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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워런 버핏의 투자철학> 캐럴 루미스

입력 2022-02-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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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매년 ‘가장 존경받는 기업’ 10위 이내에 이름을 올리는 ‘버그셔 헤서웨이’의 워런 버핏에 관한 책이다. 버핏이 매년 연례 주주총회에서 발표하는 ‘주주서신’을 중심으로 재편집했다. 저자는 <포춘>의 원로 기자이자 버크셔의 이사이며 1977년부터 버핏의 연례 주주편지 작성에 도움을 주는, 누구보다 버핏을 잘 아는 사람이다. 최근 10년 가량의 내용이나 행적이 빠져 있지만, 일관성 있는 버핏의 언행과 투자 패턴으로 볼 때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 버핏의 그런 일관성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 버크셔 헤서웨이와 워런 버핏 - 버핏은 대학 졸업 후 친구와 친지들로부터 10만 달러를 조달해 투자조합을 처음 만들었다. 1965년 버크셔 해서웨이 인수해 현재와 같은 지배구조를 구축했다. 당시만 해도 이 회사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일개 섬유 제조업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매년 ‘존경받는 기업’ 톱 10에 이름을 올리는 굴지의 기업이 되었다. 버크셔는 투자자들에게 좋은 기업을 권유해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을 모토로 한다. 그렇지만 회사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사람은 한번 부자가 되면 족하다”는 것일 정도로, 무리한 욕심을 추구하진 않는다. 버핏은 “투자란 IQ 160이 IQ 130을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수한 두뇌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두뇌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 버핏의 투자 원칙 - 버핏은 강력한 브랜드와 건강한 현금흐름을 가진 회사에 투자하는 전략을 늘 선호했다. 주식 선택의 귀재지만 그는 자신이 산 주식의 가치상승을 통해 회사 성장을 도모하기 보다는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전략을 더 선호한다. 자회사 경영진과 일하는 것을 즐기며 이를 통해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인수 가격이 합리적이면서 능력 있고 정직하며 신뢰할 수 있는 경영진이 운영하는 회사를 원한다. 그 비즈니스를 이해할 수 있고 큰 변화에 휩쓸리지 않을 회사를 좋아한다. 기술기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이유도 그 기업이 향후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버핏은 회사 경영진에 독립적인 경영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이 인수 때 했던 약속을 철저히 지킨다. “그냥 당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됩니다. 우리는 4할을 치는 타자에게 베팅 폼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버크셔가 인수한 기업의 누구도 새 소유주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 자신의 투자원칙을 깨고 투자한 BYD - 버크셔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말 중국 BYD의 주식에 총 2억 3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참모였던 찰리 멍거는 BYD가 대규모의 최첨단 시설, 수 천명의 엔지니어를 포함한 우수한 직원, 불량률이 최소화된 저비용 운용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고 추천했다. 잘 모르는 기업에는 절대 투자 않는다는 버핏의 투자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었지만, 버핏은 BYD의 경영자 완촨푸에 매료됐다. 멍거도 그가 토머스 에디슨의 기술적 문제 해결 능력과 잭 웰치의 업무 완수 능력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둘은 BYD가 전기자동차와 태양열발전 분야는 물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2000년에 이 회사는 세계 최대 휴대전화 배터리 제조업체 중 하나가 되었고 2003년에는 중국 국영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곧바로 중국 최대 자동차 판매회사로 발돋움했다. 다른 자동차 메이커들과 달리 자동차 부품을 직접 제조하는 남다른 경쟁력에 무독성 전해질 용액까지 개발하며 친환경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다졌다.

* 버핏의 ‘참스승’ 벤자민 그레이엄 - 버핏은 1950년 여름 벤저민 그레이엄이 강의하는 컬럼비아경영대학원에 입학해 사사를 받는다. 졸업 즈음에는 그레이엄의 투자회사 ‘그레이엄 뉴먼’에 무급으로라도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954년에 어렵게 입사하면서 그레이엄은 버핏의 평생 스승이 된다. 그레이엄의 핵심 신념 가운데 하나는, 어느 기업의 전체 가치와 그 작은 조각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잘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핵심 학설은 “저평가된 주식을 사고 시장에서 그 회사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장기적으로 보유하라”였다. 그를 평생의 멘토로 여긴 버핏은 벤자민이 쓴 ‘현명한 투자자’를 통해 들려준 ‘안전마진’이나 시장을 이용하는 방법 같은 이야기 덕분에 새로운 차원의 시야를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벤자민은 버핏에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라”고 가르쳤다.

