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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사적복수 부르는 학폭처리시스템

입력 2023-03-07 14:07 | 신문게재 2023-03-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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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선 문화부장

“네 인생이 나 때문에 지옥이라고? 네 인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이었잖아…(중략)…넌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해. 내 덕분에 선생도 되고. 이 악물고 팔자 바꿀 동기 만들어준 게 죄야?”

 

10일 시즌2 공개를 앞두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중 ‘학교폭력’(이하 학폭) 가해자의 리더 격인 박연진(엄지연)이 이 반문과 더불어 복수에 나선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에게 일갈하는 “아니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내가 널 죽여 버리든 살려 버리든 내가 네 년을 상대할 고데기를 다시 찾을 거니까”는 어쩌면 현실이다.

교사를 비롯한 학교 내부인사들의 미온적 태도, 지지부진한 행정소송, 긴 소송 기간 동안 분리되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피해자 입장에서 학교폭력처리시스템은 무용지물에 가깝다. 실제로 교육부는 ‘4주 이내 심의 기간’을 지침으로 하지만 2022년 전국 학교폭력위원회에 접수된 심의 중 35%가 4주 이상 걸려 처리됐다. 그 가해자가 있는 집 자식이거나 성적이 뛰어나거나 권력자의 자녀라면 학폭처리시스템은 더욱 더뎌지곤 한다. 시스템이나 법적 절차를 밟기 보다 ‘사적 복수’에 나선 ‘더 글로리’에 열광하는 이유기도 하다.

학폭은 피해자에겐 어떤 노력으로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지만 가해자는 ‘더 글로리’ 연진처럼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그랬고 우승후보로 점쳐졌던 MBN ‘불타는 트롯맨’ 황영웅이 그랬으며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100’ 출연진들이 그랬다. 여행유튜버 곽튜브 역시 초중고 재학시절 학폭 피해자였지만 유명해진 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가해자의 연락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 변호사의 아들은 학폭으로 전학 처분을 받았지만 학폭처리시스템이 더뎌진 시기에 명문대에 입학했다. 정 변호사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돼고서야 진실은 드러나 부친의 ‘낙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학폭을 비롯해 데이트 폭력 등이 폭로된 출연진들을 ‘편집’조차 하지 않은 채 공개해 비난의 중심에 선 ‘피지컬100’ 제작진들은 결승전 재경기 조작 의혹이 불거지는 역풍을 맞았다. 

‘불타는 트롯맨’의 유력 우승후보로 결승까지 진출한 황영웅은 용서를 구하면서도 “부디 다시 얻은 노래하는 삶을 통해서 사회의 좋은 구성원이 되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허락해 달라”며 경연 잔류를 알렸고 팬들 역시 “진정한 사과”에 대한 찬사(?)와 “연예계에만 엄한 잣대”에 대한 억울함, “응원하겠다”는 약속을 표명해 학폭 문제에 대한 심각성 인식 부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적 문제로의 대두와 들끓는 여론에 “과거를 반성하고 변화하며 살아갈 기회”를 달라던 황영웅은 결국 하차했지만 추가 폭로가 이어지는가 하면 ‘우승자 내정 의혹 및 특혜’ 의혹으로 ‘불타는 트롯맨’ 제작진들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 입건 전 조사(내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팬덤의 일부는 맹목적인 지지, 피해자와 비난 여론에 대한 조롱, 오디션 참가자들에 대한 폄훼 등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쟤 입 너무 참새 같지 않아? 짹짹짹짹 꼴 보기 싫어.” 어린 시절 우연찮게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같은 반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었던 적이 있다고 털어놓은 누군가가 있었다. 본인이 아니라면 학폭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이날의 일의 파장은 꽤 커서 잊을만 하면 떠올라 입을 다물게 했다. 

그렇게 입에서 시작한 콤플렉스는 빙산의 일각과도 같아서 이후 짝짝이 눈, 너무 낮은 코, 검은 피부 등 한동안은 스스로의 단점 찾기에만 몰두하게 만들기도 했다. 너무 과장 아냐?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기는 꽤 오래도록 이어지며 주변인들로부터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어?”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어쩌면 학폭이라 정의하기도 어려운 일임에도 꽤 오래도록, 또렷하게 각인되는데 무차별적인 물리적, 정신적 폭력에 노출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의 상처는 어떨까.

“내가 메스를 망나니 칼로 쓴다고 하면 엄만 반대할 거야?”

‘더 글로리’에서 학폭 피해자 동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은 의사 주여정(이도현)처럼 학폭 피해자 자녀가 이렇게 묻는다면 엄마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유명인들의 의혹이 불거지고서야 언급되다 사라지는 문제가 아닌, 실효성을 담보하고 피해자가 ‘사적복수’를 꿈꾸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만한 학폭처리시스템 구축이 절실한 때다. 

허미선 문화부장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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