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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효민·애민정신으로 쌓은 수원화성 5.7km 성곽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①수원

입력 2021-07-06 07:00 | 신문게재 2021-07-0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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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첫 시리즈로 나간 ‘근현대사 흔적들’에 이어 오늘부터 두 번째 시리즈로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을 게재합니다. 이 글은 남민 작가의 2020년 저서 <논어 여행> 중에서, 오늘날 우리 삶의 지혜가 담긴 우리의 역사 현장을 찾아 논어 속 명구와 함께 그 의미를 새기며 여행하는 기사용 콘텐츠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수원화성 화성행궁
수원화성 화성행궁 전경. 사진=남민

 

정조의 ‘사민이시’ 리더십 “백성 입장을 헤아려 일을 시켜라”

 

◇ 사민이시(使民以時)란?

 

‘子曰(자왈), 道千乘之國(도천승지국) 敬事而信(경사이신) 節用而愛人(절용이애인) 使民以時(사민이시)’

 

“공자께서 전차 1000대 규모의 나라인 제후국을 다스리려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하고, 씀씀이를 줄임으로써 백성을 아껴야 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적절한 시기를 가려서 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 백성을 진심으로 아꼈던 정조 

 

사도세자의 융릉
사도세자의 융릉. 사진=남민

 

정조는 공자의 ‘사민이시’란 가르침을 수원화성 축성 과정에서 그대로 실천했다. 공자는 군자의 네 가지 도(道) 가운데 하나로 “백성을 부릴 때는 올바른 방도로 해야 한다(其使民也義)”라고 했다. 백성을 부릴 때도 예(禮)로써 동원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나아가 “시키지 전에 자신이 먼저 하고 나서 시켜라”라고 했다. 그리고 무권(無倦), 즉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정조는 이런 공자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실천한 군왕이다. 그에게 수원화성 건설은 왕위의 정통성을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프로젝트였다. 왕위의 정통성 구축과 함께 자신이 건설하려던 이상향의 결정체였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사도세자의 복권을 금하는 유언을 엄하게 남긴 터라, 그 유언을 거스르지 않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을 회복하려면 자신이 아닌, 아들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자를 낳으면 조기에 양위해야 겠다는 구상까지 했다.

 

정조는 1789년에 지금의 청량리 인근인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수원으로 천장함으로써 그 작업의 시작을 알린다. 그때까지 아들이 없던 38세의 정조에게 이듬해 순조가 태어났고, 이어 5년 후 1794년에 수원화성 공사가 시작된다. 정조의 원대한 꿈은 10년 후 완공 시점인 1804년에 자신은 은퇴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에서 산다는 구상이었다.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팔달문. 사진=남민

 

그런 정조에게 시급한 개혁 과제가 먼저냐, 백성을 향한 사랑이 먼저냐 결정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유례 없는 무더위 속에서 수원화성 공사를 강행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10년을 예상했던 대역사라 한시가 급했지만 정조는 백성의 안전을 택했다. “불볕더위에 헐떡거리며 일할 백성들을 생각하니 어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느냐”며 특별히 더위 먹은 병을 치료할 척서단(滌暑丹) 4000정을 보내주며 구체적인 처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공사 첫해에 전국적으로 흉년까지 극심하자 “전에 없던 흉년을 만나 백성들 사정이 가을, 겨울에도 이렇게 황급한 데 내년 봄 사정은 알 만하다. 나는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하는 것이 현재 황정(荒政,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의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라며 백성들부터 챙겼다.

당시 원로대신이던 채제공과 재상들이 반대했지만 “성은 올해 쌓을 수 있고 내년에도 쌓을 수 있으며 10년까지 끌고 갈 수도 있지만, 백성들은 하루 굶기고 이틀 굶기어 한 달까지 참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뜻을 관철시켰다.

‘백성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때가 있다’는 것이 정조의 철학이었다. 모든 일은 백성의 이익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도 일이 안 풀리면 자신을 탓했다. 기상 이변조차도 하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덕분에 당초 10년을 계획했던 공사는 2년 9개월 만에 총 길이 5.7㎞의 오늘날 수원화성으로 완성되었다. 이 성 위에 세운 40여 개의 다양한 건축물은 우리나라 초기 근대 건축물의 꽃이다.