* 가장 힘센 비즈니스맨 - 2000년대 초반에 버핏은 월마트의 리 스콧,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함께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세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듀크 대학 MBA 졸업생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버핏을 자기 아버지 다음으로 꼽았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의 비공식적인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진, 현존하는 사업가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실제로도 CEO들이 가장 자주 조언을 구하는 사업가다. 버핏은 “그들에게서 한 푼도 받을 일이 없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미 의회도 좌지우지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기업 배당금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는 정책이 어리석은 조치라고 비난한 후 법안의 최종 버전에서 감세율이 조정된 적도 있다.

* 투자자들에 대한 버핏의 조언 - 버핏은 “투자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이라며 “이런 고질적인 습관은 자동차 앞 유리를 통해 전방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백미러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투자자들의 전략에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는 경제의 앞날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주식시장의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의 평균 실적보다 더 좋은 성과를 달성하는 주식을 고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실 투자자들이 우려해야 할 점은, 자신이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두려워할 때 욕심을 부리고, 남들이 욕심을 부릴 때 두려워 하라”고 늘 강조했다.

* ‘투자 귀신’의 실수담 - 버핏은 주주서한을 통해 자신의 투자 실수담을 밝히곤 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실수로 버크셔 헤서웨이를 사들인 것을 꼽았다. 섬유제조업 전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낮은 인수가격’에 현혹되어 매입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담배꽁초 투자법’을 거론했다.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에도 대개 연기를 한 두 모금 빨아들일 만큼의 담배 가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버핏은 많은 실수 끝에 자신이 좋아하고 신뢰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그는 전망이 아무리 밝아도 경영자의 자질이 떨어지고 인성이 부족하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켰다. 이른바 ‘90대 1의 법칙’도 언급했다. 아무리 큰 수익을 추가로 거둬들일 기회가 있다고 해도, 어려움과 불명예가 닥쳐 곤경에 빠트리거나 파산할 수 있는 확률도 1%는 된다는 것이었다.

* 버핏의 ‘살로몬 구하기’ - 버핏은 1987년 살로몬 브라더스에 7억 달러를 투자해 이 회사 상환전환우선주를 사들였다. 몇년 후인 1991년 이 회사 유명 트레이더가 재무부 규정을 어기고 고객동의 없이 고객 계좌를 이용하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미국 국채 입찰 경매에 참가해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이 적발된다. 미국 재무부는 1991년 8월 18일 살로몬의 국제 경매입찰 금지를 발표했다. 살로몬의 파산을 의미하는 조치였다. 연방준비위원회가 관련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경영진은 이마저도 이사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결국 버핏이 구원투수로 등장한다. 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통보를 들은 버핏은 재무부를 움직였다. 살로몬이 파산하면 글로벌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자신이 직접 살로몬의 경영을 맡아 후속조치를 취할 것도 약속했다. 가까스로 살로몬은 사형선고를 면했고, 버핏은 약속대로 이사회 임시의장 겸 CEO를 맡아 벌금 2억 9000만 달러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 버핏의 ‘분신(分身)’ 찰리 멍거 - 저자는 “버크셔의 성공은 버핏과 그의 오랜 동료인 찰리 멍거의 합작품”이라고 단언한다. 버핏이 ‘좋은 회사’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버크셔의 부회장 찰리 멍거였다. 오마하 토박이로 미 육군 항공대를 나와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단순히 ‘저렴한 물건’에 집착하지 않았다. 제값을 주고라도 좋은 회사를 인수하는 편이 낫다고 버핏을 꾸준히 설득했다. 버핏 스스로 “찰리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지만, 나는 깨우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멍거 역시 “버핏의 두뇌는 매우 합리적인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작동된다”며 무한 신뢰를 보인다. 버핏은 평소에 “나를 늘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것은 동료들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멍거가 했던 말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말이라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 버핏 의장의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들 - 버핏은 연례 주주총회를 ‘자본주의자들을 위한 우드스톡 주말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1966년부터 버크셔 해서웨이의 연례 주주총회가 열릴 때마다 ‘주주들에게 보내는 의장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에서 자신의 성과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되 동료들의 실적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날 미국의 기업들이 가장 열망하는 글귀는 ‘당신의 진실한 벗 워런으로부터(Sincerely, Warren)’라고 한다. 바로 버핏의 편지다. 자기 회사의 회계 시스템을 칭찬하는 버핏의 편지를 받으면, 이를 훌륭한 관리에 대한 인증서로 생각한다. GE는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한 후 이런 편지를 받았고, ‘핵심 이익’이라는 측정 기준을 새로 내놓은 S&P도 같은 편지를 받았다. 뱅크윈, 아마존에도 같은 편지가 배달되었다. 버핏에게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흠집 없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칭송이 늘 뒤따른다.

