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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플레이 나이스 벗 윈> 마이클 델

입력 2022-10-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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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테크놀로지’ 창업주이자 회장인 마이클 델에 관해 의외로 국내에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경영서적에서도 유독 그의 사례는 흔치 않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쓴 이 책은 마이클 델이라는 경영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혁신적 성장을 위해 상장기업을 비상장기업으로 과감히 전환한 이야기,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과의 피를 말리는 경영권 다툼, 단순 조립 컴퓨터 회사를 첨단 기술 인프라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그의 짧지 않은 역사를 소상히 볼 수 있다. 10대의 대학 자퇴생 창업가에서 불패의 리더로 성장한 마이클 델의 38년 비즈니스 혁신 로드맵을 확인해 보자.

 

 

 

* 컴퓨터 분해가 취미였던 아이 - 마이클 델은 삼 형제 중 둘째였다. 어머니의 재능과 호기심을 물려받은 그는 일찍부터 컴퓨터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애플Ⅱ’라는 컴퓨터 모델을 출시한다는 기사에서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PC는 작고 신뢰할 수 있고, 사용하기 편리하면서 비싸지 않아야 한다”고 한 말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당시 소비자가격이  지금가치로 5000달러의 초고가였지만, 부모를 졸라 14세 때 기어이 자신이 저축해 모은 돈을 합해 애플Ⅱ를 손에 넣게 된다. 물건이 도착하자 그는 곧장 컴퓨터를 분해했다. 이후 컴퓨터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델은 개발자 등과 컴퓨터에 푹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워즈니악을 만나게 된다. 워즈니악은 “사람들이 PC를 통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며 그를 감동시켰다. 5년 후 델은 그와 스티브 잡스와 친구가 된다. 1981년에 IBM이 PC 5150을 앞세워 PC시장에 진출하면서 그는  PC가 미래의 대세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텍사스주립대 의대에 합격했지만 그는 이미 컴퓨터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 10대부터 기업가정신을 보여주다 - IBM PC는 출시와 동시에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어마어마한 주문 탓에 지역 소매점들은 극심한 물량 부족을 호소했다. 델은 이 때 공급이 여유있는 도시에서 여러 대 PC를 구입한 후 물량이 달리는 다른 도시에 가져다 파는 사업을 펼친다. 10대 말에 그는 거의 매주말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손쉬운 차익 거래를 했다. 컴퓨터를 직접 개조해 팔기까지 했다. 업그레이드 된 그의 PC는 빠르게 팔려 나갔다. 신문광고까지 내면서 구매요청이 쇄도했다. 이때부터 ‘IBM과 경쟁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게 된다. 의대 진학보다 컴퓨터 사업에 올인하기로 결심한다. 1984년 고교 학기말 시험을 2주 남긴 시점에 그는 ‘델 컴퓨터 코퍼레이션’, 비공식적 상호 ‘PC’s 리미티드‘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세운다. 불과 19살, 회계가 뭔지도 모르는 대표가 된 것이다. 

 

* 바쁘게 성장하는 청년 CEO - 델은 영업 시작 9달 만에 8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1986년 첫 해 매출은 3300만 달러에 달했다. 주문조립식으로 PC를 만들어 그날 출고하는 델의 방식을 모방하는 기업이 속출했지만 유일하게 델만 성공했다. 소매점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직접 PC를 판매하고, 고객들이 원하는 주변기기까지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 덕분이었다. IBM 제품의 성능을 개선하고 가격을 낮춘 것이다. 사무실에 침대를 두고 하루 16시간 일을 했다. 1985년 6월에는 ‘터보’라는 이름의 첫 델 제품을 선보였다. 인텔의 8088 CPU와 640킬로바이트의 램, 360킬로바이트의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한 제품을 통신판매와 전화주문으로 795달러에 팔았다. 비슷한 사양의 IBM 컴퓨터는 1500~2500달러였다. 델은 이후 잇달아 저가형 컴퓨터와 빠른 컴퓨터, 고성능 컴퓨터 등 세 종류의 제품을 선보이며 두각을 나타냈다. 회계문제 해결방안을 찾지 못해 더듬거리긴 했지만 성장속도는 빨랐다.    

