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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천개의 파랑’ 박천휘 작곡가 “0과 1로 이뤄진 세상, 천천히 그리고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人더컬처]

입력 2024-05-06 18:30 | 신문게재 2024-05-0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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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천휘
‘천개의 파랑’ 작곡가 박천휘(사진제공=서울예술단)

 

“제가 제일 처음 만든 곡이 콜리의 노래였어요. 소설 속에서 콜리가 세상에 처음 눈을 뜨는 순간이죠. 콜리는 칩이 잘못 끼워져 학습기능이 있는, 다른 로봇들은 1000개 단어밖에 모르는데 얘는 그 이상을 알고 싶어하는 로봇이에요. 그런 콜리가 다른 로봇들과 같이 화물차를 타고 가다가 처음으로 하늘을 보고는 ‘찬란하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을 노래로 만든 넘버죠.”

‘천개의 파랑’(5월 12~26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의 박천휘 작곡가는 “넘버를 쓸 때 순서에 상관없이 제일 잘 보이는 것, 제일 정확하게 보이는 것부터 쓴다. 그러면 나머지 곡들도 블록처럼 끼워 맞춰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라며 “이 작품에서는 바로 이 장면이었다”고 밝혔다.

“이 곡을 제일 먼저 쓰면서 고민은 로봇이 노래를 한다는 자체였어요. 과연 어떤 목소리로 노래할 것인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과제였어요. 전자음악을 하긴 해야하는데 로봇처럼 딱딱한 노래나 디지털 음악, 사이버 음악이어야 하나…(노래를) 안할 수는 없는데 어느 정도로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로봇 콜리가 처음 본 세상, 0과 1 그리고 ‘도’ ‘레’

천개의 파랑 메인 포스터
‘천개의 파랑’ 포스터(사진제공=서울예술단)
“그렇게 고민하다가 생각난 게 0과 1이었어요. 이제 막 눈을 뜬 로봇인 콜리에게는 다 0과 1일 거예요. 그래서 음계의 시작점인 ‘도’ ‘레’로 음악을 만들어봐야겠다 했죠. 사실 ‘도’ ‘레’만은 아니에요. 도미, 도파, 레파 등 그 위에 ‘미’ ‘파’도 짚었으니 정확한 의미의 ‘도’와 ‘레’만은 아니죠. 사실은 굉장히 많은 것들이 있지만 딱 두 개 음만을 가지고 왔다갔다는 하는 것처럼 구현된달까요.”

이는 ‘뱀프’(Vamp)라는 작법으로 심플한 리듬 패턴을 반복해 멜로디 라인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박천휘 작곡가는 “그 부분이 노래 전체에 계속 나오며 지배한다”며 “반복되는 모티프가 지배하는 건데 ‘천개의 파랑’에서 0과 1이 모티프”라고 부연했다.

“모든 곡을 쓸 때의 제 스타일이에요. 맨 앞에 있는 단순한 2~4마디 정도의 반주를 만들고 그 위에서 모든 걸 해보죠. 모티프적인 작곡인데 그 모티프는 인물의 감정이 핵심입니다. 콜리가 노래를 하기 위한 감정의 핵심은 무엇일까 고민했죠. 얘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세상을 처음 봤어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 본 하늘도 같이 흔들렸을 거예요.”

그 흔들림과 그런 하늘을 보면서 느꼈을 콜리의 흥분된 상태 등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떠올린 모티프가 디지털의 이진법을 구성하는 숫자 0과 1이었다. 이 모티프는 박천휘 작곡가의 표현대로 “콜리의 노래 뿐 아니라 이후의 다른 곡에서도 모티프로 사용하는 식으로 인물들의 인과성을 만들고 서로를 연결시키는 일종의 퍼즐놀이”다.

“뮤지컬 음악은 결국 연결돼요. 반복을 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극적인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같은 음악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계산하는 게 뮤지컬 작곡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 같아요.”

뮤지컬 천개의 파랑
‘천개의 파랑’은 펜타곤 진호와 오마이걸 효정의 뮤지컬 데뷔작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연재 역의 서연정·효정, 콜리 진호·윤태호(사진제공=서울예술단)

 

‘천개의 파랑’ 뿐 아니라 그가 넘버를 꾸린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작은 아씨들’ ‘트레인스포팅’ 등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멜로디와 속도의 변화로 변주되는 넘버들의 핵심은 오롯이 인물의 감정, 상황의 변화다.

