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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r Paly 인터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피아니스트 김기경·김여랑 “매회 마지막인 것처럼”

입력 2020-06-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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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여랑(왼쪽)과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매 무대에 모든 걸 쏟게 돼요. 저 뿐 아니라 (김)기경 형도 그래요. 선천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매회 마지막인 것처럼요. 분배를 지금도 잘 못해요. 특히 하루에 공연이 두 번 있는 날은 무대에 올라가면서 ‘오늘은 낮·밤 분배를 잘해서 해야지’ 하는데…무대만 올라가면 그게 안돼요.”

‘라흐마니노프’(6월 2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1관)로 첫 뮤지컬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김여랑은 이렇게 토로했다. 그리곤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그 매너리즘이 언제나 올까 라는 생각으로 매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예민함과 긴장 속에서 무대에 오른다”는 김여랑과 번갈아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 김기경 역시 “컨디션 조절이 관건”이라고 말을 보탰다.

“클래식과 연주가 다르진 않아요. 특히 ‘라흐마니노프’는 클래식 연주법에 기반을 둔 뮤지컬이잖아요. 다만 클래식 공연은 길어야 2, 3일이지만 뮤지컬은 100일 남짓 계속 무대에 올라야 하다 보니 체력관리와 연주를 하면서 흥분도를 차분하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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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데미안’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템페스트’ ‘보도지침’ 등의 오세혁 연출작인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천재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와 그의 정신과 주치의 니콜라이 달(Nikolai Vladimirovich Dahl) 박사의 실제 사연을 무대에 올린 2인극이다. 

 

‘교향곡 1번’(Symphony no.1) 혹평 후 신경쇠약으로 두문불출하는 라흐마니노프(박규원·이해준·정욱진, 이하 관람배우·가나다 순)가 정신의학자 달(유성재·임병근·정민) 박사를 만나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따른다. 아마추어 비올리스트이기도 한 달 박사에게 헌정해 한 무대에서 합주를 한 일화로도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당시에는 혹평 받았던 ‘교향곡 1번’ ‘보칼리제’ 등 라흐마니노프의 명곡들로 넘버를 꾸렸다. 


두 배우와 더불어 그들의 감정, 재능, 상태 등을 표현하며 또 다른 배우이자 캐릭터로 무대에 존재하는 피아노(김기경·김여랑) 그리고 현악 4중주가 클래식 선율의 깊이를 더한다. 2016년 김유현 작가·김보람 작곡가가 꾸린 작품을 바탕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조연출이자 ‘더 픽션’의 연출인 윤상원이 각색해 스토리라인을 다듬었고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보도지침’ 앙리할아버지와 나‘ ’금란방‘ 등의 이진욱 음악감독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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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매해 라흐마니노프 역의 박유덕·안재영, 달 박사 김경수·정동화, 피아니스트 이범재가 무대에 오르며 사랑받았고 2020년 배우는 물론 피아니스트까지 새로 꾸려 돌아왔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뮤지컬 넘버로?

 

“처음에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뮤지컬 넘버로 만든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죠.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음악감독) 이진욱 감독님이 영상을 보내줄 테니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전한 김여랑은 물론 김기경도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초연부터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올랐던 이범재의 공연 영상을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

“너무 어색하고 이상할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제 편견이었더라고요. 대중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데다 저희가 클래시컬 피아니스트로 연주하던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죠.”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도 “영상을 보고 감동받았다. 가수들도 옛날 곡들을 리메이크해 부르면 팬이나 애청자들이 원곡을 찾아서 듣곤 한다”고 비유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죠.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넘버로 만들면서 관객들이 원곡을 찾아 듣게 되고 그 원곡이 위대하다는 걸 재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창작 뮤지컬 역사에서는 ‘라흐마니노프’가 클래식 음악으로 넘버를 꾸린 원조 작품이고 저희는 그 역사 속에 있는 연주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전한 김기경은 “뉴에이지 입장에서는 라흐마니노프 음악과 넘버의 조합이 다 찰떡같다. 반면 정통 클래식 측면에서 보면 다 안맞기도 한다”며 “현악기 대선율, 피아노가 원래 연주해야 하는 정확한 음이 뒤로 가 있고 코드 반주로 풀어낸 아르페지오(총거리꾸밈음, 화음의 각 음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차례로 연주하는 주법)적 화성으로 연주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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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여랑(왼쪽)과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그러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피아니스트가 부각되도록 솔로 연주를 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부분도 배우들이 계속 대사를 하고 있어서 굉장히 긴장이 돼요. 피아노가 잘 안들려도 안되지만 배우 대사가 잘 들려야 해서 피아니스트인 저희로서는 되게 긴장되는 순간이죠.”

더불어 원음과 배우들의 키(음의 높낮이)에 맞춘 음 사이에서의 방황도 없지 않았다. 김여랑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1악장과 3악장이 나오는 두 번째 넘버 ‘소리’가 그렇다”고 예를 들었다.

“이 넘버에 차용된 악장들은 테크니컬 연습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에요. 뮤지컬을 하기 전에도 진짜 열심히 연습했죠. 그러다 보니 저희는 원음인 C마이너에 손이 익었어요. 연습하는 두세달 동안 자꾸 원음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 때문에 정말 힘들었죠.”

