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음악극 '적로', '도둑맞은 책' '1984'.(사진제공=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문화아이콘, 국립극단) |
공연계를 주름잡는 작가, 연출들의 작품들이 신고식을 치른 한주였다. 배삼식 작가와 최우정 음악감독의 음악극 ‘적로’(11월 3~24일 서울돈화문국악당 공연장)가 제작발표회를 열었고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문삼화 각색·연출작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1월 5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가 프레스콜을 진행했다.
이어 고선웅 연출과 장소영 음악감독의 ‘라빠르트망’(11월 5일까지 LG아트센터), 한태숙 연출·고연옥 작가의 ‘1984’(11월 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그리고 변정주 각색·연출의 ‘도둑맞은 책’(12월 3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소극장블루) 등도 기자들을 만났다.
◇음악극 ‘적로’ 무서웠던 대금거장 연기 “덧없음, 불멸의 원동력은 충실함”
음악극 ‘적로’에서 박종기를 연기할 안이호.(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
제목은 떨어지는 이슬(滴露), 악기에서 흘러나온 입김에 의한 물방울(笛露), 예술가의 혼이 서린 악기 끝 핏방울(赤露)이다.
16일 서울돈화문국악당 공연장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박종기 역의 안이호는 대금 산조의 창시자이자 ‘진도아리랑’을 연기하는 데 대해 “우선은 무서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대금 산조와 진도 아리랑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아직도 고전으로 남아서 연주되고 불리고 있다. 게다가 언제까지 갈지도 모를 사람이라 무서웠다”고 덧붙였다.
안이호는 고등학생이 돼서야 소리를 시작한 늦깍이 소리꾼으로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실험에 열정적인 아티스트다.
“배삼식 작가님께서 불멸의 소리로 필멸을 꿈꿨던 사람들이라고 하셔서 더 부담이 됐어요. 덧없음, 그것은 충실함이 바탕이 돼야하는 감정이죠. 덧없음, 불멸을 가슴에 남게 하는 원동력은 충실함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스스로에게 충실함을 요구하고 보여 주고자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스스로 덧없음을 느낀다면 박종기 선생을 잘 보여준 것이겠죠.”
음악극 ‘적로’(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
조선정악전습소 회원이자 이왕직아악부 간판스타였던 김계선 역의 정윤형은 대학에 재학 중인 젊은 소리꾼으로 2살부터 두각을 나타낸 국악 신동이다. 제43회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종기 선생은 잘 알고 있었는데 김계선 선생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대단한 분인데 인지도가 낮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잘 알려봐야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인 하윤주는 박종기와 김계선을 한 자리에 눌러 앉힌 허구의 인물 산월을 연기한다. 산월은 일제 침략으로 기생이 돼 고달픈 삶을 살아온 예인이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음악과 노래로 통하는 음악적 동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어요. 눈빛 하나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월의 마음을 이끌어내려고 노력 중이죠.”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문삼화 연출·이승주, “영미 희곡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작품이어서”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문삼화 연출.(사진제공=예술의전당) |
“영미 희곡이어서가 아니라 검증받은 작품이라 좋을 수밖에 없어요.”
1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린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프레스콜에서는 문삼화 연출과 브릭 역의 이승주에게 영미 희곡 작업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묻는 질문이 던져졌다. 이 질문에 문삼화 연출은 “영미 희곡이어서가 아니라 잘 쓰여진 희곡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저랑은 삶이 다르고 되게 힘든 작품들임에도 저라는 개인과 만나지는 작품이었어요. 저에게는 영미희곡이라기보다는 잘 쓰여진 희곡이었죠. 이미 인정받아서 5, 60년을 살아남은 작품이잖아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1955년작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욕망과 허위, 소외와 황량함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빅대디(이재호)를 필두로 빅마마(이정미), 형식적인 부부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브릭(이승주)과 마가렛(우정원), 교양으로 무장하고 제 잇속에만 관심있는 구퍼(오민석)·메이(김지원) 부부로 구성된 폴리트家의 이야기다.
문삼화 연출은 번역에 방점을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번역극은 드라마나 희곡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며 “무대에서는 구어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리해서 문어체가 나오면 드라마를 따라가기 힘들다. ‘원하지 않아요’가 아니라 ‘싫어! 안해!’로 표현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브릭 역의 이승주.(사진제공=예술의전당) |
“코가 좀 큰 거 같고요.”
영미희곡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 연달아 캐스팅되는 데 대해 우스갯소리로 말문을 연 이승주는 “잘 쓰여져서 좋은 작품이라 감사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사실 그런 갈망은 있어요. ‘철수’라고 불리고 싶은. 창작극이나 좋은 연극들이 끊임없이 나오면 좋겠어요.”