“이 작품은 콜리가 추락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추락으로 끝나요. 빨리 달려야만 하지만 다리가 아픈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추락하는 걸 선택하죠. 맨 마지막에 그 첫 추락이 또 나와요. ‘천개의 파랑’에서 보여주는 3번의 추락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보여줄까 고민이 많았어요. 반주 형태가 다를 뿐 멜로디는 같아요. 떨어지는 추락의 순간은 찰나잖아요. 그 찰나의 순간에 콜리는 하늘을 봐요. 처음처럼. 마지막으로 보는 것도 하늘이고 이 아이가 보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 주변의 음악을 만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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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파랑’ 박천휘 작곡가(사진제공=서울예술단)

◇영상과 퍼펫의 조화로 엮어낼 인간과 로봇, 동물의 연대

 

“제가 여태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위험한 작품인 걸 처음부터 알았어요. 제 의도들이 음악적 반복, 변주 등을 통해 얼마나 잘 표현될지 저도 기대 중입니다.”

박천휘 작곡가가 이렇게 밝힌 ‘천개의 파랑’은 천선란 작가의 동명소설을 서울예술단이 무대화한 작품이다.

 

펜타곤 진호와 오마이걸 효정의 뮤지컬 데뷔작으로 박천휘 작곡가를 비롯해 김태형 연출, 김한솔 작가, 김혜림 안무가,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고동욱 영상디자인, 이지형 퍼펫디자이너 등이 의기투합했다.

‘천개의 바랑’에서 퍼펫은 “로봇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박천휘 작곡가는 “콜리가 로봇처럼 보이는 순간 이 작품의 맛이 안 살 것”이라며 “SF장르로 정확하게 가버리는 순간 뮤지컬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SF와 뮤지컬은 상극인 장르거든요. 뮤지컬은 노래를 한다, 서정적인 정서를 표현한다는 약속이 있는 판타지인 반면 SF는 영화 등의 매체에서 실제적으로 구현되는 데 익숙한 장르거든요. 그래서 SF라는 장르에 집착하는 순간 노래를 하면 안되게 돼버려요. 그래서 퍼펫이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이 작품의 장르는 SF가 아닌 것 같아요.”

빠르게 기술들이 진보하는 미래, 경마장에도 사람들이 다칠까 혹은 무거워 한껏 달리지 못하는 말들이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휴머노이드 기수가 도입됐다. 더불어 화재 진압을 위해 인간대원들의 안전장비 보다는 로봇들에 더 많은 예산을 쏟아 붓는 시대를 배경으로 그 기술들과 미래가 배제하고 지나쳐버림으로서 희미해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천개의 파랑 메인 포스터
‘천개의 파랑’ 연습현장(사진제공=서울예술단)

 

한때는 최고 몸값을 자랑했지만 관절을 심하게 다쳐 빨리 달릴 수 없게 된 경주마 투데이, 누군가의 우연과 실수로 인지학습능력 칩이 장착돼 투데이의 고통이 느껴져 스스로 낙마하는 통에 하반신이 부서져 버린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윤태호·진호, 이하 가나다 순), 로봇 분야의 천재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사정으로 꿈을 접어야만 하는 연재(서연정·효정), 어릴 적 병으로 장애를 갖게 돼 휠체어를 탄 은혜(송문선), 낡은 방화복 차림으로 화재현장에 출동했다 죽음을 맞은 남편에 대한 애도를 끝없이 반복하는 은혜와 연재의 엄마 보경(김건혜)….

 

소외되고 상처입고 약해진 이들이 하반신이 부서진 채 버려진 콜리, 안락사를 당하기 직전의 투데이와 깊은 교감을 나누면서 연대하는 이야기다. 마냥 슬플지도 모를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지만 ‘천개의 파랑’은 때로는 쾌활하고 또 때로는 밝다. 미래의 이야기지만 차갑기 보다는 온기가 스며있기도 하다. 

 

천개의 파랑 메인 포스터
‘천개의 파랑’ 콜리 역의 진호(왼쪽)와 연재 효정(사진제공=서울예술단)

“로봇인 콜리의 음악이 처음에는 되게 전자음악처럼 시작해요. 그 아이가 알고 있는 1000개의 단어들을 뱉어내는 자체도 한음의 멜로디를 쓰죠. 반주는 화려하지만 얘가 부르는 노래는 처음엔 진짜 로봇처럼 시작해요. 그리곤 바로 되게 서정적인 노래가 나와요. 콜리가 말을 달리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변주되죠.”

