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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사라진 것들> 이상화

입력 2022-07-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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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있다가 사라진 것 들에 대한 기록이다. 5차례의 대 멸종 시기를 거쳐 진화한 인류 역사 가운데 이유없이 사라진 유물과 의문 투성이 사건들을 모아 정리했다. 네안데르탈인이 똑똑한 호모 사피엔스에 밀려 절멸한 사연, 아직 누구도 몽골제국의 제왕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지 못하는 이유,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인양하지 못하는 에스파냐 보물선, 그리고 도난당한 왕실 보석 때문에 절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태국의 사연 등이 흥미롭다.


* 5차례 대멸종 끝에 탄생한 인류 - 23억 년 혹은 35억 년 전에 광합성에 의해 최초로 단세포 생명체가 출현한 이후 인류는 5차례의 큰 멸종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는 5000만년 전이었다. 지각변동 등으로 해양 생물종의 50% 이상이 사라졌다. 2차 대멸종은 3억 7000만 년 전에 일어났다. 대형 운석과의 충돌로 기후가 급격히 변하고 화산폭발까지 일어나 생태계와 먹이사슬이 붕괴되었다. 2억 5000만년 전의 3차 대멸종은 대륙의 ‘판게아(pangea)’ 과정 속에 대규모 화산폭발로 이산화탄소가 급증하면서 지구 온도가 6도나 올라 생명체의 80~90%가 멸종했다. 4차 대멸종은 약 2억 1500만년 전이다. 3차 때와 비슷한 이유로 생명체의 70% 이상이 사라졌다. 6500만 년 전의 5차 대멸종은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 때문이었다. 100만년 이상 암흑기가 이어지며 생명체의 75% 가량이 멸종했지만, 다행히 포유류와 조류가 살아남아 인류를 탄생시켰다.

* 사라진 네안데르탈인 -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5만여 년에 걸쳐 남아메리카 끝까지 지구 전역으로 진출했다. 그런데 유럽에는 이미 그들과 비슷한 모습의 네안데르탈인이 살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들은 2만 5000~2만 8000년 전에 절멸했다. 가장 오래된 학설은 학살설이다. 지능이 더 뛰어나고 세련된 신무기에 식인 습성까지 있던 호모사피엔스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기후 적응 실패설도 있다. 호모사피엔스에 수적으로 열세라 북쪽으로 밀려 혹독한 추위에 절멸했다는 것이다. 자연적 소멸설은 네안데르탈인 남자 유전자 Y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겨 아들 낳기 어려운 생물학적 구조 탓에 자연 소멸되었다는 주장이다. 가장 최근 가설은 숙명설이다. 10~30명의 무리가 모두 한 가족이었기에 근친교배가 불가피해 열성유전자가 이어지며 저절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 인류 진화의 키를 쥔 베이징원인(原人) - 약 7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류 베이징원인의 유골화석이 발견된 곳은 중국 베이징 교외의 저우커우덴 룽구산 동굴이었다. 유인원 원숭이에 불과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생 인류로 진화할 수 있었는지 연결고리를 밝혀 줄 중요한 발견이었다. 1921년 국제탐사대가 중국 베이징 일대를 탐사하다 저우커우덴에사 원시 인류의 것으로 판단되는 뼛조각 몇 점을 발굴했고, 1926년 오스트리아 고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가 그 가운데 예사롭지 않은 치아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됐다. 이어 탐사대 일원이던 페이원중이라는 중국 청년이 1927년 이곳에서 140m 길이의 동굴을 발견하면서 베이징원인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들은 육류를 섭취하고 불을 사용했으며 뇌 용량이 약 1200cc로 호모에렉투스보다 지능이 더 높았고 언어까지 갖고 있었다.