◇ 첨단 공법과 디자인이 어우러진 ‘종합예술품’ 수원화성

 

수원화성 장안문
수원화성 장안문. 사진=남민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새로운 도시의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다시 지었다. 화성이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이 있는 곳의 산 이름 화산(花山)의 ‘화(花)’를 역시 꽃을 뜻하는 ‘화(華)’로 고쳐, 화산과 현륭원이 하나임을 강조했다. 수원화성에도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이 있다. 동문인 창룡문(蒼龍門)과 서문 화서문(華西門), 남문 팔달문(八達門), 북문 장안문(長安門)이다. 모두 옹성을 갖춘 것이 특징인데,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고 공격력을 강화하는 성문 장치다. 한양도성과 구별되는 조선 후기 성벽의 진보된 축성 양식이다.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됐고 6·25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무너졌으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완벽한 기록물 덕분에 그대로 재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수원화성은 성곽을 따라 총 48개의 시설물이 건축되었는데 모두 모양과 양식이 다른 창의적인 건축물이라는 게 놀랍다. 하나의 거대한 종합 예술품이다.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면서 “아름다우면 적도 두려워한다”며 성곽의 건축물도 아름답게 짓게 했다.

보통 정문은 남쪽에 위치하지만 한양이 북쪽에 있어 오갈 때 출입해야 했으니 북문인 장안문이 그 역할을 했다. ‘장안(長安)’에는 임금의 만수무강 의미도 담겨 있다. 남쪽의 팔달문은 정조가 현륭원에 갈 때 드나들었던 문이다. 사대문 중 보물로 지정된 것은 팔달문(제402호)과 화서문(제403호)이다. 다른 문들이 훼손되고 피폭될 때 살아남은 온전한 문들이다. 화서문 현판 글씨는 당시 채제공이 썼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사진=남민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은 언덕 위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공식 명칭은 4개의 각루(角樓) 중 하나인 ‘동북각루’이다. 평상시에는 정자지만, 전시에는 포루로 전환된다. 성곽 밖 연못과 함께 미의 극치를 더한다. 두 개의 수문 중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은 무지개 모양을 한 7개의 홍예문으로 건축됐다. 문 앞 양쪽에 돌로 만든 이무기 상이 나란히 있는데, 이무기가 물을 마르지 않게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동장대 옆 성벽 위에 세워진 원통형 건축물은 동북공심돈으로, 벽에 난 포구(砲口)는 선진 기법을 과감히 수용한 사례다. 또 하나 특징적인 건축물은 봉돈(烽墩)이다. 정보를 주고받는 봉화 기능과 포를 쏠 수 있는 돈대 기능을 동시에 갖춘, 조선 역사상 유일한 형태의 군사 시설물이다. 이처럼 수원화성은 창의력을 발휘한 걸작품의 진열장 같은 곳이다. 정조는 수원을 상업 및 농업도시로 육성하면서 화성 외곽 동서남북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죽동에 있는 만석거(萬石渠)다. 대유둔(大有屯) 국영농장을 위한 농업용수를 확보해 ‘만 섬의 쌀’을 생산하려 만든 저수지였다. 이처럼 정조는 매사에 목표 지향적 좌표를 세웠다. 수원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진흥청(현재는 전북 전주시로 이전)이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현재는 화성시에 속해 있는 융건릉(隆健陵)과 용주사(龍珠寺)도 정조의 피와 땀의 흔적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며, 건릉은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융건릉 동쪽 용주사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한 후 능찰로 삼으려 세운 사찰이다. 단원 김홍도까지 보내 건설을 돕게 했다. 용주사는 시인 조지훈의 시 ‘승무’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 수원에서 가볼 만한 또 다른 곳

 

수원화성 봉돈
수원화성 봉돈. 사진=남민

 

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화성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성행궁 앞쪽 수원천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수원에는 해우재(解憂齋)라는 독특한 화장실 문화 전시관이 있다.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해우재는 사찰에서 말하는 화장실 ‘해우소’에서 따온 말로 ‘근심을 푸는 집’이다. 수원은 세계 화장실 문화 운동의 발상지다.

수원축구박물관은 2002년 6월 18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연장 후반 12분, 안정환의 극적인 헤딩 결승골로 한국이 2대 1로 승리한 감동을 그대로 전해줄 박물관이다. 1882년 한국 최초의 축구화, 1950~1970년대의 축구용품, 1960년대 한국 대표 선수단 명단, 박지성 기념 코너 등이 구비되어 있다.

영통구 하동에 있는 광교호수공원은 총 6.5km의 순환 보행로를 가진, 도심 속 호수 공원이다. 동쪽에 신대저수지, 서쪽에 원천저수지가 있다. ‘물의 도시’ 수원(水原)을 상징이라도 하듯 친 자연환경 속 다양한 수변 시설을 갖춰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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