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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혹시 당근이세요?" 코로나19시대 '중고의 맛'

[이희승 기자의 수확행] 2017년 이후 40배 성장한 중고마켓
N차신상,리셀족 등장하며 사회의 단면 보여줘

입력 2021-01-26 18:30 | 신문게재 2021-01-2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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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게티이미지)

 

어색한 눈맞춤이 오간다. 그쪽에서 “혹시…”라고 말하면 그제야 말문이 터지며 인사를 나눈다.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 자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선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중고거래앱 ‘당근마켓’을 통한 접선(?)의 자리다. 이미 전용앱에 설치된 채팅창을 통해 만날 장소와 연락처도 교환한 두 사람만의 암호는 “당근이세요?”다.


2020년 가장 주목받은 플랫폼으로 꼽히는 당근마켓은 1년 새 이용자가 1200만명까지 늘었다. 생활 곳곳에 스며들며 ‘지역생활 커뮤니티’라는 새 장을 연 당근 마켓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용자 한 사람 당 월 평균 방문회수는 24회 이상, 평균 체류 시간은 20분에 이른다. 쇼핑앱 중 최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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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에 기반한 중고거래 플랫폼.1년사이 3배가 성장하며 앱 시장에서도 파란을 일으켰다.(사진제공=당근마켓)

 

처음에는 지인들의 SNS에 올라오는 ‘득템’의 사진들이 시초였다.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는 커피잔을 단돈 3만원에 샀다는 후배, 거의 새거나 다름없어 보이는 아이의 신발을 무료나눔받았다는 랜선친구도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가뭄에 콩 나듯 만나는 홍보담당자조차 당근마켓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중고나라에서 사기거래를 당해본 경험자로서는 시큰둥했다. 하지만 물건을 올리고 파는 지역을 인증해야만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용자의 거주지 반경 6㎞ 이내에서만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는 당근마켓의 방침은 신의 한수였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같은 동네라면 사기도 좀 덜 칠 것 같은 일종의 (말도 안되는) 믿음이랄까.

때마침 인기급상승 중인 TV예능도 한 몫했다. ‘신박한 정리력’을 지닌 연예인이 연예인들의 집을 방문해 필요없는 물건을 기부하거나 버리고 바꿔주는 내용이었다. 내 집이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보고 있자면 마음이 후련했다. 몇주 반복해서 봤더니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였다. 비우지 않고는 채워지지도 않는 법. 당장 집안의 필요없는 짐들을 체크했다. 가장 만만한 건 아이들 장난감이었다.

앱을 다운로드하고 동네 인증을 한 뒤 중고로 산 스텝2 자동차를 만원에 올려두었다. 여러 각도의 사진과 상태, 구입가격을 올린 뒤 조회수를 보니 15분 만에 200명이 물건을 봤다. 관심품목으로 하트를 누른 사람도 8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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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쓰는 이 순간 ‘당근’이란 소리와 함께 거래가 완료됐다. 물건을 올린 지 17시간만이다. 제품을 설명할 때는 사실에 근거해 최대한 체험에 가까운 글을 올리면 반응이 좋다.(사진=이희승기자)

 

몇몇 엄마들은 “예약하겠다” “배달도 되나요?” “혹시 팔렸으면 줄서보겠다” 등 채팅창 문의가 쏟아졌다. 알고 보니 중고가의 3분의 1 가격이라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부피가 컸던지라 부부가 직접 차를 가지러 왔다. 설명과 같은지 보고는 그 자리에서 현금이 오갔다. 거기에 돈을 보태 아이들에게 저녁으로 치킨을 사주며 “너희가 안 타던 자동차가 이렇게 변신했다”고 하니 질문이 쏟아진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경제공부까지 더하니 일석이조다.

 

이참에 내 물건도 팔아보기로 했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목걸이와 귀고리, 한번도 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사진과 개런티카드를 올리고 구매일시를 적었다. 가격은 3만원. 의외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채팅으로 혹시 주석인지를 묻는 질문이 도착했다. 알레르기가 있어서 주석만 아니면 사겠다는 내용이었다. 

제품설명서에 백금도금이라고 써놓은 부분을 사진으로 전송했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찍었는데 거래 30분 전에 “사진에 찍힌 설명 중 ‘Brass’를 검색해 보니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이라며 “캔슬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쉬움은 들었지만 곧바로 다른 구매자가 나타났다. 가격이 너무 저렴해 의심이 간다고 했다. 직접 만나 상태를 보고싶다고 해서 가지고 나갔다.