* 행방이 묘연한 베이징원인 유골 - 1940년 경 갑자기 베이징원인의 유골이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1937년 터진 중일 전쟁이 발단이었다. 페이원중은 일본이 이 유골들을 탐내고 있음을 알고, 미국 록펠러재단이 베이징에 설립한 의과대학(협화의학원)의 신생대연구실로 옮겨 금고에 보관했다.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그는 당시 국민당 정부의 승인과 미국의 허락을 받아 이송을 준비한다. 그런데 1941년 12월 7일 수송작전이 시작된 지 이틀 만에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유골을 실은 프레지던트 해리슨호는 양쯔강 부근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침몰하게 된다. 이후 누구도 유골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베이징원인 분실 전에 독일의 해부학자가 상세한 기록과 함께 사진과 석고 모형까지 남겨 준 덕분에 소중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과 사라진 주민들 - 이스타섬은 칠레 서쪽으로 약 3600km 떨어진 남태평양 망망대해의 외딴 화산섬이다. 제주도 10분의 1 면적의 이 섬이 유명해진 것은 섬 전체에 800개가 훨씬 넘게 세워진 거대 석상 ‘모아이(Moai)’ 덕분이다. 4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들은 한결같이 일정한 한 쪽 방향을 바로보고 있다. 처음에는 큰 것이 높이 20m에 가까운 이 석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해변가로 운반되었는지 의문거리였다. 학자들은 석상의 재질이 화산석이라 생각보다 무겁지 않고 조각도 어렵지 않았음을 알아냈다. 이 섬에서 갑자기 주민들이 사라진 원인도 의문거리였다. <총 균 쇠>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연파괴설을 주장한다. 섬에는 야자수가 울창했는데 그 많은 석상을 운반하느라 마구 잘려나가면서 나중에는 배조차 만들 수 없게 되자 식량을 얻기 위한 부족간 싸움이 커져 결국 1만 명이 넘던 원주민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 천하무적 바이킹. 어디로? -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던 바이킹족은 뛰어난 체력과 지능을 지닌 우수한 혼혈 종족이었다. 바다를 생업의 주무대로 삼았기에 배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이 탁월했다. 해상 전쟁에선 천하무적이었다. 콜롬버스에 수백 년 앞서 아메리카대륙에 진출할 정도로 도전정신도 남달랐다. 그런 바이킹이 11세기가 지나면서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해 약 500년 뒤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우선, 자신이 점령한 나라에 정착해 현지인과 동화되어 탈 바이킹화 한 것이 한 이유다. 북유럽 복지의 기틀을 만든 것이 바이킹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이론이다. 다음은 자연소멸론이다. 북쪽 그린란드에 대규모로 정착하려던 바이킹이 기후에 적응 못하고 농사와 목축을 고집하다 결국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대부분 죽고, 마지막 바이킹은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혹은 선주민인 이누이트족과 처절하게 싸우다 전멸했다는 것이다.

* 사라진 여성의 ‘성적 신호’와 줄어드는 남성의 ‘정자’ - 무리의 우두머리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점하는 고릴라와 달리 침팬지는 무리의 수컷과 발정기의 암컷이 짝짓기하는 난교(亂交)다. 원시인류도 여성의 일정한 발정기에만 짝짓기가 이뤄졌다. 문제는 인간의 임신 기간이 10개월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원시여성은 남성을 곁에 두게 하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냈다. 임신과 양육 기간에 지속적으로 음식을 가져다 주고 온갖 위험을 막아줄 존재를 만든 것이었다. 그 대가로 지속적인 섹스를 제공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발정기가 언제인지를 숨겨 배란기를 감추는 진화를 겪게 된다. 현대에 들어 남성에게선 점점 정자가 줄고 있다. 생활습관 변화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아지며 고환이 따뜻해져 정자 생산이 줄었다는 것이다. 흡연, 화학물질 섭취, 공해도 정자 감소의 치명적 이유로 꼽힌다. 특히 흡연은 정자 감소에 직격탄이라고 한다.

