 교육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말을 학당훈으로 삼았다. 고종도 이듬해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을 하사할 만큼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당대의 내로라 하는 수많은 인물이 이곳을 거쳐갔다. 한글학자 주시경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목사 이경직, 한국 조소의 효시 김복진, 야구 제1호 타격왕 이영민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한글’이다. 아펜젤러는 이미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봤고 한글의 활용도와 사용을 늘려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주시경과 이중화, 이윤재가 배출됐고 주시경은 배재학당에서 독립신문 발간에도 간여하게 된다.

 

배재학당
지금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을 사용되고 있는 옛 배재학당 동관 건물. 사진=남민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는 1916년에 교사로 지은 배재학당 동관이 남아있다.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다. 지금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격동기 신교육의 발상지로서 수많은 신지식인의 숨결과 신문화의 요람, 독립신문이 발간된 터전임을 느껴볼 수 있다. 1930년대의 교실체험과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등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기행을 할 수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있는 언덕 아래쪽 정동로터리에는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 정동교회가 있다. 1885년 아펜젤러가 한옥 한 채를 사들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정동교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후 1897년 그 자리에 서양식 개신교회를 건립했고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등사하면서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953년 복구되었다.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 1886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사진=남민

 

주변에는 1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근대화 유물들이 줄지어 있다. 정동교회 옆 이화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었다.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설립한 후 이곳에서 신교육을 받던 유관순은 일제에 맞서 목숨을 던져야 했다. 이화박물관은 ‘심슨기념관’이라고도 부른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은 후 고종이 1년간 피신해야 했던 아관파천의 현장 구 러시아공사관 자리에는 지금은 이국풍의 하얀 망루만 남아있다. 미국공사관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외국공관도 있고,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모한 구 대법원 청사와 신아일보사 별관,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등도 등록문화재로 가치를 지닌 역사의 현장들이다. 서구 신문물의 유입 창구였던 정동길은 서울 도심 속 100여 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 비운의 을사늑약 현장 ‘중명전’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 이토 히로부미가 중명전 회의실로 들어서자 주변은 삼엄한 일본군이 에워싸며 경계에 들어갔다. 하세가와 사령관 휘하 무장 일본군의 포진은 고종황제에 대한 협박이었다. 곧이어 중명전의 회의실에서는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회의가 열린다.

고종황제가 알현을 거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이 불러모아 국권침탈 찬성을 강요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찬반을 묻는다. 묵묵히 듣는 자, 반대하는 자, 찬성하는 자로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완강히 반대하다 끌려나가 마루방에 갇힌다.

밤을 지샌 18일 새벽 1시.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 5명이 받아들임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을사늑약에 맺어졌다.(을사늑약문에는 11월 17일자로 기록돼 있다)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을 좌지우지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 2월 중명전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다.

 

을사늑약 현장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이곳에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후 오랫동안 일제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남민

 

이 조약은 강제적으로 이뤄졌기에 국제법상으로는 성립되지 않은 조약이자 늑약이다. 더군다나 고종황제의 비준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힘’이 없었다. 궁궐도서관으로 출발한 중명전은 국권침탈의 뼈아픈 현장으로 변질됐다.

비준을 끝까지 거부한 고종황제는 이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1907년 바로 그 중명전에서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다. 이 일이 탄로나자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아들 순종이 뒤를 잇는다.

을사늑약 직후 을사오적과 일제를 향해 통곡을 하며 누구는 의병을 일으켰고, 누구는 자결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그로부터 4년 후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온 국민의 울분을 씻어 주었다.

아픔을 간직한 곳이지만 중명전은 최초의 서양식 궁중 건물로 의미가 크다. 독립문과 덕수궁 정관헌과 함께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한 궁궐도서관이었다. 덕수궁의 부속건물이었다. 1901년 완공되면서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지만 고종이 거처하면서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重明殿)이라 부르게 됐다. 건축학적으로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다.

 

덕수궁 야경
덕수궁 야경. 사진=남민

 

덕수궁은 한옥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하는 특이한 궁궐이다. 근대화기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다. 남향의 서양식 우람한 건물이 석조전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해 1910년 준공됐다.

황궁의 정전으로 지어져 고종이 대신들과 외교사절을 만나는 공간이었으며 이후 해방 때까지는 미술관으로, 해방 직후엔 미-소 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유엔 한국위원단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됐다. 외관은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취했다. 옆의 석조전 서관은 1938년 준공한 건물로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돼 오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은 1900년 경 건립된 것으로 고종이 차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다. 서양식과 한식 건축이 혼합된 건물이다. 난간에는 사슴과 소나무, 박쥐 등 문양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밖에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이는 경운궁 양이재 건물과 고종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조선호텔 옆 환구단도 가까운 곳에 있는 격동기 유물이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서울의 명소

 

서울역문화관
서울역문화관. 사진=남민

 

▲ 옛 서울역사 = 1925년 경성역으로 문을 열어 광복 후 서울역으로 바뀌었다. KTX시대를 맞아 새 민자역사가 건설되면서 ‘서울역문화관’으로 탈바꿈했다. 12개 석재기둥이 돔을 이룬 중앙홀 천장과 함께 대통령 귀빈실 등이 있다.

 

▲ ‘3.1운동 발상지’ 탑골공원 = ‘1919년 3월 1일 정오’라는 말을 대변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탑골공원은 조선 세조 때 창건한 원각사가 있었던 곳으로,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가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기도 하다.

 

▲ 5대 고궁 = 가장 아름다운 왕의 정원(후원)을 가진 창덕궁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도 화려했던 옛 명성에 걸맞게 복원 중이다.

 

북촌
북촌의 한옥 마을. 사진=남민

 

▲ ‘전통의 거리’ 인사동-북촌 = 인사동은 외국인이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거리로 인식해 많이 찾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골동품상들이 몰리면서 골동품 거리로 명성을 높였다. 지금은 골동품점과 갤러리, 전통공예품점들이 주류를 이루며 안쪽 골목에는 맛집들이 몰려있다. 북촌은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모여 살던 동네로, 한국의 전통미를 잘 보여준다. 한옥 최고의 명소는 가회동 골목 안에 있다. 

 

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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