 

투데이와 함께 하는 기쁨에 쓰이는 멜로디가 고통의 노래로도 변주되는 음악에 대해 “전자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를 모두 써서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지막 경주에서만큼은 가장 인간적인 합창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오히려 가장 아날로그스러운 사람의 목소리 합창이 위주가 된 그런 노래로 마지막 콜리와 투데이의 경주, 말에서 추락하는 콜리를 표현하고 있죠. 모든 음악이 세 번째 나오는 콜리의 추락, 그 한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느낌이에요. 그 한 순간의 꼭짓점을 위해 모든 음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순간 콜리의 희생에 약간 종교적인 느낌도 나는 것 같아요. 로봇이 희생을 한다는 게 되게 아이러니하잖아요.”

극 중에는 크리스마스 합창, 박천휘 작곡가의 표현처럼 “경건하고 웅장한 성가 혹은 크리스마스 음악 느낌을 살린” 장면도 등장한다. “보경이 사고를 당하는 장면에 쓰이는 이 음악은 무반주 느낌의 크리스마스 합창”으로 표현된다. 

 

“아이러니죠. 어떻게 보면 가장 성스러운 순간에 보경은 끔찍한 사고를 당해요. (생존율) 3%, 그 가능성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아이들을 얻게 되고 또 그 남자를 잃게 되고 콜리가 서로 미안해서 말하지 못하던 세 모녀의 연결고리가 되는 과정이 한 자리에서 일어나요.”


◇단 3%의 가능성,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만드는 희망

천개의 파랑 메인 포스터
‘천개의 파랑’ 연재 역의 연정(왼쪽)과 콜리 윤태호(사진제공=서울예술단)

 

“사실 ‘천개의 파랑’은 콜리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콜리라는 인물 자체가 로봇이라기보다는 그냥 백지장 혹은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이 얘기를 처음 보자마자 영화 ‘이티’(E. T)가 떠올랐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떤 매개체에 의해 가족이 변하는 이야기, 걔가 건네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희망 같은 그런 이야기요.”

최첨단 기술이 일상이 되고 로봇들이 등장하는, 인간마저도 인간답지 못한 세계에서 희망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천개의 파랑’ 음악에 대해 박천휘 작곡가는 “좀 다양한 속도의 음악을 만들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달리는 말, 바쁜 현대인들의 삶 등이 경마라는 걸로 알레고리(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화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래서 천천히 달리기, 우리는 천천히 달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 같아요.”

이 메시지는 막바지에 배치된 ‘천천히’에 담긴다. 박천휘 작곡가는 “음악적으로도 같은 테마가 빠르게, 느리게 속도를 달리하며 변화된다”고 전했다. 더불어 킬링넘버로는 콜리의 이름을 지어주는 ‘브로콜리’를,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는 1막 마지막 곡인 보경의 ‘3%의 가능성’을 꼽았다.

박천휘
‘천개의 파랑’ 작곡가 박천휘(사진제공=서울예술단)

“쇼 스토퍼(Show Stopper, 극 진행과 상관없이 화려하고 신나는 장면) 같은 ‘브로콜리’는 C-27이던 로봇이 왜 콜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넘버예요. ‘콜리’라는 이름이 반복되는, 아예 신나려고 작정하고 쓴 노래죠. 중간에 프로그래밍하면서 복잡한 음악도 나오고 재밌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 꼽은 ‘3%의 가능성’은 보경 역의 김건혜 서울예술단원이 “노래를 받자마자 다 외워졌다”면서도 “도무지 이어지질 않아서 저는 미쳐가고 있는데 노래는 듣기에 너무 편하고 드라마가 되게 많이 들어 있어서 한동안 멘붕에 빠져 있을 정도”라고 호소했던 곡이기도 하다.

“사실 노래라는 건 기본적으로 반복이에요. 모든 노래는 반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거든요. 반복을 안 하는 음악이라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보경의 이 노래를 만들면서는 좀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 이렇게 다 다른데 멜로디를 한번도 반복하지 않으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레치타티보(Recitativo) 같지 않고 노래 같이 들리면서도 후크가 되는 딱 한 부분만 반복을 쓰는 노래를 만들어 볼 수 있을까…그냥 또 도발적인 제 질문이었어요.”

그는 “멜로디를 일부러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서 조금씩 바꿨다”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뭔가 박자도 엇박이고 음정에도 약간 이상한 도약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곡을 쓰면서 많이도 울었어요. 3%의 가능성이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건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희망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사실 연재, 은혜, 보경 등이 투데이에게 주려고 하는 건 겨우 두주의 삶이에요. 근데 그 두주의 삶이 있기에 그 다음에 희망을 걸게 되는 것 같아요. 두주 후에 투데이가 살아날 수도 있잖아요. 작지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희망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천개의 파랑’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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