 

* 마침내 회사에 ‘델’ 이름을 걸다 - 회계와 투자 유치 등의 문제로 한창 골머리를 앓을 때 델은 리 워커라는 조력자를 만난다. PS’s 리미티드의 사장직을 맡은 그는 CFO와 최고회계책임자 부부를 경질하는 것부터 시작해 회사를 개방적이고 합리적으로 재구축해 갔다. 특히 그동안 등한시했던 품질관리에 전력을 기울여 ‘작지만 빠른’ 기업 이미지를 완성해 갔다. 무료방문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커다란 도약의 발판도 마련하면서 투자은행들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1987년 10월 19일 ‘블랙 먼데이’의 대폭락 사태에도 끄덕 없었다. 델은 기업공개를 생각하게 된다. PS’s 리미티드로 상장을 할 순 없었기에 영국 브런치에서 인지도를 높여가던 ‘델 코퍼레이션’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붙힌 이름으로 상장을 결정한다. 델의 기업공개 소식에 IBM은 불쑥 경고장을 날렸다. 델이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으니 상장 중지를 명령하는 내용증명이었다. 특허에 아무런 지식이 없던 델은 우여곡절 끝에 IBM측과 특허 사용료 계약을 맺고 마침내 IPO를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주당 8.5달러에 나스닥에서 ‘DELL’이라는 이름으로 상장됐다.  

 

* 경영위기 속 3년 만에 다시 CEO로 복귀하다 - 델은 2004년 7월에 케빈 롤린스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 해 델은 이익이 15%나 급증했고 2005년 1월 PC시장 점유율은 18.2%에 달했다. 2월에는 포춘의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위 기업’에 선정됐다. 하지만 9월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매출의 60%인 PC와 노트북 부문의 이익에 이상이 생겼다. 휴렛팩커드 레노버 같은 경쟁기업이 맹추격하는 가운데 컴퓨터 산업의 중심이 노트북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델의 주문제작 방식이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고객들은 제품 자체보다 서비스와 솔루션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마이클 델은 결국 2007년에 CEO로 복귀했고, 즉시 14억 달러에 데이터스토리지 기업인 이퀄로직을 인수하고 페로시스템즈, 컴펠런트, 인사이트원  같은 스토리지와 시스템 관리, 클라우드 등 소프트웨어 기업을 속속 사들였다. 다행히 2012 회계연도에 델은 사상최대 매출과 이익, 영업이익, 현금흐름과 주당순이익을 실현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에선 실패했다. 2018년엔 시장점유율이 10.5%로 하락하고 수익도 다시 감소했다. 언론은 델이 여전히 PC를 만드는 기업이고, PC는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가도 계속 하락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 상장기업에서 비상장기업으로 전환을 모색하다 - 델의 2대주주였던 사우스이스턴에셋매니지먼트의 CIO(최고투자책임자) 스탤리 케이츠가 델을 비공개 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0년 닷컴버블 붕괴 이후 금리 하락 때 잠시 얘기가 나왔었는데, 실버레이크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의 에곤 더반을 만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델이 비공개기업으로 전환하고 상장폐지하려면 모든 주식을 사들여야 했다. 250억 달러의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됐다. 마이클 델은 상장기업에 가해지는 단기성과 압박 등을 받지 않는 비공개기업에 매력을 느꼈지만, 주주들은 가능한 가장 높은 가격에 자기 주식을 사주기를 바랐다. 델은 사외이사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외부인과도 더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겠다는 신중론을 폈다. 다행히 이사회도 비공개기업으로 전환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곧 비공개 전환을 검토하기 위해 이사회로부터 완전하고 독점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특별위원회가 꾸려지고, 알렉스 만들이 의장에 올랐다.

 

