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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10대에 당한 세뇌, 가스라이팅 "나치활동은 했지만 전범은 아니다?"… '히틀러의 어린 병사들'

[#OTT] 디즈니 플러스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어린 병사들', 탄생과정 파헤쳐

입력 2024-03-20 18:00 | 신문게재 2024-03-2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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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어린병사들
헤맑은 표정의 독일 병사들이 프랑스를 향해 진군 중이다.(사진제공=디즈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대표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오프닝 시퀀스는 처참하기 그지없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의 참혹함을 20분간 담아내는데 대사 한 마디 없이 해변에 내리지도 못하고 죽는 연합군들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퍼붓는 폭탄과 총알로 인해 단박에 목숨을 잃었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카메라는 손이 잘린 군인이 운 좋게 자신의 팔목을 들고 허망하게 서 있는 모습과 피로 물든 바닷가의 길고 긴 모래밭을 훑는다. 그렇게 작전 첫날 1만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해변을 점령하고도 한달 사이 12만명이 죽은 비극이었다.

디즈니 플러스의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어린병사들’은 노르망디를 지키고 있던 독일 병사 중 고작 17세 소년들로 이뤄진  무장친위대 12사단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나치 정권 아래서 성장했고 히틀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 뒤 입대한 청소년들이었다. 2년간의 훈련과 세뇌로 인해 광신도들이 됐던 그들은 첫 임무로 프랑스에 배치되면서 히틀러를 놀래키고 연합군마저 기함하게 만드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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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연합군 노장은 그들에게 “어린 야수들이었다”며 피도 눈물도 없었던 10대들의 모습을 증언했다.(사진제공=디즈니+)

 

전쟁 포로와 민간인은 죽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도 이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착하기 전까지 이들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히틀러가 세계패권을 쥐고 있던 당시 독일에서는 만으로 10세가 되면 인종 검사를 받았다. 대대로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혈통 증명서를 받은 남자아이들은 독일소년단에, 여자아이들은 독일소녀단에 4년 동안 활동해야 했다. 18세가 되면 나치당의 정식 당원이 될 수 있었는데 체력이 관건이었다. 낮에는 달리기와 수영, 담력 훈련을 하고 밤에는 나치에 대한 이론을 공부했다. 주말에는 야전 훈련과 모의 전쟁, 지도 읽는 법을 배웠다. 사실상 전시를 대비한 보충인력인 셈이다. 

연합군이 숨통을 죄어 오자 성인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고 있음을 히틀러는 감지했다. 이에 어린 10대들을 회유해 결국 2만명의 소년병을 모집해 ‘히틀러의 어린 병사들’을 완성한다.

극 중에는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지만 전범으로 불리는 것 만큼은 거부하는 12SS기갑사단 단원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때도 혈기왕성함에 기반한 ‘중 2병’은 있었던 모양이다. 엄격한 훈련과 상하관계에서 오는 모욕감과 정신 무장은 수많은 이탈자를 양산했다. 이에 히틀러와 군 수뇌부는 아예 방법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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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맞지 않는 과도한 훈련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등장할 정도로 무장친위대의 시작은 순조롭지 않았다. (사진제공=디즈니+)

 

친근한 형이자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존재로 교관들을 배치한, 후에 정식으로  ‘제12SS기갑사단’이라 이름 붙인 이 부대는 빠르게 성장했다. 부모와 고향을 떠나 외로움과 향수병에 시달린 어린 영혼들은 멘토의 등장에 환호했고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충성했다. 그리고 나이는 어렸지만 이들은 전쟁 내내 공포와 파괴의 씨앗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히틀러를 위해 죽는 건 당연하고 어른들보다 강한 공격성과 잔혹성을 지녀 연합국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을 성공한 뒤 하루 만에 근처 마을인 캉에 입성하는 계획을 세웠던 미국과 영국, 캐나다 군인들은 거의 한달이 지나서야 이 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후퇴하면서도 이들은 끝까지 발악(?)했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고 민가를 공격하는가 하면 연합군을 만났을 때는 끝까지 저항하며 히틀러의 이름을 외쳤다.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기울고 있음을 직감한 히틀러가 도박이라 생각했던 어린 병사들은 보란듯이 성공했다. 탱크 148대와 장갑차 330대에 나눠 탄 가장 어린 군인들은 프랑스 북부 아스크 마을에서 첫 살인을 경험한다. 

레지스탕스가 자신들을 공격하자 근처 마을로 가 15세부터 74세 사이의 남성들만 추려 학살한 것. 노르망디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맛을 본 이들은 25년 뒤  법정에서 “86명을 사살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거부 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어린 야수들은 죽기 직전까지 싸워야 한다는 서약을 목숨 걸고 지켰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친 병사들에게 수혈해야 한다”며 팔뚝에 혈액형 문신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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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서 입단한 사람도 많았지만 거짓과 회유, 나중에 직업이 주어진다는 이유로 전쟁터에 나간 소년들도 부지기수였다고. (사진제공=디즈니+)

 

팔뚝에 혈액형을 문신한 유일한 부대로 철수하면서도 농가를 불태우고 어린아이를 죽였다. 약 4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그들에게 “미쳐 날뛰는 살인병기는 잃을 것이 없었다. 이는 히틀러가 원한 것”이라는 자막을 달았다. 제대로 훈련된 병사보다 나치에 대한 세뇌로 무장한 10대들에게 제대로 당해서였을까. 승리한 연합군들은 살아남은 어린 병사들의 문신을 보고 포로에서 분리한 뒤 끝까지 추적해 법정에 세웠다. 

그 과정에서 항복했던 캐나다 연합군 포로 400명을 모두 총살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노인이 된 몸으로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망설이는 병사가 있었다면 동료들에 의해 가장 먼저 죽었을 것”이라며 당시의 광기를 회상했다. 나중에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들의 반응은 후회나 자책보다 “그럴리 없다”는 성토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의 엔딩은 단조롭지만 강렬하다. 혈기왕성하지만 그만큼 휘둘리기 십상인 10대를 향한 가스라이팅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진행중이다. 작금의 시대에 그것은 SNS가 될 수도, 유튜브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정치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키보드 워리어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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