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굉장히 행복하게 하고 있어요. 작년엔 어떻게 버텼나 생각하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10월 8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의 빌리 로러로 출연 중인 에녹은 “마냥 행복하다”고 했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스타를 꿈꾸며 뉴욕에 온 코러스걸 페기 소여(오소연·전예지, 이하 관람배우 순)와 최고 연출가 줄리안 마쉬(이종혁·김석훈), 최고의 스타 도로시 브록(최정원·배해선)·빌리 로러(에녹·전재홍) 등이 뮤지컬 ‘프리티 레이디’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꿈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원캐스트로 탭 신을 책임지며 강제(?) 다이어트에 돌입했던 에녹은 “잠깐 쪘다가 지금은 3~4kg 정도 빠졌다. 작년이 고생해서 빠진 살이라면 올해는 운동해서 빠졌다”며 다시 한번 “지금은 행복하게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워낙 탭도 잘하는데다 세 번째 빌리 로러를 하는 전재홍 배우와 더블 캐스트다 보니 배울 것도 많고 완전 행복하죠. ‘브로드웨이 42번가’ 뿐 아니라 저랑 같은 역할을 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외성을 발견하고 시너지를 만들어요.”
지난해는 ‘브로드웨이 42번가’ 한국 공연 2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데다 에녹은 처음으로 탭을 배우며 연기와 노래, 안무를 익혀야 했다. 올해는 2013, 2014년에 이어 세 번째 빌리 로러를 연기하는 전재홍과 번갈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년에는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쉬는 날에는 늘 병원에 가 있었죠. 링거를 맞거나 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한약을 먹거나…안 아픈 곳이 없었거든요. 극단적으로 살이 갑자기 빠지니 심하게 탈모까지 왔죠. 뭘 해도 안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해놓고 나니 뿌듯했어요.”
탭 연습을 위해 30여명의 앙상블들과 동거동락하며 처음 무대에 오르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에녹은 동거동락했던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저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우리 친구들이 잘했죠. 주말 4회 공연이 끝나고 나면 2kg 이상씩 빠진대요. 춤추는 거 보면 완전 멋져요. 작년에는 이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초심을 떠올렸다면 올해는 새로운 것들을 파면서 부족함을 채우는 데서 오는 재미와 기쁨이 있죠.”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탭!“지난해는 뉴버전으로 새로 올리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외국 안무
·연출님과의 소통이 쉽지 않았어요. 저희끼리 트레이닝은 열심히 했었는데 안무가 늦어졌고 연출님과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많았거든요. 끊임없이 질문을 했는데도 좀 놓친 게 많아서 아쉬웠는데 올해는 권오한 안무가님이 합류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이미 안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트레이닝을 하다 보니 같은 춤도 다르게 표현됐고 손짓 하나 몸짓 하나 시선 하나를 세세히 파고 들며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에녹은 그 예로 마지막 즈음의 넘버 ‘42nd 스트리트’(42nd Street)를 예로 들었다.
“해군들이 시골처녀를 바라 보다 콜걸들을 보고 바닥을 보고 그래요. 뉴욕에 처음 온 시골처녀들도 해군들도 타임스퀘어를 바라보며 놀라고 설레는 몸짓이었더라고요. 바닥을 보는 건 시골엔 없는 맨홀 뚜껑을 보며 도시를 느끼는 거래요.”
이는 여러 인종, 갱스터, 돈 많은 부자, 콜걸, 시골처녀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한데 모인 곳이 뉴욕임을 보여주는 넘버이기도 하다. 이 신은 도둑이 총에 맞아 죽은 후 계단 탭 군무로 이어진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춤추는 도시가 뉴욕이라는 의미이고 계단은 또 하나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뜻이라는 걸 이번에야 알았어요.”
◇등장마다 신선하게! 실력 갖춘 브로드웨이 최고 스타지만 서툰 빌리 로러“빌리 로러는 자기 드라마가 없는 인물이에요. 쇼적인 요소를 책임지는 역할이죠. 지난해 연출님께서 페기 소여와 친구 같은 빌리를 비롯해 바람둥이, 일편단심 순정남, 느끼남 등 이전에 다양한 빌리가 있었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온전히 맡겨주셨어요.”
이에 에녹은 진중하고 멋있는 줄리안 마쉬와 결을 달리하는 빌리 로러를 만들었다. 에녹의 빌리 로러는 20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서투름과 풋풋함을 가진 인물이다.
“실력 있는 배우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지만 약간은 개구지기도 하고 어른인척 하는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느끼하고 멋있는 걸 흉내 내는 등 일련의 행동들이 나이에서 오는 서툰 부분이 있는 인물이죠.”
이를 위해 그는 당시 유명 배우들의 전형적인 헤어스타일, 제스처, 눈빛, 표정, 다소 과장된 연기 등을 파고 또 파며 빌리 로러를 완성했다.
“제임스 딘, 진 켈리의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 1952) 등의 영화를 봤어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부르는 영상도 엄청 찾아보고 오드리 햅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 여주인공(홀리)이 하는 톡톡 튀면서도 사랑스러운 연기를 참고했죠. 당시의 연극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연기나 톤, ‘아가씨와 건달들’(Guys And Dolls, 1955)의 배바지, 거꾸로 쓴 모자, 헤어스타일 등을 눈여겨 보고 녹여냈어요.”
