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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100명의 식솔 굶주림 택한 '율곡의 義' 뿌리내리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⑪강릉

입력 2021-09-14 07:00 | 신문게재 2021-09-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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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 율곡 선생 동상과 견득사의
강릉 오죽헌의 율곡 선생 동상. 사진=남민

 

이득을 보면 취해도 될, 옳은 것인지를 생각한다 ‘견득사의(見得思義)’ 

 

孔子 曰(공자 왈), 君子有九思(군자유구사) 視思明(시사명) 聽思聰(청사총) 色思溫(색사온) 貌思恭(모사공) 言思忠(언사충) 事思敬(사사경) 疑思問(의사문) 忿思難(분사난) 見得思義(견득사의).

공자께서 “군자가 늘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가 있다. 보는 것은 명확한지, 듣는 것은 분명한지, 안색은 온화한지, 몸가짐은 공손한지, 말은 치우침 없이 충실한지, 섬김은 정중한지, 의문점은 물어보려 하는지, 분노 후엔 뒤탈이 없는지, 이득을 보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 율곡 이이의 ‘견득사의(見得思義)’

 

강릉 오죽헌 안채
강릉 오죽헌 안채 모습. 사진=남민

 

공자는 “군자는 의를 밝히고 소인은 이익을 밝힌다”고 했다. 진정한 군자라면 부당한 이익을 탐하느니 정당한 어려움을 감내하라는 주문이다. 오늘날에도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취한 부당 이득은 반드시 뒷감당해야 할 날이 온다는 교훈이다.

그런 면에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만큼 ‘견득사의’ 정신을 실천한 위인도 드물다. ‘이득을 보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율곡이 금과옥조처럼 품고 실천한 말이다.

율곡은 “의(義)를 좋아하는 자는 나라를 위하고, 이(利)를 좋아하는 자는 자기 집을 위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임금의 요청으로 ‘학교모범’을 지어 바쳤다. 스승과 학생 선발 10개 조건과 함께 학생과 선생의 16가지 규범을 정했는데 여기에 두 번이나 ‘벼슬을 해도 이해득실 때문에 지조를 잃거나 도를 버려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공과 사를 분명히 했던 율곡은 나아가고 물러나며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출처사수(出處辭受)’가 한결같았다. 본의 아니게 서인(西人)으로 분류됐지만 붕당의 폐해를 잘 알기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으로 판단했다. 극한 대립 중이던 동인 김효원(金孝元)과 서인 심의겸(沈義謙)을 둘 다 외직으로 보내자는 제3의 대안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심의겸과 매우 가까웠음에도 이성적으로 판단한 조치였다.

율곡은 형제 가족들까지 거둬 100여 명의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이었다. 9세 때 ‘이륜행실’이란 책에서 당나라 사람 장공예가 구족(九族)과 함께 살았다는 내용을 접하고는, 자신도 아무리 어려워도 가족은 챙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듯하다. 하지만 벼슬을 관뒀을 땐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율곡의 곤궁함을 알고 친구인 황해도 재령 군수 최립이 쌀을 보냈을 때 율곡은 “관아의 곡식을 보낸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보냈다. 100명의 가족이 굶주린 상태에서 쌀가마를 되돌린 것이다. 관아의 곡식인 눈앞의 이득은 의롭지 못했기에 굶주림을 택한 것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호구지책으로 해주 석담에서 손수 대장간을 짓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갔을 만큼 늘 가난했다. 그럼에도 자주 사직하려 했던 것은 토붕와해(土崩瓦解)에 처한 나라가 걱정되어 늘 ‘개혁’을 강조했건만 선조가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줄곧 벼슬에서 물러나려 했던 것은, 그런 임금에게 간들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어 아무 쓸모가 없을 진데, 이름만 올려놓고 빌붙어 녹이나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시대를 앞선 ‘경장론자’ 율곡

 

강릉 경포대 율곡 시
강릉 경포대 율곡 시. 사진=남민

 

율곡은 선조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과 ‘만언봉사(萬言封事)’을 올린 데 이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통해 자신의 성리학 학문을 집대성했다. 성학집요는 이후 군왕들의 필수 교과서가 된다. 짧게 49세를 사는 동안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과 이조·병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지만, 북쪽 오랑캐 침입 대비책 건의가 수용되지 않는 등 영광보다는 한이 서린 관직 생활이었다. 특히 선조와의 골이 깊었다. 선조 10년에 대사간 벼슬을 다시 내리자 그는 “시사(時事)에 관해 물을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시고, 아니면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일축했다.

율곡은 평소에도 ‘토붕와해’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태조~태종 대 약 20~30년간의 ‘창업(創業)’ 기간과 세종~성종 대 약 70~80년의 ‘수성(守成)’의 시기 이후 나라 기강이 와해되었다며 “경장(更張)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경장은 ‘오래 사용해 늘어난 거문고 줄을 팽팽하게 조이는 것’을 말한다. 낡은 관행, 느슨해진 국가 시스템을 가다듬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붕괴에 직면할 것임을 안 것이다.

