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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셰익스피어와 노자의 만남, ‘리어’ 배삼식 작가 “순수했다 혼탁해지는 물 위의 리어”

[허미선 기자의 컬처스케이프]셰익스피어 '리어왕'에 '무위'의 노자철학 빗댄 국립창극단 창극 '리어',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물의 이미지

입력 2022-02-25 18:45 | 신문게재 2022-02-2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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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 작가
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리어를 물 위에 띄워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오행 중 물만큼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게 없어요. 물은 순수의 상징이지만 혼탁해질 때는 가장 더러워요. 삶이 비롯되기도 하면서 죽음을 강력하게 품고 있기도 하죠. 사실은 모든 걸 다 품고 있고 언제든 정반대쪽 것으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이 물이거든요.”

배삼식 작가는 국립창극단 창극으로 재해석될 ‘리어’(3월 17~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대해 “물의 철학인 노자의 철학으로 풀어냈다”며 “원작의 대부분은 크게 손대지 않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다가 노자 사상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리어’는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 고유의 운율과 시적 언어로 풀어낸 ‘리어왕’을 우리 전통 소리와 우리 말맛을 살려내는 배삼식 작가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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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후반부에 새로운 세대가 오기는 하지만 결국 ‘리어’는 한 인간의 소멸하는 과정이에요. 중심에 있었지만 소멸할 수밖에 없고 이제는 사라져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잖아요. 인간은. 어떻게든 그 소멸에서부터 벗어나 보려 저항해보지만 결국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허옇게 부서지면서 쏟아지기도 하고 맴돌며 소용돌이 치기도 하지만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천천히 소멸해 가는 한 인간의, 우리 모두가 마주하게 될 순간에 대한 이야기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노자를 만나다

“공간적 배경부터 ‘물’이라는 이미지에 올려놔 봤어요. 리어가 양위하겠다고 나서면서 그럴 듯하게, 사실은 거짓 깨달음이지만 ‘상선약수’를 운운하며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겠다. 끝을 향해 조용히 흘러가며 쉬겠다’는 첫 장면부터 그래요.”

배삼식 작가를 비롯해 ‘제7의 인간’ ‘푸가’ ‘트리플 빌’ ‘레플리카’ 등의 정영두 안무가이자 연출, ‘귀토’ ‘변강쇠 점찍고 옹녀’ 등의 작곡가이자 음악감독 한승석,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 등이 함께 한다.

“리어는 하류쯤까지 흘러서 꿈꾸는 듯 느릿하게 맴돌고 있는 사람이에요. 새로운 물이 뒤에서 흘러오는데도 어떻게든 나아가지 않으려고.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항하는 물이죠.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의 내면, 외부적 사건들을 물에 실어서 표현합니다. 파문이 일고 폭포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장강의 흙탕물이 거슬러 오르듯 거꾸로 튀기도 하는 물의 이미지로 꾸려졌어요. 한겨울의 꽁꽁 언 물이 있고 그 물이 풀리면서 그르렁거리는 마지막 전투 장면이 있죠. 그 끝은 바다예요. 바다가 너무 광할하다 보니 버틴 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죠.”

그는 ‘리어’에 대해 “창극이니 작창을 할 수 있는 형태로 쓰지 않으면 안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자체가 음악적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원작이 가진 힘을 온전히 옮겨오는 데는 난점이 있다”며 “작품 자체가 가진 그 힘을 믿고 우리 창극이라는 형식 안에 옮기기 위해 애썼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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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이야기가 너무 많아져도, 원작과 거리를 너무 벌려도 안되고 최대한 알뜰하게 원작이 가진 것들을 챙겨가고 싶거든요. 하지만 ‘리어’는 창극이고 셰익스피어 원작의 여러 중요한 측면들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균형잡기가 쉽지는 않지만 균형을 잡으려 노력 중이죠.”

그리곤 “워낙 품이 넓은 작품”이라며 “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모티프, 가장 중요한 내면에 깔린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맥베스’도, ‘햄릿’도 그 시간의 안타까움이 깔렸다”고 부연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의 물살에 제각각의 욕망을 품고 흘러가기 때문에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휩쓸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인간이죠. 시간 앞에서 인간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저항하지 않을 수만도 없죠. 그런 시간 그리고 어리석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보려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잔혹하고 무주한 세계, 물 위의 ‘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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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리어’ 중 리어왕 역의 김준수(사진제공=국립극장)
“어떤 의미에서 리어의 세계는 대단히 잔혹하죠. ‘햄릿’은 뒤틀린 방식이나마 복수를 완수하고 ‘맥베스’는 결국 파멸해요. 하지만 리어는 너무 무주(誣奏)해보이고 선한 코딜리어는 너무 덧없이 죽어버리죠.”

그런 리어의 이야기를 노자 철학에 빗댄 이유에 대해 배삼식 작가는 “노자철학은 유교의 ‘인의예지’ 반대편에 서있다”며 “유교철학을 비판한 노자철학으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유가적 윤리로 굴러가는 이 세계를 다시 인위적으로 재구성한다”고 부연했다.

“원래 천지는 불인(不仁)해요. 어질지 않죠. 어질고 의롭고 예의를 지키고 지혜로워야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 세계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는 애매모호한, 도덕이나 윤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이죠. 그걸 도덕과 윤리로 재단하려고 할 때 억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어떤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현명하려고 하고 어리석음과 잔혹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리 바람과는 달리 훨씬 더 혼탁하다”며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고 말을 보탰다.