* 버핏의 적들 - ‘오마하의 현인’이지만 버핏도 적들이 많다. 일단 실리콘밸리의 무리들은 그의 팬이 아니다. 그가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한 때문이다. 버핏이 늘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촉구하면서도 정작 버크셔에는 사외이사가 적다는 비판도 있다. 버핏이 미국가족계획협회에 기부한 사실을 아는 낙태 반대론자들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투자은행가들도 마찬가지다. 그가 2002년 주주서한에서 “파생상품은 대량 살상을 초래하는 금융 무기”라고 비판했으니 호의적일 리 없다. 물론 버핏도 나중에는 파생상품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다. 어느 해 버크셔의 주주총회에서 버핏을 이사로 선임하는 안에 반대 의견이 1만 6712표나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찬성표가 114만 816표로 압도적이었다.

* 무역적자 해결위해 ‘수입증명서’ 제안하다 - 미국의 무역적자가 매년 수천억 달러씩 증가하자 버핏은 2003년에 수입과 수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편으로 ‘수입증명서’라는 제도를 제안했다. 그는 다른 나라가 보유한 미국 자산이 미국의 해외 보유자산에 비해 2.5조 달러나 더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무역적자가 유지될 경우 외국인이 보유한 미국 순자산이 매년 5000억 달러씩 늘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곧 국부의 1%가 해마다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버핏은 무역수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모든 수출업자에게 그들이 수출한 액수와 동일한 달러 가치의 수입증명서를 발행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출업자들이 미국으로 상품을 들여오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를 팔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도가 원자재 거래에 적극 활용될 수 있으며 미국 제품의 가격경쟁력 강화와 수출 확대, 고용 증대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입가격 상승 가능성에 따른 국내 물가 상승이 문제였다.

* 철저한 민주당 지지자 - 버핏은 원래 공화당 지지자로 삶을 시작했다. 부친이 공화당 소속으로 네브래스카주 연방 하원의원을 네 차례나 역임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일생을 철저한 민주당 지지자로 지내게 된다. 여러 명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지지했다. 2000년에는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리리 클린턴을 지지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대선 때 그와 절친한 버락 오바마와 함께 경쟁을 하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 중혼(重婚) 상태’에 빠졌다며 사실상 둘 모두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중요 현안에 대한 정치가들의 아이디어가 내 생각과 일치한다면 나는 당을 가리지 않고 지지한다”며 논란을 비켜갔다. 정치 기부도 소액의 직접 기부(하드머니) 정도에 그쳤다. 그럼에도 선거자금 모금행사 초대장에 쓰인 ‘워런 버핏’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위력을 발휘했다.