* 석가모니 나라 인도에서 사라진 불교 - 석가모니가 태어난 인도에는 불교 성지(聖地)가 없다. 신자 수는 인구의 0.1%에 불과하다. 인도에서 불교는 아리안족이 쳐들어와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평민을 착취할 때 등장했다. 석가모니 붓다는 철저하게 평민 편에 섰다. 절대적인 신을 내세우지 않고,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자 불교는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그 위세에 늘려있던 기존의 브라만교가 불교 교리까지 상당 부분 포함시켜 힌두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재 탄생시켰다.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수많은 소를 제물로 바쳐 원성을 샀던 브라만교가 거꾸로 소를 신성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석가모니도 인도인이 가장 숭상하는 ‘비슈누 신’이 환생한 것이라며 그들의 신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래서 힌두교는 창시자도 없고 특별한 교리도 없다. 대신 힌두교만 믿으면 더 없이 편하고 만사형통이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치명타를 입은 것은 10세기 이슬람 침략 때문이었다. 현재 인도 총인구의 81%가 힌두교, 13%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 ‘반달리즘’과 바미얀 유적 -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서쪽으로 130km 떨어진 힌두쿠시산맥 기슭의 바미얀은 1~13세기에 동서양 교역로이자 문화예술 중심지였다.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던 하자라족 마을에 8세기 경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박해아 함께 불교 유적 파괴가 시작됐다. 바이얀에는 암벽을 깎아 안쪽으로 세운 두 개의 석불이 유명했다. 각각 높이 38m, 53m의 부처상이었다. 그런데 2001년 탈레반이 이 세계적 문화유산을 무차별 파괴해 버렸다. 파괴 장면을 전 세계에 공개까지 했다. 유네스코는 2003년 이곳을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으로 분류 등재했다. 이곳을 관광지로 꾸미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석불 복원을 주장했다. 복구 기간 5년에 2000만 달러 비용이 들 것이란 계획까지 제시됐다. 하지만 문화재에 대한 만행에 맞서자며 복구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컸다. 종교 또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적대감으로 다른 종교와 문화 유적을 파괴하는 ‘반달리즘(Vandalism)’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 아무도 모르는 칭기스칸의 무덤 - 12~13세기에 대 몽골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이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몽골의 전통적인 장례 풍습 탓이다. 유목민이던 몽골족은 시신을 땅에 깊숙이 묻고 봉분을 만들지 않는 ‘밀장(密葬)’이라는 매장 방식을 택했다. 묻힌 곳을 숨기고 장지에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원나라 역대 황제의 무덤을 아직 하나도 못 찾는 이유다. 칭기스칸의 장례도 같았다. 비밀리에 대규모 묘지를 조성한 후 말 수천 필을 동원해 그 위를 마구 달리게 해 평지로 만들고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만들었다. 병사 800명으로 하여금 묘지 조성과 매장에 참여한 1000여명의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고, 이들 병사 역시 비밀리에 모두 처형해 무덤에 관한 비밀을 유지했다. 원나라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에 그의 시신이 ‘가련곡’에 안장돼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특정한 지명은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칭기스칸이 병사한 중국 간쑤성 류판산의 어느 골짜기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당시엔 여름이었기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 했으며, 특히 몽골족은 시신이 썩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여겨 사흘 이내에 묻어야 했다는 점이 근거다.