* 스마트폰이 PC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란 확신 - 마이클 델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사모펀드와 함께 델을 인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 회사를 가로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더구나 특별위원회가 임명한 전문가들은 델의 경영상태를 매우 비관적으로 평가했다. JP모건은 엄청난 시가총액, 악화되는 PC 시장 리스크, 최근의 실적 악화 등을 이유로 델 인수에 관심을 가질 투자자가 있을 지 의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매사에 낙관적인 델은 회사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보았다. 당시 가장 전망 좋은 상품이었던 스마트폰과 태블릿도 감히 PC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비즈니스 시장에서 PC의 가치는 견고하다고 확신했다. 고객들은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읽고, PC로 일할 것이라고 믿었다. 델은 비공개기업으로 전환해야 회사의 기업가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고, 더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연구개발 투자와 영업 역량을 강화해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PC와 서버의 가격 결정을 보다 공격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환 비용이 많이 들어가겠지만 훨씬 더 많은 이득을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 시작부터 난항인 가격 협상 - 델은 KKR과 실버레이크파트너스에 회사의 모든 재무상황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예비제안서를 제출했다. KKR은 델과 사우스이스턴이 보유한 지분을 제외한 모든 발행주식에 주당 12~13달러 정도의 매수가격을 제시했다. 델에게는 5억 달러의 추가 투자를 요청했다. 실버레이크는 별도로 델의 보유 주식 외 모든 발행주식에 주당 11.22~12.16달러를 제시했다. 델은 양 측에 더 좋은 제안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업인수에 성공한 당사자가 지불할 가격에 당시 회사 지분의 15.7%에 해당하는 자신의 주식을 넘기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다 블룸버그 통신이 ‘델이 사모펀드와 인수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를 하면서 상장폐지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 누군가 델을 가로챌 수도 있다? - 가격협상이 수개월 째 지연되면서 델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인수자 후보를 찾았다. 그러다 실버레이크와 13.65달러에 합의한다. 분기별 정기 배당금을 계속 지급한다는 데도 동의했다. 알렉스는 특별위원회를 대표해 이사회에 제안 수락을 권고했고 만장일치로 승인이 났다. 실버레이크는 총 244억 달러에 차입 매수하는 방식으로 델의 비공개기업 전환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규모 기업인수지만 위험하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도 “대단한 도박”이라고 했다. 마이클 델을 겨냥한 온갖 험담이 쏟아졌다. 사우스이스턴은 “델의 정확한 가치는 주당 23.72달러”라며 델이 회사를 망쳤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휴렛팩커드는 “델이 장기간의 불확실성과 변화에 직면할 것”이라며 이제 자사 제품을 구매하라고 노골적으로 나섰다. 그런 사이에 블랙스톤과 칼 아이칸이 레이더에 포착된다. CNBC는 칼이 1억 주, 이해관계가 없는 전체 주식의 약 6%에 달하는 지분을 긁어모았다고 보도했다. 사우스이스턴이 보유한 8.5%보다 조금 적은 규모였다.

 

* 문제를 일으키는 기회주의자 칼 아이칸 - 저자는 행동주의 투자자라고 불리는 칼 아이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무슨 말이든 기꺼이 하는, 권모술수에 매우 능한 기업 사냥꾼’이라고 폄하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기회주의자’라고 깎아 내린다. 칼은 델의 특별위원회에 자신이 발행주식의 최대 25%까지 인수할지 모른다고 통보해 왔다. 델을 그대로 상장기업에 남겨두라는 압박이었다. 나중에는 주당 15달러에 58% 지분을 인수할 의사가 있으며, 나머지는 상장 주식으로 그대로 둘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스톤 역시 델을 상장기업으로 그대로 두는 조건으로 회사 전체 지분을 주당 14.25달러에 현금 또는 일부 주식으로 매입할 뜻을 내비쳤다. 칼은 블랙스톤과 힘을 합칠 수 있다는 등 특유의 언론 플레이로 압박했다. 칼은 델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은 욕심 많은 해적이 아니고, 주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외로운 십자군처럼 보이도록’ 포장했다. 칼은 사우스이스턴과 연합해 델을 회사에서 퇴출시킬 원대한 계획을 짜는 것 같았다. 실제로 칼과 사우스이스턴은 주주들에게 주당 12달러의 현금이나 추가 주식을 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총회에서 자신들이 지명할 이사들의 명단을 공개할 의도를 보였다. 

 

* 칼 아이칸과의 갑작스런 담판 - 델은 칼이 회사를 인수해 키우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수단으로 압박해 델 측의 인수 제안 가격을 높여 자신을 더 부자로 만들려는 생각 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진위를 알고 싶었던 델은 어느 날 칼에게 전화를 해 칼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저녁 약속을 잡게 된다. 칼은 자신이 프린스턴에 합격해 학비의 절반을 포커 게임에서 이겨 충당했으며, 철학을 전공했다가 뉴욕대 의대를 2년 다니다 군에 입대해 25세 때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했다는 개인사를 털어 놓았다. 델은 단도직입적으로 칼에게 회사를 통제할 계획이 있는 지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한다. 대신 주당 14달러가 적당할 것이란 얘기만 들었다. 델은 “당신이 회사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쏘아 부쳤다. 그날 만남에서 델은 칼이 회사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었다. 만남 이틀 후 델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주주들에게 델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이후에도 칼은 주당 14달러에 주식을 인수하기 위해 52억 달러의 자금을 모으려 투자은행과 협력할 것이라는 등의 언론 플레이를 지속했다. 하지만 델과 특별위원회의 비밀 공모설을 걸어 그가 제기한 소송이 기각되면서 칼은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 ISS와의 담판 ‘게이더스버그 전투’ - 델은 메릴랜드주 게이더스버그에서 유력 의결권 자문기구인 ISS 경영진을 만나 설득했다. 자신이 회사 설립 이후 줄곳 회사 발전 방향을 제시해 왔으며, 점점 더 빨라지는 PC 산업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회사의 변화를 이끌어 왔으며, 칼이 델의 가치를 높게 주장하지만 이는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새 경영진도 허구라고 주장했다. 다행히 ISS는 델의 주주들에게 거래에 찬성하라고 권고했고, 또 다른 의결권 자문기구인 글래스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과반 이상의 승인은 미지수였다. 주총이 다가오면서 블랙록과 뱅가드그룹 등이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섰지만, 이번엔 ‘발행주식 중 소수 주주의 과반이 찬성해야 한다’는 특별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결국 주총은 연기되었다. 당시 찬성 주식은 5억 3900만, 반대 주식은 5억 4100만 주였다. 델이 승리하려면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주식 14억 7628만 8661주의 절반보다 1주 많은 7억 3800만 주 이상을 확보해야 했다. 1억 9900만 주가 더 필요했다. 델은 특별규정 수정을 특별위원회에 줄기차게 요청했다. 그리고 결국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주식을 반대표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주당 인수 가격을 13.75달러로 인상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날렸다.

