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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 “지구는 둥글지만 더 이상 만날 ‘어린이’는 존재하지 않는 허탈함에 대하여!”

[人더컬처]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

입력 2022-11-07 18:00 | 신문게재 2022-11-0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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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사진제공=국립극단)

 

“천국 혹은 구원을 향해 가는 순례의 의미를 아예 1차원적으로, 반대로 인식해보고 싶었습니다. 구원이나 자기성찰 없는 여행길, 뭔가를 발견하거나 얻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공허)’ ‘믿을 것이 없음’이라는 상황을 겪으며 가는 모습을 상상했죠. 팬데믹 이후 인간의 모습이 그러한 것 같거든요.”

정진새 작·연출은 국립극단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공동제작한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11월 27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의 ‘거꾸로 걷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어 “인류가 거주하기 어려운 ‘춥고 건조한 곳’으로 간다는 설정을 더했다”며 “하지만 그곳에서도 또 다른 생명체들이 살고 있고 그 지역 또한 이미 인간이 거쳐간 곳”이라고 부연했다.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사진제공=국립극단)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제 인상은 종교적인 이유, 자기 성찰의 의미 등 어떤 걸 간절히 바라거나 자각하기 위한 걷기였어요. 그런 것들에 코로나 시기를 맞으면서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질문을 더했죠. ‘과연 구원, 종교, 신이란 있는 것인가’ ‘인간이 그간 쌓아온 믿음이나 문명이 과연 유의미한가’ 등 기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와는 좀 다르게 아예 거꾸로 가보자 했죠.”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기후 위기, 온라인의 시대를 배경으로 오호츠크 해상의 기후탐사선에서 근무하는 기후연구원 AA(에이에이), BB(비비)와 그들의 위성에 포착된, 산티아고 순례길의 반대방향인 극동 시베리아로 걷는 ‘그’의 여정을 따른다. 

극의 주인공이나 화자는 순례자가 아닌 그의 거꾸로 걷기를 지켜보는 이들인 이유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변화의 반영이기도 하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존의 연극은 ‘행동하는(ACT) 주체의 드라마’이자 역사발전, 인류문명의 구현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연극은 ‘지켜보기만 하는(WATCH) 관찰자의 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뭔가를 바꾸지는 못하고 변화에 개입할 수 없고 그저 그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상태가 바로 연극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죠. 그래서 연극의 주인공을 행동하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으로 설정했어요. 이들은 무기력한 ‘신’ 혹은 무능한 ‘인간’ 존재를 상징하기도 하죠.”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거꾸로 걸으며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그’, 그들을 좇으면서 다양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그의 여정을 바탕으로 ‘시베리아 순례길’이 온라인 게임에 생겨나기도 한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존재와 여정 속에서 근원적인 ‘존재론’이 불쑥거리기도 한다. 

[국립극단]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2022)_공연사진01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공연장면(사진제공=국립극단)

 

이는 정진새 작·연출이  불합리 속에서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부조리극의 대표작품인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 같은 풍경을 의도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고고와 디디가 고도(Godot)라는 존재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주 중요한 행동이죠. 그 중에 럭키와 포조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기다림의 어떤 해프닝을 강화하기도 해요. 결국 고도는 오지 않고 그곳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고고와 디디는 여전히 그곳에 멈춰서 기다리고 있죠. ‘고도를 기다리며’는 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후 어떤 유럽의 국경 사이 굉장히 황망한 공간에서 국적도, 가족도 모두 잃어버린 두 존재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막막함을 표현했어요.”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사진제공=국립극단)

이어 “더 이상 구원, 종교, 믿음,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 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고고와 디디 같은 존재가 기상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민 같은 고고와 디디가 황무지 같은 곳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고립된 기상 위성 관측선 안에서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포조와 럭키 같은 존재인 ‘그’와 반려견 등 완전한 일대일 대응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것들이 좀 파편화돼 상징 혹은 실제 존재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더불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요?”라고 직접적으로 묻는 등 부조리극 요소를 지닌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10개장에 걸쳐 50회 이상의 암전으로 ‘깜빡이는 세계’를 구현한다.

 

“깜빡임 효과를 통해 보는 사람을 굉장히 피로하게 하기도 하고 또 그 전후 이어짐을 강제로 중단시키기도 하면서 깜빡이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어요. 더불어 선명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은 흐릿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요. GPS나 레이더에 나타나는 모양이 깜빡거림으로 표현됐죠. 분명 거기 어떤 존재가 있다는 의미지만 과연 거기 있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가 맞을까 등 질문이 주는 이미지이기도 하죠.”

같은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BB는 ‘살려고 가는 줄 알았다’, AA는 ‘죽으려고 가는 줄 알았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와 동행하는 반려동물이 고양이인 줄 알았지만 개였다. 극과 극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잘못된 정보를 깨닫는 모습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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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사진제공=국립극단)

 

“오직 말로 상황을 이끌어 가야하기에 극과 극을 오가는 대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당사자 존재를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 혹은 유저들이 제각기 ‘그’를 상상하며 내뱉는 말이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말 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상태를 정확히 증언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없다’ 정도 밖에 없다고 느꼈죠.“

 

코로나 이후의 기후변화, 온라인의 시대를 배경으로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엔딩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는 다른, 디스토피아적인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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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정진새 작·연출(사진제공=국립극단)

“원래 대본과는 다른”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엔딩에 대해 정진새 작·연출은 “어떤 의미에서 제가 광주라는 공간을 시베리아로 생각하기도 했다. 빛을 품고 있는 고을이지만 그 이면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시베리아라는 공간으로 대체했고 희망적으로 마무리했다”고 털어놓았다.

 

“광주 공연의 엔딩은 실제인지 가상인지 모호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구조 헬기 소리가 들려요. 광주 시민들께 헬기 소리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헬기 소리로 변환시켰죠. 가상세계를 다루는 연극에서 그런 기억들을 좀 다른 것으로 바꿔보고 싶었어요.”

극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BB의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라는 동요 가사를 차용한 대사 역시 의미심장하다. ‘지구는 둥그니까’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과 그 정반대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만나게 되는 걸까. 결국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게 아닌가. 

 

이처럼 다양한 질문들을 떠올리고 사고하게 하는 BB의 반복되는 대사를 통해 정진새 작·연출은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결론이 있기 보다는) 순환하고 되돌아온다, 결국엔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다르게 ‘어린이’ 즉 ‘새로운 생명들’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예요. 그래서 그 동요의 의미를 곱씹는 차원에서 사용했습니다. 이제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으나 더 이상 만나게 될 어린이는 없다는 허탈함을 의도했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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