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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쉼표까지 읽게 만드는 랭보의 마력, 마지막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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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3-12-25 18:00 | 신문게재 2023-12-2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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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뤼미나시옹
일뤼미나시옹|아르튀르 랭보|페르낭 레제 그림(사진제공=문예출판사)

“환각적 이미지로 가득한, 관능적이고 재미있으면서 어둡기도 한 작품이며 인간사를 거울처럼 온전히 담고 있는 작품.”


지난 11월 세종솔로이스츠가 주최하는 제6회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나선 역사학자이자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Ian Bostridge)는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의 9개 연가시에 음악을 붙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일뤼미나시옹’(Les Illuminations)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무대에 감동 받아, 때마침 2023년의 마지막 달 랭보의 탄생 170주년을 맞아 출간된 마지막 미완성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을 받아들고는 꽤나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뤼미나시옹’의 시들은 저주받은 천재였고 당시에는 그 누구에게도 온전히 인정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던, 그럼에도 삶의 의지가 견고했던 아르튀르 랭보가 연인이었던 시인 폴 베를렌(Paul-Marie Verlaine)과 영국에 머물던 때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불어 1973~1875년 레딩, 샤르빌과 슈튜트가르트 등 유럽전역을 여행하면서 쓰여진 시들도 수록돼 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 아내와 자식들 등을 뒤로 한 채 랭보와 여행길에 올랐던 베를렌은 다툼 끝에 그에게 총을 쏴 2년 동안 수감됐다. 랭보가 감옥에서 2년여를 보내고 출소한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들을 맡기면서 1886년 5월 파리의 문학평론지 ‘라 보그’(La Vogue)에 처음 실렸고 그해 10월 책으로 출판됐다.

이번에 출간된 ‘일뤼미나시옹’은 랭보 시의 원형은 물론 베를렌이 쓴 초판의 서문을 그대로 살리는 동시에 심도 깊은 각주,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가 ‘일뤼미나시옹’만을 위해 그린 그림 20점이 함께 수록됐다.

베를렌이 쓴 초판 서문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은 “랭보가 자기 원고에 붙인 부제‘로 “영어의 ‘Illuminations’라는 영어에서 온 말로 즉 Coloured Plates라고 할 수 있다.” 연인인 동시에 동료 시인이었던 베를렌의 평처럼 170년이 흐른 지금에 봐도 세련되고 매력적인 시들이다. 

 

하지만 어쩌면 어원이나 그 진화과정까지를 알아야만 이해가능할지도 모를 형용사의 사용, 오페라 작품이나 신화 속에서 그대로 가져오거나 응용하거나 연상시키는 적지 않은 고유명사, 하나하나 의미를 가진 듯한 무수히 많은 쉼표와 비약, 감히 그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생략과 은유 등으로 꽉 들어차 있다.


베를렌이 서문에 적은 것처럼 “의도적인 파격의 운문으로 된 짧은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핵심 주제는 없거나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건 대홍수 뒤의 풍경을 ‘보석들은 땅 속 깊이 몸을 감추고 꽃들은 피어버렸다!’로 표현할 줄 아는 랭보의 남다른 감성과 전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시어들의 향연이다. 

 

간혹 시의 길이보다 번역자의 각주가 많은 아이러니 또한 지독히도 랭보다운 시집이다. 더불어 쉼표 하나에도 뭐가 들었을까를 집요하게 고민하게 하는 힘을 지닌 언어들이 꽤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글들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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