 

*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트업 - 2013년 8월 2일 주총에 앞서 특별위원회는 주당 13.75달러라는 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투표하지 않는 주주들의 표는 반대와 같다는 기존의 투표 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대로는 결과가 뻔했다. 델은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거래에 투입하기로 한 주식의 가격을 낮춤으로써 기존 가격에 0.08 달러의 특별 추가배당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되면 주당 인수 가격이 13.83달러가 된다. 여기에 더해,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실버레이크는 위약금을 4억 5000만 달러가 아니라 1억 8000만 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특별위원회의 투표 규정을 바꿔달라고 맞섰다. 결국 특별위원회는 승인을 했고, 칼 아이칸은 델과 실버레이크를 고소했다. 칼은 그 와중에 사우스이스턴으로부터 추가로 400만 주를 사들여 개인 지분을 거의 9%까지 높였다. 웃돈을 주고 자기 주식을 사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결국 칼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거래가 성사되던 날에 즉시 보유주식을 팔아 수천만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이제 ‘델 코퍼레이션’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트업이 됐다.

 

* 엄청난 사업확장, 좌절, 그리고 변화와 혁신 - 델은 1991년에 5억 4600만 달러 매출로 포춘 500대 기업 목록에 490위로 입성했다. 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1993년 1월에는 매출이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하지만 빠른 성장 탓에 회사가 흔들렸다. 유동성과 수익성, 성장의 순서라야 했는데 오로지 성장, 성장 뿐이었다. 빠른 성장에 모든 것이 덮혀져 있었다. ‘성장통’은 1994년 1분기에 극명하게 나타났다. 수익이 48%나 하락하고 두 번째 증자도 포기해야 했다. 구형 노트북 수리와 새 모델의 폐기로 발생한 손실이 2000만 달러가 넘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엄청난 수익성을 자랑하는 서버 사업이 타깃이었다. 경쟁사인 컴팩도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수익으로 PC 적자를 메워가고 있었다. 이내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제치고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온라인 구매와 델의 통신 판매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1996년부터는 웹사이트에서 PC와 노트북을 팔아 하루 온라인 매출이 100만 달러에 달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델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 스티브 잡스와의 깊은 인연 - 1980년대와 1990년대 회사가 한창 성장할 때 델은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를 알게 됐다. 게이츠는 사업 파트너이자 협력자였다. MS가 델 컴퓨터의 운영체계(OS)를 만들었다. 잡스는 함께 사업하고 싶어하는 창업자 동료로 가까워 졌다. 잡스는 델의 PC에 자신의 운영체계를 사용하도록 델을 설득하기도 했다. 잡스와는 사업자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가끔 오랫동안 산책하며 일과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이였다. 언론들은 그런 둘을 숙적으로 몰아갔다. 1997년 가을에 애플이 파산 직전까지 간 때가 일화 때문이다. 한 행사 사회자가 델에게 “당신이 애플의 CEO라면 무얼 할 것인가”라고 물었고 델은 “회사를 청산하고 주주들에게 돈을 나워줄 것”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거두절미 “델이 애플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달되면서 난처한 상황이 만들어 졌다. 화가 날 법 했지만 잡스는 델에게 이 메일로 “CEO는 품위가 있어야 해요. 그게 당신 견해가 아니란 걸 알아요”라고 점잖게 꾸짖었다. 잡스는 이후 한 행사에서 커다란 델의 사진을 거대한 과녁과 오버랩하면서 “기다려 친구야”라고 유쾌하게 받아 쳤다.

