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달 박사 정동화(사진 왼쪽)와 라흐마니노프 박유덕.(사진제공=HJ컬쳐) |
“음악은 눈을 뜬 채로 꾸는 꿈이다.”
한없이 진지하지만도 않다. 그렇다고 마냥 장난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전통 클래식과 뮤지컬 넘버의 경계를 적절한 발걸음으로 오가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오세혁 연출은 말했다.
26일 서울 종로구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어느 고속도로 화장실에 적혀있던 문구를 인용한 오 연출은 “음악이 흐르는 순간 현실의 공기가 바뀌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공기와 시공간이 바뀌는 신기한 경험, 그 음악의 힘을 발휘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오 연출은 “철저하게 음악으로 말할 수 있는 순간에는 대사 아닌 음악으로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에서 (그 순간의 대사들을) 줄여나가는 작업이 핵심이었다”며 “음악이 1순위”라고 재차 강조했다.
고뇌하는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박유덕.(사진제공=HJ컬쳐) |
오세혁 연출의 분명한 전략대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넘버들 대부분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꾸렸다. ‘살리에르’에서 이미 한차례 정통 클래식을 뮤지컬 넘버로 옮겨오는 경험을 한 이진욱 음악감독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2, 3번을 바탕으로 변주한 넘버들은 인물들과 제법 잘 어우러진다.
대중과 평단의 혹평에 신경쇠약에 걸린 라흐마니노프 내면갈등을 담은 ‘교향곡’은 교향곡 1번·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을 접목했고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가 격하게 감정을 주고 받는 ‘열등감’은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으로 변주된다.
이에 대해 이진욱 음악감독은 “피아노 협주곡에 있는 모든 모티프들을 사용하고 싶었다. 몇날며칠을 라흐마니노프 음악만 듣다 우리 대본과 어울릴 수 있는 감정이 드는 부분들을 발견했다”며 “실제 라흐마니노프는 선율은 단순(호모포닉)하지만 받쳐주는 반주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 라흐마니노프의 감정이입을 위해 교향곡 1번과 피아노협주곡 2번에서 환희와 분노가 느껴지는 부분을 차용해 재구성했다. 엄연히 다른 곡인데 드라마 흐름으로 묶으니 묘한 감동을 줬다”고 설명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안재영과 달 박사 김경수.(사진제공=HJ컬쳐) |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드라마를 함께 생각하며 멜로디와 반주의 패턴들, 마디의 순서 등을 바꾸는, 클래식 음악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에 대해 이 감독은 “빈티지 가구 위에 어울리는 모던한 가구를 제작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더불어 이같은 작업에 충실한 넘버로 ‘내 마음 울리네’를 꼽았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는 사실을 듣고 협주곡 2번의 3악장 클라이막스 선율의 감동이 달에게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렵고 졸리다.’ 클래식이 평생 지고 가야할 ‘멍에’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발휘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넘버에 대해 라흐마니노프 역의 안재영은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곡을 넣었으면 좋았겠다”며 “2번 협주곡으로 만든 넘버로 집중된 지금이 좋다”고 털어놓았다.
라흐마니노프 음악 사랑으로 똘똘뭉친 배우들은 각자의 추천 넘버들을 전하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안재영과 달 박사 정동화는 이진욱 감독과 더불어 ‘내 마음 울리네’를 추천했다.
‘내 마음 울리네’를 추천 넘버로 꼽은 라흐마니노프 안재영.(사진제공=HJ컬쳐) |
안재영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3악장의 멜로디로 만든 달의 넘버다. (원곡이)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슬럼프를 극복하게 도와준 달 박사에게 헌정한 교향곡이니만큼 감정적으로도 많이 와닿는 것같다”고 이유를 밝혔다.
달 박사 역의 정동화도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동기와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선율이 아름답다”고 전했다.
이어 정동화는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로 변주된 ‘어린시절’을 또 다른 추천 넘버로 꼽았다. 달 박사와 라흐마니노프가 어린시절을 재현하는 넘버로 정동화에겐 “난생 처음으로 비올라로 연주한 곡”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다.
달 박사 역의 정동화는 ‘내 마음 울리네’와 처음으로 비올라 연주를 한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를 추천했다.(사진제공=HJ컬쳐) |
이 장면에서 달 박사 역의 배우들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친 엄격한 스승 니콜라이 쯔베레프 교수, 차이코스프키 등을 연기한다.
이에 대해 정동화는 “사실 처음에는 1인 다역을 하는 줄 몰랐다. 그런데 안했으면 아쉬울 뻔했다”며 “작품의 환기나 갈등요소가 되는 결정적인 두 인물을 하다보니 부담은 됐지만 즐겁다. 남은 공연기간 동안 더 깊이를 찾아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달 역의 김경수는 이 과정에 대해 “쯔베르프든 차이코프스키든 라흐마니노프를 이해하기 위한 달을 보여드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며 “쯔베르프와 차이코프스키 이야기는 달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라흐마니노프의 트라우마이자 달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쯔베르프의 열등감을 달의 열등감에 얹어서 표현하려 했다. 쯔베르프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차이코프스키를 사실 코믹하게 풀었는데 그 역시 달의 열등감에서 출발한 한편의 디스”라며 “극 중 다양한 역할을 해보는 것이 굉장히 즐거우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작업임을 깨달았다. 작건 크건 하나하나의 역할들이 정확한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하고 정말 세심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니콜라이 달 박사 역의 김경수.(사진제공=HJ컬쳐) |
김경수는 라흐마니노프의 독백이 끝난 후 부르는 ‘비가’를 추천 넘버로 꼽았다. 그는 “라흐마니노프가 유일하게 쓴 가곡”이라며 “라흐마니노프의 독백을 하나하나 잘 들어보면 그의 삶이 너무 불우하고 처절해 그의 고통이 더욱 와닿아 실제로 눈물이 난다. 그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기도 정리하기도 하고 여지를 두기도 하는 ‘비가’의 복잡한 감정의 선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라흐마니노프 역의 박유덕은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워낙 좋아하는데 허밍으로 바뀌어 소개된다”며 “우리 넘버 중에는 ‘나는 왜’가 정서에 잘 맞는다”고 밝혔다. ‘보칼리제’는 라흐마니노프가 스승의 무덤으로 가는 동선에서 허밍으로 처리된다. 이에 대해 이진욱 감독은 “우는 느낌의 걸음”이라고 부연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포스터.(사진제공=HJ컬쳐) |
라흐마니노프는 뮤지컬 ‘살리에르’, ‘빈센트 반 고흐’, ‘사랑은 비를 타고’, 연극 ‘액션스타 이성용’ 등의 박유덕과 연극 ‘보도지침’으로 주목받았고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여신님이 보고 계셔’, ‘아랑가’ 등에 출연했던 안재영이 더블캐스팅됐다.
최면학자였고 아마추어 비올리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달 박사는 뮤지컬 ‘난쟁이들’, ‘쓰릴미’, ‘위대한 캣츠비’, ‘바람직한 청소년’, 연극 ‘엠버터플라이’, ‘트루웨스트’ 등의 정동화와 ‘파리넬리’, ‘마리아 마리아’, ‘리틀잭’ 등의 김경수가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선율과 열일(열심히 일하는)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의 어울림이 돋보이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8월 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된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