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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조선 최고 엘리트, 콩나물 팔다 길에서 죽다.

입력 2017-01-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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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지난 23일 별세”
-1932년 4월 24일 동아일보-

부고기사가 실렸습니다. 서대문 밖 거리에서 콩나물을 팔던 27살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사연일까요?

190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최영숙은 이화학당을 졸업해 ‘독립운동’에 뜻을 둔 조선의 신여성이었습니다. 이 후 중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죠. 최영숙은 오직 나라를 위해 동양인 최초,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언론은 조선 최초 여성경제학사로 금의환향한 그녀를 앞 다투어 보도했습니다.

그녀는 조선에서 노동·여성운동을 위해 경제학을 실천하길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돌아오니 당장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당대 최고 엘리트였지만 어느 곳에도 취업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최영숙에게 자리를 줄 리 만무했습니다. 지식 뿐 아니라 국제 감각까지 갖춘 그녀를 ‘적’으로 생각했죠.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조선 최초 여성경제학사는 서대문 밖 큰 거리에서 콩나물을 팔기로 했습니다. 1920년대 말 찾아온 경제공황 그리고 일제강점기. 더욱 차별받았던 조선인. 그 안에서 특히 조선의 여성은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최영숙은 콩나물 장사를 하며 책을 썼습니다. 학생을 위한 교과서 ‘공민독본’입니다. 그녀는 나아질 리 없는 형편 속에서 밥을 굶어가며 책을 썼고 장사를 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상태였습니다.

영양실조, 임신 중독 등 많은 질병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실신했고,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실려가 낙태를 해야 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여성이었기 때문에, 최영숙은 모진 세월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여성의 신분’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남녀평등권이 실현된 그들의 생활….
외국 여성의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사회활동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최영숙-

“한국여성 고용 및 임금 격차,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현재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2016년 기준 53.7%로 남성보다 약 20%포인트 낮은 수준입니다. 월 평균 임금은 여성이 남성의 64% 수준입니다. 10여년째 제자리죠.

물론 임신으로 인한 퇴직, 육아는 엄마가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생물학적 여성일 경우 어쩔 수 없이 경력단절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때부터 현재까지 한 세기를 지나왔습니다. 지금, 얼마나 나아졌습니까?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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