* 사라져버린 거대한 파로스 등대 - 기원전 3세기 이집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등대가 세워졌다. 높이가 135m에 이르는 거대한 등대로, 맑은 날에는 40km 밖에서도 등댓불이 보일 정도였다.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이곳에 알렉사드리아를 건설한 프롤레마이오스 이집트 왕가의 지배를 받던 크니도스라는 도시국가가 환심을 사려 기원전 280년경에 파로스섬에 등대를 세워 바쳤다. 맨 꼭대기에는 높이가 5m쯤 되는 커다란 헬리오스 상을 세웠다. 안타깝게도 이 등대는 네 차례에 걸친 지진 끝에 1303년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어 프랑스 수중탐사대가 등대의 잔해 일부를 인양했고, 1994년에는 헬리오스 상을 끌어 올렸다. 무게가 12톤에 달한 이 물체를 어떻게 끌어올렸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 신비의 숨겨진 암벽도시 ‘페트라’ - 요르단의 수도 암만 남쪽으로 150km 떨어진 페트라는 지중해와 홍해와 가까운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고대 유적이 바위산 암벽 속에서 발견되어 큰 화제를 뿌렸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해발 950m의 높은 곳에 바위산들로 둘러싸여, 입구조차 찾기 어려웠다. 4세기경 대지진으로 그 길마저 끊겨 고립되었는데, 1812년 스위스의 젊은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워낙 규모가 방대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모래 때문에 발굴 작업은 1958년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입구에 높이 200m가 넘을듯한 거대한 바위산 두 개가 가로막고 있고, 그 틈으로 겨우 2~3m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 마침내 페트라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암벽들은 그 자체로 위대한 조각품이었다. 궁전과 신전, 수도원. 극장, 공중목욕탕이 갖춰져 있었다. 가장 유명한 유물은 도시 입구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카즈네피라움’이라는 신전이다. 높이 40m에 너비 28m나 되는 웅장하면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신전이자 왕들이 무덤이었다. 암석이 사암으로 되어 있어 조각하기 쉬었다고 한다.

* 히틀러는 자살했나 잠적했나 - 연합군 측 공식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패배가 확실해지자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죽으면서 자기 유해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곧 이어 방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친위대원들은 시신을 구덩이에 넣고 휘발유를 뿌려 소각했다. 5월 9일 소련군 조사관들이 불 탄 시신에서 추출한 틀니와 치아 조각들로 히틀러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조사에 허점이 많았고, 두 번째 연합군 측 조사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의혹이 제기됐다. 히틀러가 죽었다는 그날 오후 늦게 히틀러를 베를린 템펠호프공항에서 목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독일군의 정예 잠수함이었던 U보트의 함장이 쓴 책을 근거로 히틀러가 아르헨티나로 U보트를 타고 탈출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부근에는 U보트 비밀기지가 있었다. 아이히만을 포함해 많은 독일 군 간부들이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기록도 있다. 생존설이 일파만파 퍼지자 소련이 히틀러의 시체 사진이라며 공개했는데, 자살해 소각했다던 공식 기록과 맞지 않는데다 나중에 다른 이의 시체임이 밝혀져 의혹만 더욱 키웠다. 1946년에 스탈린이 히틀러 제거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혼란을 더욱 키웠다.

