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연출님이 가진 드라마에 대한 생각들, 가치관 등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요. 정말 연출 ‘선생님’이세요. 그래서 항상 같이 하고 싶어요.”
연극 ‘오이디푸스’(2월 2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는 박은석은 서재형 연출에 대해 ‘선생님’이라고 표현했다. 그와 서재형 연출의 인연은 2011년 ‘더 코러스-오이디푸스’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주홍글씨’ ‘왕세자 실종사건’ ‘외솔’을 거쳐 ‘오이디푸스’까지 이어졌다.
‘오이디푸스’는 황정민, 서재형 연출, 한아름 작가가 ‘리차드 3세’에 이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연극으로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해 차마 볼 수 없는 아이들을 내어놓을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신탁을 안고 태어난 오이디푸스(황정민)가 의지를 가지게 되는 순간에 이르는 과정을 따른다.
오이디푸스 역의 황정민을 비롯해 극을 이끄는 코러스장 박은석, 어머니이자 아내 이오카스테의 배해선, 진실을 알고 있는 코린토스 사자 남명렬, 오이디푸스의 신탁과 운명을 예언한 테레시아스 정은혜, 오이디푸스의 삼촌이자 처남 크레온 최수형 등이 원캐스트로 출연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박은석(사진제공=샘컴퍼니) |
“배우들이 연기만 할 수 있게끔 해주시죠. 연출님의 가치관, 생각들, 감각들은 물론 블로킹의 미학, 공연 양식의 미학이 너무 좋아요. 빈 무대를 좋아하시는데 그 안에서 찾아내는 공간에 대한 해석 등이 재밌어요.”
배우들에게 엄격하기로 정평이 난 서재형 연출에 대해 이렇게 전한 박은석은 “배우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분”이라고 말을 보탰다.
“연출님이 쓰는 말이 무대 언어처럼 상징적이고 은유의 말들이 많아요. 그래서 처음 만나면 연출님의 언어를 잘 이해 못하기도 하죠. 하지만 전 그게 너무 좋아서 연출님이랑 같이 하는 것 같아요.”
◇멋진 선배들! 순수한 황정민, 러블리 배해선, 친구 같은 남명렬
“이제 서른여섯, 저는 스스로를 아직 어린 배우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생각이 아직 어리고 부족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선배들을 보면서 ‘아직 멀었구나’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죠.”
스스로를 ‘아직 어린 배우’라는 박은석은 ‘오이디푸스’에서 함께 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역의 황정민, 아내이자 어머니 이오카스테 배해선, 코린토스의 사자 남명렬 등의 선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정적인 연기와 멋있는 가치관을 가진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솜씨를 부릴 수 있는 배우는 언제쯤 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 생각 자체가 틀렸더라고요. 선배님들도 똑같이 어려워하시거든요.”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황정민, 배해선, 남명렬 등 선배들을 보며 연기에 선후배는 없음을,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다는 박은석은 “멋진 배우가 되는 방법은 따로 없다는 걸 알았다”고 밝혔다.
“선배들을 보면 앞으로도 절대 쉬워지지 않겠구나, 계속 어렵겠구나 싶어요. 그저 선배들처럼 이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살면 되겠구나 해요.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작품을 통해 고민하고 철학적 생각들에 푹 빠져서 묵묵히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어 박은석은 “(황)정민 선배의 순수한 모습에 깜짝 깜짝 놀란다. 의도한 게 아니라 몸에 밴, 그냥 그렇게 사는 분”이라며 “정민 선배 뿐 아니라 (배)해선 선배, 남명렬 선생님 등도 관객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 나누고자하는 생각과 고민들이 있는 분들”이라고 덧붙였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 황정민(왼쪽)과 코린토스의 사자 남명렬(사진제공=샘컴퍼니) |
“정민 선배는 매일 피드백의 장을 만들어 함께 얘기해요. ‘너희는 어땠니’라고 물어봐 주시고 그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죠. 이 공연이 흐트러지지 않고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 작품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요. 그러다 보니 저희도 얘기하게 되고 선배도 스스로 놓친 부분에 대해 얘기하시고…너무 좋고 멋있어요.”
그런 황정민을 보며 “나도 저런 배우, 저런 선배가 돼야지”라고 다짐한다는 박은석은 “공연이 끝나면 후배들, 다른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고생했다’ ‘고생했다’ 하면서 다독이는 해선 선배는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다.