이어 이승주는 자신이 연기하는 브릭에 대해 “가면을 쓴 허위를 역겨워하면서도 사실은 누구보다 단단한 가면을 쓴 인물”이라며 “가면을 쓴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술이나 욕실로 도피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타당성, 정당성을 확립하면서 계속 도망가는 인물이죠.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스스로도 ‘진실되게 살아가지 못했구나’ 자기 본질, 자아와 마주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고 있어요. 브릭으로서 제가 생각하는 허위, 진실에 집중하기 보다는 대사 하나하나, 신 하나하나에 집중해 발가벗은 욕망, 위선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연극 ‘도둑맞은 책’ 서동윤들 “대사량은 영락이가 더 많아요!”
연극 ‘도둑맞은 책’.(사진제공=문화아이콘) |
“대사량은 (조)영락이가 훨씬 많아요.” “대사량은 외우면 되니까요.”
18일 열린 연극 ‘도둑맞은 책’(12월 3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프레스콜에서 서동윤 역의 이현철·이갑선은 “대사량이 많아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조)영락이 역할 셋이 너무 다 달라서 힘들었다기 보다 흥미롭고 재밌었어요. 아픔을 표현하거나 에너지를 써가며 대사를 해나가는 영락이가 재밌어요.”
이현철의 부연에 이갑선도 “매우 재밌습니다”라고 말을 보탰다.
‘도둑맞은 책’은 변정주 연출이 각색까지 책임진 작품으로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이갑선·이현철, 이하 가나다 순)과 그의 보조작가 조영락(이우종·이충주·이형훈)이 벌이는 심리극이다.
이현철·이갑선의 말에 조영락 역의 이충주는 “대사량이 정말 많다”며 “비슷한 단어들이 많아서 그 단어를 정확하게 해주지 않으면 뜻이 달라져서 애를 먹었다”고 토로했다.
“2인 연극은 처음이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연출님과 선배들이 도와주셔서 재밌게 공연하고 있습니다.”
연극 ‘도둑맞은 책’ 출연진. 왼쪽부터 조영락 역의 이우종, 서동윤 이현철, 조영락 이형훈, 서동윤 이갑선, 조영락 이충주(사진제공=문화아이콘) |
이렇게 말한 이충주에 이어 이우종은 “대본을 봤을 때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했는데 대사를 외우다 보니 너무 재밌어 극에 빠지기 시작했다”며 “대화하면서 너무 재밌고 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털어놓았다.
조영락 캐릭터의 차별화에 대해 이형훈은 “대본을 봤을 때 영락이가 순수한 소년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걸 잘 표현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충주는 “(이형훈·이우종) 동생들과 (이현철·이갑선) 형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며 “1인 다역이어서 캐릭터의 간극을 벌리는 데 애를 많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가 심혈을 기울인 박처장은 영혼을 갈아넣어 연기하고 있어요. 자칫 극이 무거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중간중간 무겁게 흘러가지 않도록 유머코드를 넣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 “저의 빅브라더는 한태숙 연출입니다”
연극 ‘1984’ 프레스콜.(사진제공=국립극단) |
“저의 빅브라더는 한태숙 연출입니다.”
대중의 눈과 귀, 입을 막는 감시 시스템과 자유의 통제, 조작된 기억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꿈꾸는 윈스턴 스미스(이승헌)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1984’ 프레스콜에서 빅 브라더 오브라이언 역의 이문수는 “나에게 빅브라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어 “개인으로서는 제 아내, 이번 작품에서는 한태숙 연출”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캐릭터 해석에 대한 질문에도 “저는 분석력이 없는 배우”라며 “연출부에서 요구하고 지시하시는 쪽으로만 맹렬히 쫓아서 했을 뿐”이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연극 ‘1984’ 오브라이언 역의 이문수(왼쪽)과 윈스턴 이승헌.(사진제공=국립극단) |
같은 질문에 이승헌은 “나 자신”이라고 답했고 정새별은 “인식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답했다.
한태숙 연출은 “난독증을 느낄 정도의 혼란, 현실과 환상을 구분 짓지 않으면서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며 “무대의 추상화, 표현주의적 접근으로 윈스턴의 현실과 허상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진실과 모순에 이입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털어놓았다.
윈스턴 스미스 역의 이승헌은 캐스팅 과정에서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연희단거리패 대표배우로 ‘변두리극장’ ‘백석우화’ ‘벚꽃동산’ 등에 출연했고 ‘서푼짜리 오페라’를 연출하기도 했다.
“처음 ‘1984’ 제안을 받고 두번도 생각 않고 하겠습니다 했어요. 지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당연히 빅브라더 오브라이언 역을 하는 줄 알았죠. 외모도 그렇고 (가극 ‘약산아리랑’의) 노덕술처럼 싸늘하고 고문하는 건 정말 자신있었거든요. 그런데 윈스턴을 하라고 하셔서 좀 고사를 했어요. 자신이 없었거든요. 성향이나 비주얼이나 제가 그렇게 왜소하거나 델리케이트한 감성이 아닌데다 의식수준이 거기까지 못미친다고 판단했죠.”
이어 그는 윈스턴 스미스를 연기하면서 “가장 조심해야할 부분이 주장이나 선동이 아닌 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