* 알고도 찾지 못하는 에스파냐의 보물선 - 에스파냐는 17~18세기 식민지 전쟁의 선주주자였다. 펠리페 5세는 영국 등 경쟁국과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려 페루 등 남미 식민지에서 약탈한 엄청난 금은보화를 ‘산호세’호에 실어 비밀리에 본국으로 옮기려 했다. 현재 시가로 144억 달러가 넘는 가치였다. 1706년 6월 8일 남미를 출발한 산호세호는 그러나 곧 영국 함대와 맞닥뜨렸고 결국 침몰한다. 1981년 미국 인양업체 SSA가 수중 탐사 중 침몰한 산호세호를 찾아냈다. 이 때부터 보물선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진다. SSA는 영해권을 가진 콜롬비아 정부와 협상 끝에 50대 50의 소유권을 갖는다는 합의한다. 그러자 에스파냐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페루도 자기 보물이라고 나섰다. 콜롬비아 정부가 SSA와의 합의까지 파기하고 소유권이 온전히 자국에 있다고 발표해 버린다. SSA가 황급히 미국 법원에 호소했지만 패소하고 만다. 국제분쟁 조짐이 보이자 유네스코는 “보물 인양 목적으로 침몰 선박을 파헤치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물을 훼손해선 안된다”며 콜롬비아를 압박했고, 국제적 다툼에 부담을 느낀 콜롬비아이 결국 인양 계획을 중단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보석 때문에 절교한 사우디와 태국 - 사우디아라비아 파흐드 왕의 장남 파이살 왕자의 보석이 사라진 것은 1989년이었다. 당시 궁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태국인 끄리앙끄라이 떼차몽이 왕자의 휴가 기간에 몰래 훔쳐 태국으로 반출한 것이다. 그가 훔친 보석은 무게 약 30kg에 시가로 2000만 달러가 넘었다. 특히 달걀 크기의 50캐럿 짜리 ‘블루다이아몬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파이살이 뒤늦게 떼차몽의 소행을 알고 태국 측에 보석을 찾아 반화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상당 양이 처분된 뒤였다. 떼차몽은 태국 법정에서 3년형을 받았고 태국 경찰은 그의 진술에 따라 장물아비들에게서 다수의 보석을 회수해 파이살 왕자에게 돌려주었다. 블루다이아몬드는 없었고 도난당한 보석의 20% 정도만이 돌아왔는데 그 80%가 가짜였다. 태국 경찰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가짜를 만들어 보내도록 한 것이었다. 사우디 정부가 진상 파악을 위해 세 명의 대사관 직원들을 참여시켰으나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사우디는 태국 국민에 대한 취업 비자 발급을 중단하고 자국민의 방콕 방문을 축소시키며 강강 대응에 나섰다. 2010년에는 자국 내 태국 노동자의 10% 정도만 남기고 모두 추방했다. 두 나라는 아직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는 진품인가 - 1910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빈첸초 페루자라는 이탈리아 목공이 임시직원으로 채용됐다. 그는 1911년 8월 20일 휴관일에 박물관 대청소의 틈을 노려 모나리자 액자를 분리해 그림만 빼내 코트에 숨겨 박물관을 빠져 나갔다. 박물관이 다음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후 2년 동안 모나리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페루자가 이탈리아 암시장에 모나리자를 내다 팔려다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1913년 이 작품은 다시 박물관에 반환되었다. 페루자는 겨우 7개월 형을 받았는데 그는 조국 이탈리아를 침략했던 나폴레옹이 전리품으로 약탈한 것을 조국에 보내려 한 것 뿐이라고 주장해 한 때 이탈리아에서 영웅 대접까지 받았다. 나중에는 페루자가 세기적 사기꾼인 발피에르노의 사주를 받아 모나리자를 훔쳤고 그가 돌려준 모나리자는 발피에르노가 제작한 위작 6점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때문에 지금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가 진품인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62년에 영국에서 발견된 ‘아이즐워스 모나리자’가 다빈치가 그린 진품임이 확인되면서 진위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 다시는 만들 수 없는 ‘스트라디바리우스’ - 이탈리아의 악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생전에 960개 바이올린을 포함해 1100여 개 현악기를 만들었다. 그 중 지금까지 450~512개 바이올린 등 600여 개가 남아있다. 세계적 첼리스트 정명화가 1713년산 첼로를 갖고 있고, 여타 많은 연주자들은 엄청난 가격 탓에 대부분 장기 대여해 사용 중이다. 201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719년 산이 무려 4500만 달러에 낙찰되었을 정도다. 귀하고 비싼 악기이기에 도난 사건도 잦다. 영국에서 활동 중인 김민진 바이올리니스트도 2010년에 런던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21억원이 넘는 바이올린을 집시에게 도난당했다가 어렵게 되찾은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다시는 재생할 수 없는 놀라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제작 당시 기후가 달랐다고 한다. 1645년부터 약 100년 동안 소빙하기라 나무들이 촘촘하고 일정한 나이테를 가져 소리 파장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몸체 앞 면은 가문비 나무, 내부는 버드 나무, 뒷면과 옆면은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성분과 조합도 좋은 음색을 내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베니치아에서 밀라노로 뗏목으로 옮겨 오면서 미네랄과 염분 등이 적절히 스며들어 나무들이 탁월한 소리를 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독특한 약품 처리도 음색의 선명도를 크게 높였을 것이라고 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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