‘창업-수성-경장’이 율곡 개혁 사상의 핵심이다. 다급하게 경장을 호소했건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수시로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거유(巨儒) 율곡을 품을 그릇이 못 되었다. 한번은 정승 박순(朴淳)이 율곡의 사직을 받지 말라고 청하자, 선조는 “그는 교만하고 과격해 인격이 성숙된 뒤에 쓰는 것도 해롭지 않다”며 오히려 율곡을 힐란했다. 결국 율곡 사망 8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는 의주행 몽진 첫날 저녁 율곡의 정자 화석정(花石亭) 아래 임진강 나루에서 아수라장이 된 배에 올라 신하들 앞에서 통곡했다.

율곡을 이야기할 때 퇴계 이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위인은 1558년(명종 13년) 2월에 처음 만났다. 58세의 퇴계는 천하의 대학자였고 율곡은 세상에 막 이름을 알리고 있던 23세 젊은이였다. 둘은 예안(안동)에서 2박 3일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퇴계는 훗날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뒷사람을 두려워할 만하다. 後生可畏(후생가외)”라며 그를 극찬했다. 율곡은 1584년 한양 대사동(현 인사동) 우사(寓舍, 셋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1624년(인조 2년)에 문성공(文成公) 시호를 받았다.


◇ 오죽헌… “스스로를 경계하라”

 

강릉 오죽헌
강릉 오죽헌. 사진=남민

 

율곡(1536~1584)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 이원수(李元秀)와 신사임당(申師任堂, 신인선)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출생 전날 밤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른다. 16세에 스승과도 같았던 어머니가 사망했다. 큰 충격에 빠진 그는 3년 시묘살이 후 불쑥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불교의 허망함을 느끼고 1년 만에 환속한 그는 강릉 외가로 돌아와 약 1년 동안 오죽헌에 머물며 냉혹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11개 항의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공자는 마흔에 ‘불혹(不惑)’이라 했는데 율곡은 스물에 이미 그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온 율곡은 부침 속에서도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소리를 듣는다. ‘자경문’이 그를 단단히 지탱해준 덕이었다. 하지만 그도 한성시(漢城試)와 문과 별시 등 몇 차례 과거 시험에 낙방한 적이 있다. 성균관 유학 시절엔 산사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심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강릉 오죽헌 벼루
강릉 오죽헌에 보관 중인 율곡 선생의 벼루. 사진=남민

 

율곡이 태어난 방은 사랑채 담장 밖에 있는 별채 ‘오죽헌(烏竹軒)’ 건물이다. 율곡의 외할머니는 강릉 집을 율곡의 이종 아우인 권처균(權處均)에게 상속했는데 집 주변에 검은 대나무(烏竹, 오죽)가 많아 당호를 오죽헌이라 지었다. 중종 때 건축된 오죽헌(보물)은 조선 중기 사대부 별당의 운치를 느끼게 해준다. 정면 3칸 방 가운데 오른쪽 한 칸에 ‘몽룡실(夢龍室)’ 현판이 걸려 있다.

앞뜰에는 율곡이 어머니와 함께 어루만졌을 배롱나무 고목이 용틀임하듯 기세를 뽐낸다. 뒤뜰에는 수령 600년 된 율곡매(栗谷梅)가 향기롭다. 본채 앞쪽으로 오른쪽 협문 안쪽에 작고 앙증맞은 ‘어제각(御製閣)’이 보인다. 이곳에 율곡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 있음을 들은 정조대왕이 이를 가져오게 해, 벼루 뒷면에 어제어필(御製御筆)을 새기고 격몽요결에도 서문을 써 내려보내며 지은 건물이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강릉의 명소

 

강릉 송담서원
송담서원 전경. 사진=남민

 

율곡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이 있다. 강원 감사와 유생들이 강릉 강동면 언별리에 1630년 처음 세웠다. 

 

오죽헌 근처엔 300년 넘은 전통한옥 선교장(船橋莊)이 있다. 선교장은 세종대왕 형인 효령대군의 11세손 이내번(李乃蕃)이 발견하고 터를 잡아 크게 발복한 집이다. 대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사례가 많이 전해온다. 조상이 통천 군수로 재임할 때 흉년이 들자 곡식을 내어 구휼하니 백성들이 감사해 하며 ‘통천집’이라 불렀다. 금강산 유람객에게는 몇 날 며칠 무료 숙식을 제공했다. ‘베풀수록 재산이 늘어난다’는 교훈을 잘 보여준 집이다.

 

강릉 해당화 핀 경포해변
해당화가 핀 경포해변 전경. 사진=남민

 

‘강릉’의 으뜸은 경포호와 경포해변이다. 경포대(鏡浦臺)는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읊은 ‘관동팔경’ 중 하나다. 조선 선비들의 유람 1번지였다. 율곡 이이가 10세에 경포대의 사계절 아름다움을 읊어 쓴 ‘경포대부(鏡浦臺賦)’도 있다. 아이 글이라고 믿기지 않는 수작이다. 키 작은 해당화가 필 늦여름 풍경은 진한 향수를 자극한다.

 

강릉 허난설헌 기념공원 일대
강릉 허난설헌 기념공원 일대. 사진=남민

 

초당동에는 비운의 남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다. 남매는 아버지 허엽과 이곳에서 자랐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허균은 정치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았고 누이 허난설헌도 27세에 운명한 비운의 남매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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