올해 역시 같은 선상에서 빌리 로러를 표현하고 있지만 지난 시즌과는 달리 자연스러워졌고 담백해졌다.
“지난 시즌엔 연출님께서 만화적인 인물을 원하셨어요. 빌리 로러의 모든 장면들이 만화처럼 다소 과장되고 톤이 높아지곤 했죠.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했고 더러 불편한 부분들도 있었는데 이번 시즌에는 좀 달라졌어요. 현실적이고 담백하다고 해야할까…빌리 로러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배역들의 톤이 낮아졌고 한국화됐죠.”
◇화려하고 신나는 ‘쇼스토퍼’의 중심 빌리 로러“이 작품은 쇼뮤지컬이고 제가 맡은 역할은 쇼의 정점에 서는 인물이에요. 등장할 때마다 신선함을 주고 관객들이 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역할이죠.”
“무대에 오를 때면 늘 떨린다”는 에녹이 빌리 로러를 연기하는 데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쇼스토퍼’(Show Stopper, 뮤지컬 중 극의 흐름이나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기분전환용으로 삽입해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내는 노래나 장면)의 중심에서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화려하고 신나게, 제가 해야할 부분을 제대로 못하면 극의 재미나 쇼뮤지컬적인 매력이 반감돼 버리거든요. 그런 역할을 많이 해보질 못해 쉽지 않았어요.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 데이터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렇게 까지 해도 되나 싶고 시행착오가 많았죠.”
대본에 없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출과 협의를 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연습실에서는 물론 무대에서도 넘치지는 않되 신선하게 보일 수 있는 시도가 수도 없이 이어졌다. 쇼적인 요소를 살려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가장 힘이 된 이들은 역시 기라성같은 선배들이었다.
◇옹알이 하듯 선배를 보고 듣고 배우며“최정원, 이종혁, 전수경, 김석훈 등 선배들을 보면서 찾아간 게 굉장히 많아요. 선배들은 관객들을 대하는 능력 자체가 저랑은 완전 달라요. 그분들이 등장했을 때 관객들의 기대치도 다르죠. 그게 선배들이 활동하시면서 만들어온 내공이에요. 선배들의 경험과 연륜만큼 훌륭한 교재가 없죠. 배우가 실력을 늘리려면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배들의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어도 흉내라도 내면서 성장하게 되거든요. 아기들이 옹알이를 하면서 말을 배우듯 선배들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레 배우게 되죠.”
에녹의 전언에 따르면 쇼뮤지컬은 처음이라는 김석훈은 대사의 토씨 하나, 대본 중 등장하는 호텔의 역사 등까지 꼼꼼히 찾아보고 연구하는 배우다.
“줄리안 마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마쉬라는 성을 가졌으면 이탈리아 남자가 아닐까, 고집스럽고 다혈질이고 열정적이지 않을까, 빌리 로러는 영국출신일까…저희랑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만들어 가세요. 석훈 선배께는 대본 분석하는 걸 보고 배웠죠. (이)종혁 형님은 츤데레, 나쁜 남자로 바꾸신다더니 정말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지난해에는 종혁 형님만의 색깔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캐릭터를 좀더 정교화하신 거죠.”
이어 페기 소여로 새로 합류한 오소연과 전예지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페기”라며 “둘 다 너무 잘하는 배우인 건 확실하다”고 강조한다.
“(전)예지는 탭을 너무 잘해요. 표정도 주고받을 때의 느낌도 남다르죠. 무대 위에서 완전 살아 있어요. (오)소연이는 ‘보니앤클라이드’(2014)를 같이 했어요. 눈만 마주쳐도 맞아 들어가는 재미가 있죠. 워낙 포인트를 기가 막히게 잡는 배우예요. 본인이 어떻게 하면 관객 반응이 어떻겠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죠. 보기엔 여성스럽지만 안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만큼 엄청나요.”
이어 “무대 위에서 재밌는 건 그날 공연을 이끌어가는 배우가 매회 달라진다는 점”이라고 전한 에녹은 “이끌어가는 배우의 톤을 맞추다 보면 어느 날은 좀 더 드라마틱해지고 또 어떤 날은 밝아지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궁금해요. 저희 배우들이 느끼는 그 차이를 관객들이 느끼실까요?”
◇싱어송라이터로, 차기작으로 바빠질 2017년 “제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이제는 한번쯤 욕심내고 싶어요. 어떤 작품 하면 어떤 배우가 떠오르는 것처럼 제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좋은 선배들을 보면서 실력을 더 기르며 기다려야죠.“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공연하면서 유명 가수와의 앨범 발매를 위해 가사를 쓰고 있고 차기작도 정해졌다.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분야로의 확장도 타진 중이다.
“이전에도 뮤지컬만 하다가 연극을 하면서 연기적으로 많이 배웠어요. 영화든 드라마든 다양한 작업을 하다보면 배우고 달라질 부분이 분명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뮤지컬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면서 내공을 차곡차곡 쌓아야죠.”
자신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을 만날 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에녹의 남은 2017년은 그렇게 꽤 분주해질 모양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