“남명렬 선생님은 집이 같은 방향이라 많은 대화를 하곤 하는데 또래랑 얘기하는 느낌을 받아요. 제 또래 친구들이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고 계시더라고요.”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그렇게 박은석은 자신 아버지와 동갑내기인 남명렬과 일은 물론 삶, 군대, 연애, 결혼, 연극·뮤지컬 시장의 현안 등에 대한 얘기까지 나누며 “너무 잘 통한다”고 느꼈단다.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신기했어요. 제가 저 나이가 됐을 때도 아들뻘 배우들과 저런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싶었죠. 그게 너무 멋있어요.”
◇차기작 ‘비클래스’ “여자 ‘비클래스’ 기대해주세요!”
“역할이 바뀌는 건 어렵죠. 하지만 바뀌지 않았어도 힘들었을 거예요. 보통 학원물 같지만 거기(비클래스 봉선 예술학원) 아이들이 쉽질 않거든요.”
‘오이디푸스’ 공연을 하면서 3월 8일 개막하는 연극 ‘비클래스’(6월 23일까지 대학로자유극장) 연습을 동시에 진행 중인 박은석은 김택상에서 이수현으로 역할을 바꿔 돌아오는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연극 ‘비클래스’는 배우이기도 한 오인하 작·연출작으로 일본에 본사들 둔 봉선 예술학원을 배경으로 한 학원물이다. 오직 능력과 조건만으로 A와 B로 클래스를 나누는 무한경쟁 시스템에 상처받은 작곡·보컬·피아노·현대무용 전공 학생들의 성장담이다.
“거기(비클래스 봉선 예술학원) 아이들이 하나씩 안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안보이는 데서도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어서 연기하기가 쉽질 않죠. 누구나 어렸을 때 그렇잖아요. 비겁했을 때가 있고 아팠을 때가 있고 스스로를 포기할 때가 있고…우리 모습들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힐링이 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죠.”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현실과 우정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김택상(박현수·이이림, 이하 가나다 순)과 재능이나 실력보다 조건이 우선시되는 학교 시스템에 반항심을 가진 이수현(박은석·윤석현), 밝은 외면에 상처투성이 속내를 감추고 있는 나카시마 치아키(김대현·조원석), 천재 음악가 아버지·천재 피아니스트 형으로 인해 강박증을 앓고 있는 이환(오영윤·최문석)은 어린 시절의 우리, 무한경쟁에 노출된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반영하고 있다.
“조금씩 바뀌는 부분들이 있어요. 대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드라마 진행상 극적으로 살릴 부분도 조금씩 바꾸고 있어요. 이번에 정말 좋은 건 여자 ‘비클래스’예요.”
연극 ‘비클래스’ 이수현으로 분하는 박은석(사진제공=스탠바이컴퍼니) |
“(오)인하가 여자 배우들이 ‘비클래스’를 보고 ‘남자 배우들은 참 좋겠다. 저렇게 열정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어서’라고 하는 말을 들었데요. 그래서 저희들끼리 ‘여자들은 하면 안되나’ 하다가 진행하게 됐죠. 텍스트는 똑같은데 성별 때문에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굉장히 재밌어요. 응원해주세요!”
◇‘오이디푸스’도, ‘비클래스’도 결국 작품의 단단함이 우선 “티켓값 하자!”
“‘오이디푸스’로는 일반 관객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반갑고 ‘비클래스’를 준비하면서는 굉장히 감사한 분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요.”
박은석은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비클래스’ 연습을 동시에 진행 중인 요즘을 “반갑고 설렌다”고 표현했다.
“결국 작품을 단단하게 잘 만들어야 제가 반갑고 설레는 만큼의 즐거움을 관객들께 드릴 수 있어요. 공연은 철저하게 협업이라는 걸 저는 믿어요. 그리고 매우 예민한 영적 행위죠. 배우 뿐 아니라 무대, 조명, 의상 등 무대 위와 뒤에서 다 같이 자기 역할을 잘해내야 하거든요. 그렇게 잘 만들어서 관객들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이는 ‘오이디푸스’의 서재형 연출·황정민·남명렬 등과 ‘비클래스’ 오인하 작·연출 그리고 박은석의 공연철학인 “티켓값 하자”와 맥을 같이 한다. 서재형 연출은 지난해 12월 11일 ‘오이디푸스’ 제작발표회에서 “한달 월급으로 가족들과 생활하는 평범한 부장인 제 친구의 마음으로 공연을 만든다”며 “어쩌다 가족들과 공연을 보러 오는 그 친구가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그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공연을 만든다”고 밝힌 바 있다.
“연습하면서 인하가 그래요. ‘나라도 이 돈 주고는 이거 안볼 것 같은데’라고. 그런 면에서 인하도 서재형 연출님이랑 정말 비슷해요. 정민 선배도, 남명렬 선생님도 그리고 저도 그래요. 그게 기준이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걸 고수하려는 고민과 노력들이 모여 작품이 단단해지거든요. 그런 고민과 노력,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가치관이 형성되는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아요.”
