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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칼럼] 개의 역할과 같은 정부

입력 2023-03-2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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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006
김행범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인류 문명은 대략 1만 년 전에 시작했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약 50명 정도 무리로 모여 살던 그 시대 원시인들은 목초지와 사냥터를 공유하면서 생산물을 나누어 먹었다. 인간 의식의 디폴트 값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이다. 까마득한 이 체험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 정의’ 등의 관념은 우리에게 격세유전(atavism)의 호소력으로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향수하게 만든다.

원시인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런 체제에서는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게으른 자와 열심히 일한 자가 똑같은 몫을 배분받는 문제. 그들은 공유 재산을 나누어 각인이 나누어 거지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모든 사람이 제 땅을 경작하여 그 소출을 사유화하면 건강한 이기심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며 각인의 노력한 만큼 소출을 얻는 사유재산권 제도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유재산권 제도 도입에는 만만치 않은 문제가 따른다. 개인이 사유지를 갖는 이상 그 사유지 및 소출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지키는데 밤을 새워야 한다. 낮에는 자신의 밭에서 피땀 어린 노동일로, 밤에는 악한 이웃이 내 소출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몽둥이를 들고 밭을 지켜야 한다. 원시인은 지쳐간다. 피로에 지쳐 그는 다음 날 밭에 일하러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 사유재산권 제도가 필수적이지만 그 작동에 이런 큰 비용이 든다면 차라리 그냥 원시 공산 사회로 돌아갈 유혹도 받을 것이다. 거기서는 부족 전체의 총생산 및 개인에게 돌아갈 몫은 빈약했으나 최소한 잠은 잘 수 있었다. 사유재산권 제도는 참으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이 극적 시점에서 많은 원시인 부족은 사회주의로 되돌아갔다.

사회주의로 머문 지 천년쯤 세월 후 인류의 재산권 제도 도입의 획기적 계기가 되는 위대한 진보의 발명품이 출현한다. 그것은 밤에 내 소유지에 접근하는 사람이 땅 소유주인지 약탈자인지를 멀리서도 정확히 판별하여 열렬한 환영이나 적대적 방어로 대응하는 고도의 능력을 갖춘 바이오닉 지능 장치, 곧 ‘개(Dog)’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원시인은 낮에는 사유지에서 건강한 이기심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고 밤에는 편히 잠으로 휴식하고는 그다음 날 확대 재생산에 노동을 투입할 수 있었다.

영역 동물인 개는 일정 구획 토지에 재산권을 인정받아야 할 자와 그 침해자를 정확히 판별해 내는 바이오닉 도난 방지기이다. 개를 통해 사유재산권 제도의 거래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그것은 이제 사회주의를 밀어내고 새 제도로 자리 잡게 만든다. 그러자 인류는 거대한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이 스토리는 밀턴 프리드먼 아들로 저명한 자유주의자인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D. Friedman)도 인용하고 있다. 토지의 사유재산화 과정에 관한 이 설명이 과연 정확한지는 인류학 및 선사 시대를 지식을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 그 직관이 주는 몇 가지 함의만은 분명하다. 우선, 공유 상태의 재화를 재산권으로 설정하는 제도는 개인에게 권리를 부여하지만, 그 재산권 제도 도입 여부를 제도의 객관적?법적 국면만으로 평가함은 무용하고 그 제도 운용에 필요한 비용이 충분히 작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거래비용 경제학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더 중요한 함의는 따로 있다. 개인의 재산권을 지켜주던 원시시대 ‘개’의 역할은 오늘날 정부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개가 개인 재산의 수호자의 역할을 합법적 폭력을 가진 정부에게 넘겨줌에 따라 오늘날 개는 리본을 달고 귀여운 옷을 입고 변화된 시대 요구에 맞추어 주인의 바이오 장난감 역할로 급히 자신의 임무를 바꾸고 있다. 그런데 개로부터 그 역할을 넘겨받은 정부가 과연 얼마나 진정 ‘개’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슬프게도, 오늘날 개인의 재산권 위협의 가장 핵심 주역은 이웃 원시인이 아니라 바로 재산권 지켜준다며 나타난 정부이다.

우리가 일단 무정부(anarchism)를 기피하고 최소정부(minarchism)를 선택한 이상, 개인에게 꼭 필요한 기본 공공재를 제공하고 개인을 내적 및 외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정부 역할은 인정해야 한다. 정부가 여기에 머문다면 제임스 뷰캐넌이 말한 ‘생산 국가’ 및 ‘보호 국가’에도 부합되는 바람직한 경우이다. 그러나 무제한적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rule of law)의 근본정신을 왜곡하여 ‘법대로 지배’(rue by law)로 오용해 온 현대 정부는 이 한계를 넘어 재분배 국가까지 나아가는데 불행히도 한국이 바로 그 생생한 예가 되고 있다.

주인을 섬기며 그의 재산을 지키던 개의 자리에 이제는 오히려 주인의 재산을 위협하는 레비아땅이 들어와 있다. 개가 존재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버리고 어렵게 사유재산 제도를 어렵게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레비아땅 공룡은 ‘사회 정의’라는 격세유전의 전설을 불러내며 자원을 임의로 나누어주는 사회주의 체제로 점점 근접해 가는 중이다.

인류는 가장 중요하고도 친밀한 동물인 개를 욕설에 자주 비유해 온 과거의 무책임을 후회해야 한다. 정부가 아무 통제장치 없는 괴수가 되어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시대에 이르고 보니 인류 재산권 수호자의 상징과도 같은 개를 다시 부르고 싶어 한다. 무릇, 정부는 재산권을 보호하고 그 침해를 정확히 판별하여 자본주의 제도가 유지되게 한 개와 같은 본연의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개만큼만 하라, 그것이 최고의 정부이다. 

 

김행범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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