* 카네기에게서 배운 ‘부의 사회환원’ - 버핏은 버크셔 지분인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줄곳 밝혀왔다. 그는 “사회로부터 흘러나온 막대한 부는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라는 앤드류 카네기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기부 시점을 처음에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이후가 될 것이라고 했다가 2006년에 번복하고 생전 기부 계획을 밝혔다. 부인인 수지에게 맡기려 했으나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버핏은 버크셔 주식 85%를 5개 재단에 순차적으로 기부하고 그 중 6분의 5는 당시 300만 달러의 자산을 소유한 세계 최대 자선단체 ‘빌 앤 멜린다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세 자녀인 수잔과 하워드, 피터가 이끄는 재단에도 기부금이 전달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부가 일단락되면 버핏의 지분은 5%까지 줄어드는데, 그 나머지도 적절한 시기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버핏은 대신 조건을 하나 달았다. 기부금 수령 단체들은 ‘10년 안에’ 그 돈을 모두 소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돈이 능력 있고, 활기차고, 동기부여로 충만한 지인들에 의해 보다 신속하게 쓰이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 억만장자들의 기부 플랜 ‘더기빙플레지’ - 2016년 6월 버핏과 게이츠는 ‘더기빙플레지’라는 뜻 깊은 캠페인을 출범시키고 억만장자들에게 더 많은 기부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첫 출발은 2009년 5월 5일 뉴욕에서 억만장자들을 초청해 비밀스런 만찬을 가진 것으로 시작됐다. 프로젝트 이름은 ‘위대한 기부자들’이었다. 이날 만찬 참석자는 14명이었다. 버핏과 게이츠, 록펠러가 주선했고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CEO 패티 스톤사이퍼와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가 옵서버로 참석했다. 마이클 블룸버그와 월스트리트의 세 부호 피터 피터슨, 조지 소로스, 줄리안 로버트슨에 면세 사업자 찰스 척 피니가 함께 했다. 이 모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만일 어느 부자가 기부 제안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버핏과 게이츠는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호 등 ‘슈퍼 리치’들에게 생전 혹은 사후에 전 재산의 50%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부자들을 초청해 만찬회를 개최했다.

* 큰 아들 하워드와의 농장 임대료 계약 - 버핏은 평소에 “뭔가를 시도하기엔 충분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엔 부족할 만큼만 자녀들에게 물려주겠다”고 공언했다. 큰 아들 하워드 버핏과의 특별한 계약이 단적인 예다. 아들은 160만 제곱미터의 농장을 운영 중이다. 농사가 일종의 가치 시스템을 가르쳐준다며 만족해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의 주인은 아버지 워런 버핏이었다. 아들은 총소득의 일부를 아버지에게 임차료로 지불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임차료를 아들의 몸무게와 비례해 내도록 한 것이다. 몸무게가 83kg을 넘으면 소득의 26%를, 넘지 않으면 22%를 냈다고 한다. 아들이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중국에서 인기 많은 작은아들 피터 - 뉴욕에 사는 피터 부부는 전 세계 여성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방법에 관심이 많다. 피터는 2010년에 ‘워런 버핏의 위대한 유산;억만장자의 특별한 자녀교육법’을 써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서 ‘주식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덕도 있었지만, 중국 젊은이들은 피터가 명문 스탠퍼드대학을 중퇴하고 변변한 돈도 없이 장래가 불확실한 직업을 선택한 것에 감동했다. 특히 그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삶에 대한 조언을 나눠주는 데 호감을 느꼈다. 피터는 중국에서 열린 초청 강연에서 “아버지와 나는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 환호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에서는 흡사 빛의 속도로 모든 것이 움직이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가 없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의 첫 만남 - 둘을 처음 연결해 준 사람은 워싱턴포스트의 사설란 편집자였던 멕 그린필드다. 두 거물과 친분이 있었고 특히 게이츠 어머니와 오랜 친구였다. 버핏을 잘 몰랐던 빌은 1991년 멕의 1박 2일 초대에 시큰둥했으나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가 처음으로 지적 수준이 맞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 둘은 금방 마음이 맞았다. 스스로를 ‘테크노포브‘(technophobe, 신기술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라 공언했던 버핏이지만 정보화 시대의 마이더스 같은 사람과의 우정은 세대를 초월해 변함없이 이어졌다. 빌은 “두 사람에게 가장 자극적이고 즐거운 시간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발견한 통찰에 대해 함께 논의할 때”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옥신각신 승부를 겨루는 분야는 ’수학‘이라고 한다. 워런은 숫자에 강했고 빌 역시 수학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빌 게이츠가 본 워런 버핏 - 빌 게이츠는 “한 마디로 나는 버핏의 팬”이라고 고백한다. “워런은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를 쉽게 표현하는 데 매우 능하다”며 “나는 그에게서 늘 뭔가를 배운다”고 말한다. 워런은 미래 통찰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극찬한다. 능력이 출중한 경영진을 소유회사에 배치해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주력 분야인 투자에 자유롭게 전념하는 그의 경영스타일에도 존경심을 숨기지 않는다. 빌은 “배우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때까지 비즈니스에 대한 생각이 그토록 분명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회의 같은 것으로 스케줄을 빡빡하게 채우지 않고 항상 자유로운 일정을 즐기는 점도 존경해 마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가치관이 비슷했다. 많은 재산을 앞으로 크게 소비할 계획이 없기 결국 그 부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이길 원했다. 아들과 딸들에게 부의 일부만을 물려줄 계획도 일치했다.

