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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탐구생활] 중대재해 정책, 규제서 자율로…OECD 평균 맞출까

지난해 사고사망만인율 0.46…OECD 평균 0.29보다 높아
처벌중심 정책에도 사망자 늘자…‘자기규율 예방체계’ 전환
정책 공감대 형성…“제도 재탕·노동자 참여 비전 없어” 우려도

입력 2022-12-04 14:16 | 신문게재 2022-12-0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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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대아울렛에 붙여진 '중대재해 시
화재로 인해 8명의 인명 피해를 낸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에 대한 대전지방고용노동청장의 ‘중대재해 시 작업중지 명령서’가 현대프리미엄아울렛 건물 외벽에 붙어 있다.(연합)

 

정부가 중대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노사가 함께 위험요인을 진단하는 위험성평가를 토대로 안전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규제와 처벌에 중점을 둔 기존의 정책으로 중대재해를 줄이는데 한계가 명확한 만큼 주요 선진국의 중대재해 예방 체계를 참고해 ‘산업재해 후진국’에서 벗어나겠다는 복안이지만, 실효성에서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나라의 중대재해 사망자는 지난 2003년 1311명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 2013년 1090명으로 감소한 뒤 이듬해 992명을 기록, 처음으로 1000명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지난 2019년 855명으로 줄어들었지만, 2020년 882명으로 다소 증가한 뒤 2021년 828명으로 다소 줄었다.

근로자 1만명당 산재 사고사망자 수를 뜻하는 사고사망만인율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지만 정체기에 들어섰다. 지난 2003년 1.24에서 2019년 0.46으로 크게 줄었지만, 이후 답보상태를 보이며 지난해 0.43을 기록했다. 이는 OECD 평균인 0.29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로, 38개 회원국 가운데 34번째로 높은 수치다. 

 

05_중대재해_1

05_산재사망_2

정부는 그동안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 지난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과 올해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등을 통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부분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가운데, 중대재해처벌법은 사고 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 등을 형사처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중대재해 사망자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사망사고 483건이 발생, 510명의 노동자가 숨을 거뒀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492건·502명)에 비해 사망자가 8명 늘어난 것이다.

중대재해는 50인 미만 사업장, 건설·제조업, 하청에서 상당수 발생하고 있다. 기본 안전수칙으로 예방할 수 있는 추락, 끼임, 부딪힘 등의 사고도 중대재해 사고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브리핑하는 이정식 장관<YONHAP NO-3328>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


◇英·獨,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중대재해 선진국 올라…위험성평가 의무화

정부는 기업 자체적으로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시스템과 역량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영국과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규제와 처벌의 한계를 인식하고 중대재해 감축을 위해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구축, 사고사망만인율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것에 주목했다.

영국은 1972년 로벤스보고서를 통해 법과 규제만으로 중대재해 예방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전환했고, 1974년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한 뒤 5년만에 사고사망만인율을 30% 감소시켰다. 독일은 조합주의 문화와 업종별 협회를 중심으로 노사자치입법인 재해예방규칙을 만들었다. 이러한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바탕으로 한 영국의 사고사망만인율은 0.08(2018년 기준), 독일의 사고사망만인율은 0.07(2020년 기준)이다.

이에 노동부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서 밝힌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확립, 획기적인 감축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국제적으로 검증된 방법인 위험성평가 시스템을 기업의 산업안전보건 역량 시스템 향상에 핵심적인 툴로 격상시키겠다는 것”이라며 “노사가 쉽고 간편하게 위험성평가 전반의 모든 과정에서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해 2026년까지 사망사고만인율을 OECD 평균인 0.29까지 낮추겠다”고 밝혔다.

위험성평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특성에 맞는 자체규범을 마련하고 유해·위험요인을 파악, 안전수칙 개선대책을 수립하는 것으로 이번 로드맵의 핵심 수단이다. 재발방지 중심으로 운영해 2025년까지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단계적으로 의무화한다.

노동부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고 있다. 종합적인 위험성이 낮게 측정돼 추가적인 조치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경미한 끼임 사고가 발생하던 기계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한다. 이 경우 안전관리자, 관리감독자, 근로자대표 등이 합동으로 사고사례를 토대로 사업장 전반에 대한 유해요인을 파악한 뒤 해당 기계뿐만 아니라 비슷한 공정의 기계에 자동방호장치를 설치하는 것이다. 설치에 필요한 금액 일부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향후 사고 발생을 막는다.

민주노총, 중대재해 처벌 무력화 규탄 결의대회
민주노총이 지난 10월 26일 서울역 인근에서 중대재해 처벌 무력화 정부 규탄 결의대회 후 용산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연합)


◇‘위험성평가 강화’ 방향성은 공감하지만…“실효성 있나”

경영계에서는 추가적인 규제만 늘어났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위험성평가 의무화에 대해 “현행법의 합리적 개선 없이 위험성평가 의무화가 도입되면 기업에 대한 옥상옥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의 중복규제 정비, 자의적 법 집행 방지를 위한 명확한 기준 마련 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규제에 불과할 뿐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위험성평가가 완전히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2013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당시 위험성평가가 도입돼 시행됐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이행돼 오지 않았다. 2019년 조사에서 위험성평가를 실시한 기업은 66.2%에 불과했고, 근로자 참여도 낮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위험성평가 강화라는 방향성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현 방안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는 “방향은 좋지만 현재 입법화 된 법들에 대한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며 “실효성을 염두에 두고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데, 진정성 없이 제도개선에만 몰두한 듯 하다”고 우려했다.

또 “현재도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관리체제에 위험성평가가 포함돼 있다. 안전보건관리체제를 위반하면 과태료가 부과되는 만큼 위험성평가를 실시해야 하는데, 문제는 노동부가 처벌 할 수 있는 규정을 사실상 무력화 시켰다는 것”이라며 “2017년부터 노동부 지침을 통해 과태료가 부과되지 않았다. 위험성평가를 강제화하는 것은 좋은데, 기존에 있는 정책을 마치 새로운 것처럼 발표한 것은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스스로 무력화한 정책을 왜 다시 내놓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진정성을 보이려면 당시 과태료 부과를 막았던 사람을 찾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정책을 5년간 실시하지 않아 산업안전을 10년 후퇴시킨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서강훈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업안전보건본부 선임차장도 “위험성평가를 선택사항이 아닌 법적 의무사항으로 정해 작동하겠다고 하는 방향성을 맞는 듯 하다. 다만 노동자 참여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인 방향성과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현장에서 느끼기 어려운 방안으로 보일 가능성이 큰 만큼 되도록 노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관리감독자의 역할 강화를 단순히 가이드와 교육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 선임차장은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서도 “자율안전보건에만 시선이 가 있으니 노동자들이 실제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에 대한 내용은 빠졌다. 산재예방 5개년 계획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라며 “중대재해 예방 실효성 강화를 위해 중대재해처벌법 제재방식을 과징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는데, 법률체제상 부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지적했다.


세종=김성서 기자 biblekim@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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