◇“나도 지나왔지, 그 삼거리” 검도선수, 국악기 연주자 그리고 배우 박은석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연극 ‘오이디푸스’ 대사 중 “나도 지나왔지, 그 삼거리”처럼 박은석은 유난히 예민하고 격정(?)적인 성장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검도선수로 수많은 메달과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군생활을 마친 스물다섯까지는 국악기 연주자로 무대에 올랐었다.
“학창시절엔 진짜 예민했고 방황도 많이 했어요. 운동을 할 때는 지방으로 전학을 가서 혼자 지냈어요. 운동 특기생이다 보니 아이들과 놀 시간도 없었고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많았죠. 화장실은 밖에 있고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지냈어요. 돈이 없어 늘 배고픈 상태에서 혼자 많이도 울었죠. 저에게 탈출구라고는 베게에 얼굴을 묻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거였어요.”
이어 “그때 노래가 는 것 같다”며 웃던 박은석은 “제 힘든 사정을 잘 아는 한살 차이 나는 선배가 순대를 사왔는데 입에 넣자마자 눈물이 너무 났다”며 외로움과 고난으로 방황하던 때를 떠올렸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먹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죠. 그런 기억이 너무 많아요. (비클래스의) 택상이처럼 도망쳤죠. 좀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학교도, 도장도 안가고 어느날은 잡혀가 엄청 두들겨 맞기도 하고…어쨌든 제가 극복해내질 못했어요.”
그렇게 방황을 시작한 그는 브레이크 댄스에 빠져 들었다. 춤판에서 1년 6개월을 보내고서야 박은석은 다시 운동할 마음을 먹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렇게 방황하는 사이 그의 키와 신체는 훌쩍 커버렸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박은석의 표현을 빌자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 인생을 놓고 지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지 않겠냐”던 외삼촌의 제안으로 방문한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국악기에 반해버렸다.
“사람들이 연습을 하는 데서 들리는 악기 소리가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그렇게 악기를 시작했는데 군 제대 후에 또 다시 고민이 시작됐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라는 고민으로 예민해진, 선택과 결정의 마지막 삼거리였어요.”
그렇게 시작된 “나는 왜 태어났지?” “왜 살아가지?” “똑같은 걸 계속 하려고 살아가나?” 등의 질문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 삼거리에서 박은석은 계시처럼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배우로 열심히 살자 결심을 하고서야 운동을 쉬면서 춤을 추러 다닐 때 계원예고 연극영화과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던 기억이 났어요. 느닷없이 배우를 하겠다고 하니 엄마도, 아버지도, 주변 사람들도 한걱정이었죠. 제가 좀 무식한 부분이 있어요. 해야겠다 꽂히면 불도저예요.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주춤주춤이 없고 무조건 해야했어요.”
그렇게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추계예술대학교를 그만두고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다시 입학했다. 그렇게 1년 후 오디션을 거쳐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초연 앙상블로 발탁되며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늘 사춘기처럼 “연말 창작집단 작품으로 만나요!”
연극 ‘오이디푸스’의 코러스장으로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 ‘비클래스’ 연습 중인 박은석(사진=강시열 작가) |
‘비클래스’ ‘모범생들’ 등 성숙한 외모에도 최근작에서 교복을 입는 일이 잦은 이유에 대해 박은석은 “아직도 사춘기인가 보다”며 껄껄거린다.
“서재형 연출님이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오이디푸스가 눈이 멀어 떠나고 테베에 비가 내리자 시민들이 환호하는 장면 등을 연출하시면서 ‘사람들은 그렇다. 무슨 일을 겪든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에 너무 동의가 됐어요.”
늘 사춘기처럼 고민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박은석은 “늘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은데 요즘 좀 바뀌었다”고 털어놓았다.
“생각은 정말 많이 하는데 생각이 없다고 해야할까요. 일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관객 입장에서 티켓값을 하는 거예요. 관객들이 작품을 본 걸 후회하지 않게요. 살면서는 현재에 충실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도 없어요. 배우를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수동적으로가 아닌 제 의지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죠.”
이에 박은석은 오인하 작·연출을 비롯해 배우이면서 ‘비클래스’의 음향디자인, ‘극적인 하룻밤’의 협력 연출 등으로 활약 중인 이이림, ‘트레이스유’ ‘이블데드’ 등의 김대현과 창작집단을 꾸린다.
“극단까지는 아니지만 생각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연말쯤에는 그 창작집단의 결과물을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