이어 ‘리어’에 대해서는 “한 노인의 집착과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제각각의 욕망,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든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부딪히는 공간”이라고 덧붙였다.

“그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빛나고 폭력적이 되기도, 어리석어지기도 해요. 리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애를 좀 먹기는 했어요. 워낙 방대한데다 다닥다닥 붙여두면 안되는 작품이거든요. 사실 ‘리어’라는 작품은 오히려 느린 시간이 필요한 장면들이 있어요. 밀도를 지니면서 진행돼야하는 장면들이죠.”


◇저마다의 정의, 충돌하며 괴리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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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현재적 의미라면 지금의 어떤 괴리든 ‘리어’ 속에서 만큼이나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망의 세계, 생애들이 있으니까요. 도덕적 잣대는 자신의 욕망에는 너무 관대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칼처럼 들이대는 그런 시대잖아요.”

이어 배 작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어떤 때는 대단히 위협스럽고 폭력적이 된다”며 한나 아렌트의 “인간성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복원하고 유지시키는 한에서만 유효하다”를 인용했다.

“거꾸로 짚어보면 아름다운 정의와 도덕과 윤리들이 한 인간을 비인간으로 규정짓는 데 사용되죠. 완벽하게 절멸시키거나 밖으로 추방시키지 못해 안달하는 ‘리어’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가진 모순, 인간이기 때문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와 어리석음 생각해보는 계기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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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그리곤 “그런 의미에서 ‘리어’는 겉으론 그럴 듯하지만 도덕적 교훈을 담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부터 다양한 모티프를 여러 군데서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라며 “한쪽은 선하고 한쪽은 악하고, 선위가 무력하게 악위에 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각자의 캐릭터가 가진 욕망은 스스로에게는 가장 정당한 거잖아요. 그걸 추구하는 것도 당연하죠. 인물마다의 잣대의 괴리도, 세상과의 괴리도 크지만 그게 세상이에요. 우주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다크매터’(암흑물질 Dark Matter) 같아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물질’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전체 우주의 3% 정도래요. 나머지는 관측도 안되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어서 ‘암흑물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이 우주의 바탕을 이루고 있죠.”

그렇게 그 우주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어리석고 편협할 수 있는지를 품고 있는 작품이 ‘리어’다. 이에 대해 배 작가는 “사실 우리는 세상을 제 각각의 기준과 잣대로 어떻게든 설명하고 예측해 보려고 하고 규정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온전히 하나의 기준이나 잣대만 존재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여전히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가 우리 삶 바닥에 깔려 있다는 걸 인정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아닌 타자를 들여다보는 마음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 점이 중요하죠. 인간은 원래 어리석으니 어리석은 대로 대충 살자가 아니에요. 온전한 정의와 기준을 찾으려는 추구 자체를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안에는 암흑물질처럼 어쩔 수 없는 한계와 어리석음이 있다는 걸, 아무리 지혜로워지고 싶어해도 결국 그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는 거죠. 한손에 잡히지도 않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버릴 수도 없는 그 불투명한 삶을 오히려 열심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게끔요.”


◇가장 휘몰아쳐야할 마지막, ‘고요’를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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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의 배삼식 작가(사진=이철준 기자)

 

“저마다의 정의가 부딪힌 끝에 파국으로 치닫는, 가장 휘몰아쳐야할 마지막은 오히려 고요한 장면이 될 수도 있어요. 리어가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하도록 했죠. ‘이 아이(코딜리어)와 나를 물 위로 밀어내 달라’고. ‘이 땅 위에는 혼이라도 다시는 밟고 싶지 않다’고. 이미지적으로는 쪽배에 두 주검이 누워 흘러 떠내려가 가는 장면으로 썼어요. 그렇게 맨 마지막 노래는 물의 노래가 될 겁니다.”

모든 분쟁의 끝, 모든 아이들을 잃고서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리어에 대해 배 작가는 ‘사랑’을 빗대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할 때는 다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마음이 간다”며 “그 순간에는 내가 저 사람을 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이 안타깝기 때문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알려고 한다”고 전했다.

“문제는 다 안다고 생각할 때 생겨나요. 자신이 그 사람을 정해두고 ‘너는 왜 내가 아는 네가 아니니’ ‘네가 이럴 줄은 몰랐어’ ‘내가 알던 너는 어디로 갔니’라고 하게 되죠. 한 인간을 판단하거나 어떤 상황 혹은 사건을 들여다보는 데도 너무 편해요. 어떨 때는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실들, 옆에 가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나누죠. 심지어 옳고 그름, 선악을 판단하기도 해요.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죠. 리어처럼요.”

이어 배 작가는 “정보의 홍수 속에 그런 성향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모양새”라며 “미지의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규정들을 적용해 한쪽으로 치워내는 일들을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전체적의적인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덧붙였다.

“공동체 사람들이 갖는 하나하나의 성향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그리스 신전 기둥에 써있었다는 ‘너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라’을 되새기며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작가인 저로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남아 있음과 저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면서 기쁨이 시작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 같아요.”

그리곤 “여전히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음 작품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라며 “어줍잖게 작품을 써오면서 끝까지도 내가 쓰고 있는 이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모르는 구석이 남아 있음을 깨달으면서 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고 말을 보탰다.

“자료를 찾고 고심하며 누군가를 만나 이해해 보려고 애쓰죠. 오히려 긍정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래요. 내가 어리석고 다 알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이 세계가 다시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찬 곳이 될 수 있다는, 여전히 내가 더듬어가야 할 것이 남아있다는 뜻이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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