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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시니어] 자린고비의 절약정신

<시니어 칼럼>

입력 2023-07-06 13:02 | 신문게재 2023-07-0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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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석 명예기자
손현석 명예기자

조선왕조 현종 때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 조륵(1649~1714)이란 인물이 살았다. 그의 부친은 인조 때 증부 참봉을 지낸 조유증이며, 조륵은 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근검절약을 실천해왔으며, 어른이 돼서는 구두쇠로 소문난 인물이 됐다. 그가 구두쇠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화는 많지만 그중 하나를 들면 여름철 날이 더울 때 부채를 하나 사서 손으로 부채질하다보면 닳을까 봐 벽에 매달아 놓은 후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색한 사람인 걸 증명하는 또 한가지 일화는 그의 장모가 모처럼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갈 때 그의 아내가 집에 있던 인절미를 조금 싸줬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장모를 쫓아가서 다시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조륵은 언제나 절약하느라 생선 한 마리 제대로 사 먹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일 년에 딱 한 번씩 사는 생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굴비였다. 굴비를 사다가 부모님 제사상에 올려놓은 후 제사가 끝나면 그것을 절여 천장에 매달아 놓고는 식구들에게 밥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자린고비라는 말이 바로 절인 굴비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조륵이 근검절약해서 돈을 모아 큰 부자가 됐으나, 그의 나쁜 소문이 조정까지 전해졌다. 신하들이 그의 행위가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이므로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하자 왕은 암행어사를 보내 자초지종을 알아오게 했다.

조륵이 사는 마을에 온 암행어사는 그의 집을 찾아가 하루 묵기를 간청했다. 어사는 그냥 쫓겨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를 반가이 맞아주며, 좋은 음식으로 잘 대접해 주는 것이 소문과는 매우 달랐다. 어사는 다음날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슬며시 물었다. 그랬더니 조륵이 본래 유명한 구두쇠인 것은 맞지만, 환갑 이후 만석꾼이 된 뒤부터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앞장서서 도와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경상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1만여 가구를 구제할 만큼의 대량의 구휼미를 보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자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를 존경해 구두쇠라 부르지 않고 ‘자비롭고 어진 어른’이란 뜻인 자인고(慈仁考)라 불렀다. 훗날, 마을 현감은 조륵의 공로를 치하해 마을에 자인고라는 송덕비를 세웠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자인고비(慈仁考碑)라 불렀다. 자린고비라는 말은 바로 이 비에서 유래된 말이었던 것이다.

조정은 암행어사로부터 이러한 조륵의 공적을 전해 듣고는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행한 그의 인덕을 높이 사서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인 가자(加資)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조정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는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나 갔다고 한다.

쓰고 싶은 것 다 쓰면서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물을 바로 쓸 줄 아는 것이다.

조륵 선생의 자린고비 정신이야말로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올바른 절약정신이라 할 것이다.

 

손현석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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