왜 파는건지, 정말 실착용은 안 한건지를 묻고는 사무실이 근처니 바로 송금을 하겠다고 했다. 거절하려는 순간 급히 나오느라 현금을 안 가지고 나왔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킨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요즘 현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는 생각에 순순히 보내줬는데 30분이 지나도 입금은 감감무소식.

중고나라에서 잔뼈가 굵은 남편마저 “거래는 단호해야 하는거야. 번호를 바꾸거나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끝”이라며 거든다. 하지만 내가 만난 구매자의 매너온도(당근마켓은 거래자 사이에 평가를 남길 수 있다)는 37.9도. 재거래 희망자도 22명이나 된다. 믿고 기다리며 속이 타들어가기를 한 시간여. 마켓 특유의 명랑한 ‘당근’ 알람이 울린다. 일이 밀려 지금에야 입금했다는 채팅과 함께.

무료나눔으로 식탁과 안 쓰는 가방, 더플코트 등을 내놨을 때는 마음의 스크래치를 얻기도 했다. 팔기엔 낡았고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을 큰 맘먹고 ‘무료나눔’으로 올린 뒤 빛의 속도로 마감됐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겪었다. 15년 된 명품 가방의 경우 나도 몰랐던 안쪽 재봉 부분이 터져있었다고 뒤늦은 항의(?)를 받기도 했다. 

거래의 경험이 쌓일수록 대처법도 늘었다. 사실 분만 챗(당근에서의 줄임말) 달라는 공지, 에누리와 찔러보기, 변심과 반품 거절 등의 의사를 정중히 밝히는 법도 배웠다. 살 것처럼 하더니 하루 뒤에야 “남편이 반대해서 안되겠다”는 연락을 받은 직후였다. 만원짜리 어항 하나 사는데 같이 사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집안도 있는 법이다. 이쯤되면 중고앱 하나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좌절, 희망을 넘나들게 만드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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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장터는 PPL과 더불어 2021년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사진제공=번개장터)

 

코로나19는 중고거래의 시장에 기름을 부은 결정적 계기로 평가된다. 2017년에 비해 40배가 성장한 인터넷 중고마켓은 이제 ‘리셀’ ‘N차 신상’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사회 트렌드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2021년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이 두 단어를 선정했다.

이는 명품을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인식하는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의 등장이 한몫했다. 새 상품에 가까운 중고 한정판 상품을 비싸게 되파는 행위로 MZ세대는 새 제품을 많이 소유하기보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경험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리셀’을 재테크로 접근한다는 것.

‘N차 신상’은 여러 차례(N차) 거래되더라도 신상품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는 소비 트렌드를 표현한 말이다. 다른 사람이 쓰던 상품도 새것과 다름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현상으로 장기화되는 불황과 코로나19가 맞물린 결과물이다.

당근마켓은 단순히 중고거래를 넘어 지역 소상공인과 주민들을 연결하는 ‘내근처’,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이웃끼리 유용한 지역 정보와 일상을 나누는 ‘동네생활’을 통해 매월 1200만명의 이용자가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갑자기 닭강정을 먹고 싶다며 파는 곳을 묻거나 벼룩시장에 대한 알뜰 정보가 올라온다.

당근마켓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지난 1년간 당근마켓에 올라온 무료 나눔 게시글 수는 213만건에 달했다. 마스크를 구할 곳이 없어 어려웠던 시기에 마스크 무료 나눔을 경험한 임산부, 어릴 적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했던 할머니에게 통기타를 나눔한 사연 등 다양한 미담 사례들이 넘쳐난다.

시대의 단면을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다른 중고거래 앱인 번개장터에 따르면 지난 분기 ‘폐업’이라는 키워드로 400여개가 넘는 물품이 등록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되고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이 겹쳐 식당과 헬스클럽, 카페, 문방구 등에서 업소용 냉장고, 카페용 인테리어 용품, 새 것에 가까운 운동기구 등이 쏟아진 것. 불황, 취향 소비, 한정판, 가치소비, 펜데믹, 덕질, 레트로, 재테크, 로컬 등이 뭉쳐있는 작은 사회나 다름없다.

중고거래가 주는 중독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인천 송도에 사는 직장인 최석영(35)씨는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보니 필요한 것도, 계속 팔아야 할 것도 자꾸 보인다. 중고마켓을 한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거래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적게는 몇 천원, 많게는 5만원을 버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밝혔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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