 

* 사상최대 규모의 ‘프로젝트 에메랄드’ - 2013년 10월 30일 비공개기업으로 전환한 이후 델은 과거보다 더 빠르고 기민해 졌다. 가장 효율적인 시점에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실행할 수 있었다. 매 분기마다 점유율을 높여갔고 더 빠르게 채무를 갚아 나갔다. PC와 스마트폰은 델의 말처럼 대체제가 아니었다. PC는 여러 이유로 가장 일하기 쉬운 도구였다. 하지만 델은 PC를 넘어서는 더 큰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소프트웨어 시장이었다. 총 수익이 15~20%인 PC와 달리, 그 보다 훨씬 많은 소프트웨어가 들어가는 스토리지 어레이의 수익은 60%에 달했다. 2000년대 말 델은 PC를 더 비싼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잠재적인 미끼상품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델은 실제로 델 테크놀로지스를 PC를 넘어서는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 EMC와의 역사적 합병 - 가상화 분야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가진 강소기업 VM웨어를 인수한 EMC와의 합병이 백미였다. 강력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데이터저장시스템을 가진 EMC와 델은 2001년 10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델로선 급성장하는 서버 사업에 EMC의 고성능 저장장치를 추가하는 것이었고, EMC로선 보다 많은 고객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강력한 유통 채널을 얻는 효과가 있었다. 여기에 VM웨어의 가상화 역량은 PC와 서버에서 스토리지, 네트워킹, 보안에 나아가 클라우드까지 확대됐다. 델과 조 투치 EMC 창업자와의 두터운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합병이었다. 당시 EMC의 시가총액은 590억 달러에 달했다. 60대 초반이던 조는 확실한 후계자만 있다면 물러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시스코시스템즈와 휴렛팩커드가 동시에 EMC를 탐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HP의 맥 휘트먼은 델보다 먼저 합병 얘기를 꺼냈고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 주식 맞교환 방식으로 추진되던 이 딜은 그러나 막판에 HP가 EMC보다 5% 더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바람에 깨져 버렸다. 덕분에 2015년 10월 12일 델과 EMC는 ‘델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 45억 달러 자본금의 델이 670억 달러 기업을 인수한 것이다. 채권 발행으로 엄청난 자금을 조달해야 했지만, 델의 서버 사업과 EMC의 스토리지 사업의 결합은 거대한 인프라를 만들어냈다. 2018년 1분기에 세계 서버시장에서 델은 50% 이상 매출 신장 속에 1위 HP를 제쳤다. 합병과 함께 따라온 VM웨어의 81% 지분은 ‘노다지’였다. 2018년 중반까지 1년 동안 81억 달러의 매출과 33억 달러의 잉여현금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 해 중반까지 합병을 완료하기 위해 떠안았던 부채의 상당 부분도 바로 상환됐다.

 

* ‘데이터 대폭발’을 준비하는 기업 - “우리는 델을 필수적인 IT 인프라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델 만의 독특한 시장 포지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이클 델은 이렇게 말했다. 조립 PC를 만들던 델이 이제는 IT 인프라 분야를 주도하는 기업이 된 것이다. 지금은 다시 공개기업으로 전환했지만, 비공개 기업 전환을 선언한 후 8년 동안 델의 지분가치는 625% 늘었고 기업 가치는 1000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2013년에 사망선고가 내려질 뻔 했던 그 회사가. 델은 델 테크롤로지스의 성장과 성공만큼 흥미로운 것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기술의 발전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빅 데이터 세계에서 캄브리아 시대의 대폭발’이라고 표현했다. 델은 “디지털의 미래는 함께 작동하는 클라우드의 집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상당한 자원을 클라우드 구축에 투입한다. 델은 40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기술은 불과 같다 생각한다.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 25억 달러를 기부하다 - 델이 아내인 수잔과 함께 만든 ‘마이클앤드수잔델재단’은 미국과 인도, 남아프리카의 도시빈곤 지역에서 교육과 건강,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개선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처음에는 델의 주식을 팔아 재단을 지원했으나 이제는 17억 달러 정도의 기금으로 투자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기술지원 프로젝트와 임팩트 투자로 늘어난 재단의 지출 금액도 19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델 부부는 이 재단에 25억 달러를 기부했다. 재단은 미국에서 델 장학금 프로그램을 만들어 저소득 중고생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델 영 리더스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매년 세계적으로 35만 명의 저소득층 대학생들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지원하는 게 일차 목표다. 인도 도시지역에서는 소액금융을 지원한다. 수백 만의 인도 가정들이 지원을 받았다. 재단은 매년 300만 저소득 가구의 재정적 안정성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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