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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어두운 과거와 그 과거의 대면…연극 ‘빵야’ ‘미궁의 설계자’ ‘견고딕-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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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3-02-13 18:30 | 신문게재 2023-02-1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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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야 미궁의 설계자 견고딕걸
연극 ‘빵야’(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미궁迷宮의 설계자’ ‘견고딕-걸’(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주력 소총으로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만들어진 제조번호 ‘나나 나나 제로 니 제로’(77020)인 ‘99식 소총’, 남산자유센터·아르코예술극장·카이스트·국립청주박물관·경동교회·공간사옥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한국 현대 건축 1세대 건축가 김수근, 빈틈없고 단단한 볼드 빵빵한 견고딕체 아래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는 수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주관으로 공연이 한창인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중 연극 ‘빵야’(2월 2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미궁迷宮의 설계자’(2월 17~2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견고딕-걸’(2월 17~26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낡은 장총과 건축물 그리고 서체에 빗대 어두운 과거, 그 과거와의 대면 그리고 과거의 소비에 대해 다룬다.


◇우리 모두는 ‘나나 나나 제로 니 제로’ 혹은 나나일지도 모른다! 연극 ‘빵야’

연극 빵야
연극 ‘빵야’ 포스터(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빵야’는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이진희·정운선, 이하 관람배우·가나다 순)가 소품실 피아노 위, 세고비아 기타 옆에서 발견한 낡은 장총 빵야(하성광·문태유)의 이야기로 재기를 꿈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함익’ ‘그 개’ ‘썬샤인의 전사들’ ‘목란언니’ 등 김은성 작가가 99식 소총을 멘 일본군의 사진 한장을 보고 구상한 작품으로 ‘오펀스’ ‘비더슈탄트’ ‘더 헬멧’ ‘아몬드’ ‘리지’ ‘팬레터’ 등의 김태형 연출, ‘빨래’ ‘신과함께-이승 편’ ‘잃어버린 얼굴 1895’ ‘랭보’ 등의 민찬홍 음악감독 등이 함께 한다.

우리 집 대문이었고 마당의 펌프였고 부엌의 가마솥이었으며 아버지 삽, 어머니 호미, 교회 촛대, 신당의 쇳대, 간이역 기찻길, 시골길 자전거였던 쇳덩이들이 일제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강탈돼 99식 소총으로 만들어진 ‘빵야’의 이야기다.

그는 강제노역에 끌려나가 배고픔 등에 시달리는 소녀에 의해 낙인이 찍힌 후부터 일본에 충성하는 조선인, 강제 동원된 소년병, 6.25전쟁, 남북으로 나뉜 이념전쟁에 스러져 간 연인 등 누군가의 손에 들려 아프고 비극적인 현대사를 관통하는 과정을 따른다.

드라마 소품으로 쓰이다 그 쓰임새마저 사라져 먼지가 쌓여가던 중 나나를 만나 파란만장했던 행보를 털어놓는 빵야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자신으로 인해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죄책감 등에 시달린다.

드라마 소품실에서 편히 노후를 보내던 그를 기어이 찾아내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나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위안을 건네는 과정 그리고 나나로 인해 맞은, 오랜 꿈을 이루는 찬란한 엔딩은 빵야가 외치던 “모두 모두 총이 됐어, 너도 나도 총이 됐어, 나도 그렇게 총이 됐어”와 맥을 같이 한다.

연극 빵야
연극 ‘빵야’(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경오)

 

빵야가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아팠던 과거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 동원되거나 왜곡된 역사에 “이게 아니야”라고 외치며 마구잡이로 소비되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쏟아내듯 빠르게 지나가는 이 장면은 시대에 동원되고 짓밟힌 ‘나나 나나 제로 니 제로’ 빵야처럼,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다 또 다시 좌절을 경험하는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처럼 우리 모두가 나나이고 빵야임을 확인시킨다.

빵야가 ‘나나 나나 제로 니 제로’를 외칠 때마다 주인공 나나 그리고 나 스스로를 대입시키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주인공 이름이 ‘나나’라서 일어로 ‘나나’가 들어가는 어감의 제조번호를 쓴, 잔재미를 위한” 김은성 작가의 설정은 그런 의미에서 꽤 주효하다.


