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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칼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입력 2021-05-02 14:49 | 신문게재 2021-05-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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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

추운 겨울 어느 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했고 더 이상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했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됐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임을 발견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의 우리가 딱 고슴도치 같은 처지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됐다. 은행이나 관공서 어딜 가나 투명 아크릴과 유리 칸막이가 설치돼 있고 대화는 단절됐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홀로 고립될까 두려워한다. 가까이하면 두렵고 멀리하면 외로운 고슴도치의 딜레마인 셈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얼어붙은 동토에 버려진 한 마리의 가시 돋친 고슴도치가 돼버렸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인간관계가 고슴도치 딜레마를 절감하는 나날들, 타율적이긴 하지만 고슴도치와 같은 삶이 그리 볼성사나운 것만도 아니다. 두리번거리거나 머뭇거릴 일이 사라졌으니 마음이 평화롭다. 억지로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노래방에 이끌려 18번곡을 반복해서 부를 일도 없다. 팔랑귀도 더 이상 쫑긋할 일이 없다. 계산적인 인간관계로 상처를 주거나 받을 필요도 없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인다. 베란다, 신발장, 부엌, 창고 속 책장까지 다 보인다. 보이지 않았던 아내의 흰머리와 어머니의 늘어난 주름살도 보인다.

 

고슴도치 딜레마에 빠진 우리는 자신의 ‘자기 경계’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자기 경계란 나를 드러내고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통로다. 자기 경계가 있어야 나와 타인이 완전히 같을 수 없음을 구분할 수 있고 자신의 심리적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자기 경계가 모호한 사람은 상대와 나를 구분하기가 어려워 상대의 의견이나 비판에 쉽게 휩쓸리게 된다. 평소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 잘못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자기 경계가 너무 뚜렷한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 취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남에게 강요하거나 상대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등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거리를 두고 관계를 멈추니 과거의 나의 모습이 보이고 미래 나의 모습도 그려진다.

 

고슴도치와 같은 삶은 그리 기죽을 일도 아니다. 좀 멋지게 생각하면 수행이다. “외로울 필요도 없다. 외로워야 사람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와 문자를 기다리지 말고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보자.” 정호승 시인을 훔쳐본다. 뭐 이런 시간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 지독한 연애도 끝이 있거늘 꽃을 꺾는다고 봄이 안 오겠는가.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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