* 1998년 5월 ‘빌 앤 워런 쇼’ - 두 사람은 대담을 위해 워싱턴대학 무대 위에 처음으로 함께 올랐다. 이날 버핏은 “존경하는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본인의 습관으로 만들고, 반대로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행동은 절대 따라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라”고 조언했다. 자신이 내린 최고의 사업적 의사결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멋도 모르고 투자업계에 뛰어든 것”이라고 답했다. 게이츠는 자신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영리한 사람들과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누구나 창업 초기에는 사람들의 회의적인 태도와 맞닥뜨려야 할 것”이라며 “리스크에 대한 압박감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일단 회사에 들어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 배울 점이 더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3~4년에 한 번씩 위기가 닥치는 만큼 회사 내 영리한 사람들의 말을 항상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한다”면서 “우리 같은 기술기업이 독특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애쓰는 이유”라고 말했다.

* 910억 달러의 두 번째 대화 - 워싱턴 대학에서의 토크쇼에 이어 8년 후인 2005년에 네브래스카대학에서 두 번째 대담이 이뤄졌다. 이날 세간의 관심을 모은 것은 부자 증세와 기부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을 포함해 ‘슈퍼 리치’들의 소득에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25년 전의 것에 비해 절반 밖에 안된다며 “미국 정부는 부자들의 이익만을 소중하게 여겨온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후 2011년 버락 오바마 캠프는 ‘버핏룰(Buffett Rule)’이라는 부유층 대상 증세 방안을 발표했고, 2013년에 결국 고소득층에 대한 세금 인상 조치가 이뤄졌다. 둘은 이날 자기 재산의 99%를 자선단체에 기부할 계획도 밝혔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우연히 부모를 잘 만났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물려주는 일은 반 미국적 행위”라고 밝혔다. 이날 버핏은 “나중에 누군가 버크셔를 인수한다면 그게 빌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남겼다.

* 주식이 금이나 채권보다 나은 이유 - 버핏은 투자할 때 ‘매출’ 보다는 ‘기업가치’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2011년 주주서한에서 자신의 투자 성향에 관해 적어 주목을 끌었다. 그는 투자를 ‘현재의 소비를 포기하고 미래에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설명했다. 첫째, 특정 화폐 기반의 명목가치가 부여된 투자대상이다. 머니마켓펀드나 채권, 모기지, 은행 예금 등이다. 버핏은 “오직 이례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때만 이 쪽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어떤 가치도 생산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누군가가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것이란 희망에 사들이는 자산이다. 금이 대표적이다. 버핏은 그러나 금은 사용 빈도가 높지 않고,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 번째는 ‘생산적 형태’의 자산으로,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버크셔의 목표는 회사가 소유한 최고 수준의 기업 수를 계속 늘려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첫 번째 선택은 그 기업의 ‘전체’를 사들이는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주식이 가장 안전한 투자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 워런 버핏의 여성관 “그들은 우리의 미래다” - 버핏은 성이나 인종, 민족 같은 특징에 가장 선입견이 적은 인물이다. 그는 지적 능력과 업무적인 역량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배경을 따지지 않았다. “기업들의 목표는 최고의 이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고르는 것”이라며 “그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여성은 우리가 낙관적인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자신의 가정사를 얘기하면서 “내 발 아래 놓인 바닥이 누이들에게는 이미 천장이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너무 많은 여성이 자기 자신에게 멋대로 한계를 그어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편에게서 워싱턴포스트를 넘겨받아 18년을 경영하면서 무려 4000%나 주가를 끌어올린 캐서린 그레이엄을 언급하며 “여성을 더 많이 채용해 훌륭한 경영인으로 육성하는 시대의 큰 흐름에 동참하라”고 독려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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