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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칼럼] 시장경제질서 파멸의 끝에는 UBI와 MMT가 있다

입력 2019-12-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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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인제대 교수, 경제학)

전면 무상급식 반대에 자신의 직을 걸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신념에 많은 시민들이 동조하여 투표장으로 나갈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투표율은 개표 요건인 33.3%에 턱없이 모자라는 25.7%로, 그는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보수 몰락의 시발점이었고 복지의 ‘보편성’을 우리 곁에 짙게 스며들게 한 한국 근대사의 큰 사건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무상 급식의 포퓰리즘을 규탄하고 그것의 체제 파괴적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그들의 외침은 시민들을 투표장으로 이끄는 데 실패했다.

당시 대다수 서울 시민들이 투표장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전면 무상급식을 지지해서는 아닐 것이다. 자신들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작은 일이며 ‘좋은 일’을 하겠다는 데 굳이 나서서 반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관심이 보여준 작은 틈과 방심의 나비효과는 실로 무서운 실체로 변모해 갔다. 이제 ‘전면무상’ 급식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달고 항의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그러니 하고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전면무상’ 급식 주장자들의 논리가 오히려 정당하지 않았는가 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는 사이 좌파 정권이 들어섰고 과거에는 도저히 내놓고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던 ‘퍼주기 식’ 복지와 각종 지원금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가리지 않고 전 방위로 살포되고 있다. 공무원 수 확충과 더불어 거의 준(準) 배급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끝은 어디일까? 그 끝은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이하 UBI)’과 UBI를 작동케 하는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 이하 MMT)’일 것이다. UBI가 처음 우리 곁에 온 것은 2016년 6월 세계 최초로 UBI 제도 실시 여부를 묻는 스위스의 국민투표이다. 스위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일하는 사람이든지 일 안하는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18세 이상 모든 성인에게 대략 월 30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할 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는 76.7% 반대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마크 투웨인(Mark Twain)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조각상이라 했던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瀕死)의 사자상(Lowendenkmal)’이 말해주듯, 과거 용병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스위스 국민들에게 그저 주는 월 300만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UBI 옹호자들은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상당수 사람들이 실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UBI의 단초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의 실질적 배경에는 현재의 선별적 복지시스템에 의한 ‘선별받기’가 싫다는 것이다. UBI에서는 선별받기 위한 재산 조사도 없고 일할 의사 여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마음의 두근거림도 없으며 무엇보다 모두가 똑같은 소득을 받으니 자존감의 상처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전면무상’ 급식 논쟁 때 좌파 진영에서 나온 논리와 아주 유사하다. 그들의 논리는 가난한 집 학생 부잣집 학생 상관없이 모두가 무상으로 급식 혜택을 받아야, 가난한 집 학생들이 공짜 대상이라는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즉, 이를 위한 재원은 무엇으로 조달할 것인가? UBI 주창자들은 현재의 복지시스템을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원조달 문제는 없다고 한다. 현재의 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재원이 UBI 하에서도 마련될 수 있다면, UBI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볼만 하다. 그러나 핀란드의 UBI 실험에 관한 OECD 연구 결과는 UBI가 개인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킴을 분명히 보여준다. UBI가 일하지 않는 기회비용(노동으로부터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만족)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UBI에 의한 노동력공급의 감소는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그렇다면 UBI는 노동력 감소와 이로 인한 개인소득의 감소를 가져오게 하고 이것이 다시 세수 감소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UBI는 결국 이를 위한 재원을 없애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이것은 UBI가 그 스스로 자신의 시스템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을 의미한다.

UBI 주창자들은 UBI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시장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줌으로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독립을 약속해준다고도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제도인가! 좌파 진영은 이렇듯 물질적 평등 구현을 위해 인간 감성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가 “소를 키워야 한다.”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 결국 개인의 사회적 독립의 장밋빛 전망도 허망한 눈가림에 불과하다.

그래서 UBI가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돈을 찍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논리가 현대통화이론(MMT)이다. MMT는 UBI의 엔진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이끄는 UBI와의 쌍두마차이다. 현대통화이론,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용어인가? ‘현대’라는 말로부터 무언가 앞서가는 내용을 담은 듯하고 그럴 듯한 수학적 탈을 쓰고서 이론이라고 하니 논리적 완벽함을 갖춘 것처럼 비치게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진정한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한 끝없는 퍼붓기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1875년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라는 강력한 선동의 힘을 지닌 슬로건을 내걸었다.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주겠다는 UBI와 그것의 엔진 MMT는 마르크스 슬로건의 현대판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그 슬로건 후 50년이 채 안 되어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었고 그 후 전 세계의 1/3이 사회주의 국가 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100년이 넘는 그 거대한 실험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체제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감을 낳고 있다. 미국의 최근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43%(갤럽) 또는 10명 중 4명(해리스)이 이런저런 사회주의 형태가 좋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현 정권의 수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여전히 40% 이상이니 말이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1990년 동구권 체제의 붕괴는 그 체제 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 이념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해서가 아니다. 그 체제가 만든 현실이 어쩔 수 없어서 포기했을 뿐이다. 그것은 여건만 성숙된다면 언제든지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힘이 작동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 보편적 복지에 맛을 들여 놓은 상태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 어디쯤에서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진정 다시 ‘죽어봐야’ 죽음을 알 것인가? 시장경제질서를 파멸로 이끄는 파고를 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엄중하고 험난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배진영(인제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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