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뉴스 > 오피니언 > 시장경제칼럼

[시장경제칼럼] '꼰대 타파' 외치는 젊은이들', 그들은 누구인가

입력 2019-12-23 10:21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신중섭
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

“라테는 말이야(Latte is a horse).”를 즉시 이해하지 못하면 안타깝게도 ‘꼰대’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안타깝지는 않지만 나는 이 말을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상 참 좋아졌어.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 않아도, 나는 ‘꼰대’인가.

자신의 경험과 신념만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고, 상대와 타협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기성세대를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른다. 영국 BBC가 지난 9월, 우리말 ‘꼰대(Kkondae)’를 ‘오늘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꼰대’를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 정의했다. 한국말 ‘꼰대’가 국제적 지위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꼰대 타파’를 외치는 젊은이들이 정치 세력화되지 못한 현실은 안타깝다. 그들은 ‘꼰대’들의 위세에 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

기성세대를 ‘꼰대’로 규정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펴낸 <밀레니얼-Z세대 트렌드 2020>은 9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Z세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마이사이드. 내 안의 기준을 세우고 따르다. 둘째, 가취관. 가볍게 취향을 중심으로 모이다. 셋째, 소피커. 나의 소신을 거리낌 없이 말하다. 넷째, 팔로인. 검색 결과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따르다. 다섯째, 실감세대. 오감을 만족시키는 현실 같은 감각에 끌리다.

그들은 ‘다만추 세대’로 다양한 삶을 만나며, ‘나’와 같은 또는 다른 삶을 엿보면서 다양한 가능성에 도전한다. 본격적인 마이웨이 시대를 열어간다. 온라인에서 누구와도 서슴없이 친구가 된다. 먼저 행동해서 선한 변화를 끌어낸다. 참여할 수 있는 ‘판’을 열고 논다. 소유보다 공유로 소비의 밸런스를 맞춘다.

이미 오래 전에 디지털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세대에 주목하여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을 저술한 돈 탭스콧은 <디지털 네이티브>(2009)에서 넷세대 또는 N세대(2008년 현재 기준 11-31세)를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넷세대는 적극적인 창조자이며 협력자이고 조직자이면서 독자이자 작가이자 전략가다. 그들은 단순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묻고, 모색하고, 토론하고, 논의하고, 증명하고, 비판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넷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하여 더 똑똑하고, 빠르고, 더 많이 다양성을 포용한다. 그들은 정의와 당면한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일반적으로 학교나 직장, 커뮤니티에서 어떤 식으로든 시민활동에 참여한다. 탭스콧은 넷세대의 특징으로 8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그들은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를 중시한다. 둘째, 물건을 자신의 개성에 맞게 고쳐서 쓰는 걸 원한다. 셋째, 천부적으로 협업에 뛰어나다. 넷째, 강의가 아니라 대화를 즐긴다. 다섯째, 새로운 감시자다. 여섯째, 성실성을 중시한다. 일곱째, 학교와 직장에서도 즐겁게 생활하기를 바란다. 여덟째, 스피드는 일상적인 것이고, 혁신은 생활의 일부이다.

물론 넷세대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은 기성세대가 그들의 나이였을 때보다 더 멍청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에 중독되어 사교의 기술을 잃어버렸고, 운동이나 건강에 좋은 활동을 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 부끄러움이 없다. 세상에서 방향을 못 잡고 표류하고, 진로 선택을 두려워한다. 절도범이다. 온라인상에서 친구를 괴롭힌다. 폭력적이다. 노동윤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엉터리로 일한다. 나밖에 모르는 me-generation이다. 조금도 베풀 줄 모른다”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기성세대와 비교하여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미 그들은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핵심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사이드’나 ‘아웃사이드’가 아니라 내 안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따르는 ‘마이사이드’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원초적으로 외부의 간섭을 싫어한다. ‘마이사이드’에다 철학을 입히면 자유주의가 된다. ‘마이사이드’는 나를 나의 삶의 주권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ㆍ정치ㆍ경제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생활 태도로서 자유주의가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그들을 자유주의자로 인도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지만, 그런 계기와 동기 유발은 기성의 자유주의자의 몫이다.

 

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