◇다른 시대, 다른 목적의 남영동 대공분실…‘미궁의 설계자’

안경모 연출
연극 ‘미궁의 설계자’ 연경모 연출(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미궁의 설계자’는 남산자유센터·아르코예술극장·카이스트·국립청주박물관·경동교회·공간사옥 등으로 유명한 김수근 건축가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다는 데 주목한다.

김민정 작가가 “실제로 2020년 12월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하면서 시작된” ‘미궁의 설계자’는 대공분실을 설계하던 신호의 1975년, 그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 경수의 1986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민주인권기념관이 될 그곳을 찾은 나은의 2020년 이야기다.

김민정 작가는 “김수근 건축가는 평소 존경했던 분이라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며 “저를 비롯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분들이 잘 모르고 있던 이 사실을, 이미 지나간 일이고 아픈 역사지만 잘 기록하기 위해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한 공간에서 세 개의 시간과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 작품에 대해 안경모 연출은 “대공분실 상세도면을 보면 그냥 건축적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고문의 최적화를 위한 구체적인 장치가 정교하게 마련돼 있다”며 “현대 건축 1세대로서 인간을 위한 한국적 공간을 설계하며 대단한 권위와 명예들을 가진 김수근 건축가가 어떻게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인간을 해악하는 공간을 설계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작품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할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다큐멘터리 감독 나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건물이 건축되던 1970년대, 고문 피해 사건들이 팽배하던 1980년대 그리고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새 단장을 앞둔 2020년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중첩된다.

안 연출은 “공간 전체 또는 시간 자체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무형의 상상의 세계가 어떻게 구체적인 고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무대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며 “인간에 대해 어떤 평가들을 내리면서 쉽게 재단하거나 단죄하기보다 인물들의 고민 하나하나에 더 깊게 다가가 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미궁의 설계자
연극 ‘미궁의 설계자’(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과거 행동들을 어떻게 반성하고 책임져야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등장인물 뿐 아니라 코러스를 활용해 이 세계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지켜보고 바라볼 것인가를 녹여내려 애썼죠.”

이어 “공간 건축은 여전히 (김수근 건축가의) 대공분실 설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공분실의 건축적 특성들이나 내용을 보면 아르코예술극장, 공간 사옥 건물과 정말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이들을 보면서 과거의 역사에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책임지고 반성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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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견고딕-걸’ 포스터(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식인들이 지식과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어떻게 폭력의 행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들을 하고자 합니다. 이는 대공분실 개별 사건에만 얽혀 있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 등 우리가 지나온 모든 역사의 문제들이 편편이 쌓인 축적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과오에 대해 어떻게 반성하고 책임질 것인가 질문이 필요한 시대, 대공분실과 똑같은 느낌들을 주는 아르코예술극장이라서 보다 섬뜩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볼드 빵빵한 견고딕 같은 수민이 함초롱바탕체가 될 때까지! ‘견고딕-걸’

 

‘빵야’와 ‘미궁의 설계자’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관통하며 과거에 대한 접근, 과오에 대한 책임과 반성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견고딕-걸’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풀어간다.

올블랙 패션과 메이크업 등으로 무장한 18세 소녀 수민(서지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사람을 지하철 철도로 밀고 스스로도 생을 마감한 수빈의 쌍둥이 언니다. 피의자 수빈까지 목숨을 끊음으로서 공소권이 소멸되면서 수민은 가해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남겨진 짐을 짊어지게 된다.

대본을 집필한 박지선 작가는 스스로를 감추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볼드 빵빵한 견고딕체와 같은 수민에 대해 “견고딕은 ‘견고하다’는 단어와 이어진, 빈틈없고 검은색이 굉장히 두텁고 단단해서 아무런 빛이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서체와 같은 이미지의 한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견고딕한 한 사람의 이야기와 그런 그가 과연 어떻게 함초롱바탕체가 됐는지의 과정을 음악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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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견고딕-걸’ 콘셉트 사진(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재훈 연출은 “수민은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사회의 온갖 비난에 세상이 못알아 보도록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성형 수술을 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상상을 하는 인물”이라며 “인물들이나 그들의 상황이 어떤 필터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감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라이브 음악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타악으로 공연 전체의 리듬감을 살리고 베이스 기타와 건반 등이 해설자인 동시에 어떤 정서를 담당하면서 공연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주제지만 다소 경쾌하게, 더불어 접근이 쉽게 풀어가면서 현실을 대면할 용기와 현실 응시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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