김여랑의 토로에 김기경도 “그 세팅된 걸 전조(악곡의 진행 중에 계속되던 곡조를 다른 곡조로 바꿈)하는 게 더 어려웠다. 게다가 (라흐마니노프)에서 그 부분이 어려운 조로 편곡돼 있기도 하다”고 동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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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협주곡을 두 개로 나누고 (협주곡) 2번 연주 분량도 늘렸어요. 3번도 추가해서 극 중 넘버와 커튼콜을 완전 다르게 치거든요. ‘랑피’(김여랑 피아니스트의 애칭), ‘경피’(김기경 피아니스트의 애칭) 타임도 늘리고….”

이렇게 설명한 김기경은 “(쯔베레프 선생이 라흐마니노프에게 ‘네가 여기 있어야할 이유를 증명해봐’라고 하는 장면에서)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2악장 Non allegro(빠르지 않게)도 추가되면서 더 라흐마니노프다운 피아니스트의 곡이 됐다”고 덧붙였다.

“여랑 피아니스트의 아이디어였는데 국제콩쿠르로 준비 중이던 곡이었죠. 테크닉적인 증명이 아니라 음악적 암시라고 할까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강요를 받았듯 라흐마니노프 역시 그 만큼이나 훌륭한 음악가인 사촌형 실로티가 보낸 달 박사로 인해 강박감과 간섭, 과잉보호 등에서 오는 피로감이 있었을 거예요. 그걸 깨부수고 나오는 장면인데 연주하면서도 영감을 받게 돼요.”

김기경의 전언에 김여랑은 “사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분이 라흐마니노프다. 연주하는 동안 저에게 희열을 비롯해 여러 감정을 주는 아티스트”라고 말을 보탰다.

“특히 클래식 무대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음악이 ‘소나타 2번 2악장’이었어요. 그랬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중간에 ‘소나타 2번 2악장’이 들어가면 훨씬 매끄럽고 설명도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행히 다들 좋다고 해주셨어요.”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은 “일단 곡이 너무 좋았고 여랑 피아니스트가 ‘소나타 2번 2악장’을 추가해 연주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며 “그래서 다들 거부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마냥 어렵기만 했던 뮤지컬이 공연을 거듭하면서 두 피아니스트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김기경은 “이 작품의 넘버에서는 원곡에 없는 도돌이표를 넣어 엔딩을 하기도 한다”며 “그새 익숙해졌는지 제 개인 연주 녹음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반복을 하고 있고 코드도 막 만들고 그런다”고 털어놓았다.

김여랑 역시 “솔직히 처음엔 다 마음에 안들고 다 이상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라흐마니노프 원곡 솔로연주를 하는데도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가사가 막 들려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한다”고 웃었다.


◇이구동성 ‘옐레나’…눈시울 적시는 피아니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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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피아니스트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원래는 세 잇단음표에 플룻이 솔로로 나오는 장면인데 배우가 블루스 느낌을 살려서 ‘난 기억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처음엔 좀 촌스럽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가사랑 극이랑 너무 잘 맞는 넘버죠.”

이렇게 전한 김기경을 비롯한 김여랑도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변주한 ‘옐레나’를 꼽았다. “마지막 넘버라 퇴근의 기쁨도 있다”며 눙치는 김기경에 김여랑은 “다른 곡에 비해 ‘옐레나’는 좀 편하게 연주하게 된다”고 동의를 표했다.

“그때는 배우들이랑 같이 어우러질 수 있어서도 좋아요. 다른 곡들은 피아노가 되게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서 연주에 급급한 면이 있거든요. 게다가 ‘옐레나’는 정해진 멜로디라인이 두드러져서 좋아요.”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은 “마감 작업을 하는 사람이 가지는 압박, 절망, 열등감, 승부욕 등을 다 가진 작품”이라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고 말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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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여랑(왼쪽)과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 눈시울을 적셨어요. 저 역시 가끔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더불어 지금 내 세상에 없는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가 담긴 독백이 아픔으로 다가와요. 아픈 누나에게 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교향곡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 작곡한 악보들을 찢어서 던지는 절망과 조급함, 원망 등이 모여 독백에서 터지잖아요.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로. 감정을 응축해서 ‘미안해’라는 말을 3번 정도 할 때 저 역시 더 사랑해주지 못하고 챙기지 못해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생기면서 아파요.”

그리곤 “저 뿐 아니라 배우들도 다 울고 있다”고 전한 김기경에 김여랑 역시 “저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다. 저희가 느끼지 못하면 그 감정과 느낌에 맞는 음악이 나오질 않는다. 그 부분을 연주할 때면 제가 튕겨져 나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말을 보탰다.

“연습 초반에 배우들이 쉬는 시간에 와서 이 부분을 좀 맞춰보자고 했을 때는 가볍게 연주했었어요. 연습이고 그냥 맞춰보는 거니까요. 그런데 배우분들이 옆에서 눈물을 후두둑 흘리시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연습도 절대 허투루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 뒤로는 단 한번도 편하게 연주한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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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이렇게 전한 김여랑에 김기경은 “그래도 마지막은 B메이저로 끝나니까 다행히도 힐링이 된다”며 “결국 치유받고 해피엔딩을 맞는 곡이라 더 감사하고 좋다”고 말을 보탰다. 김여랑은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요즘 시대에 딱 필요한 극”이라고 표현했다.

“저희도 연주하면 힐링되는 면이 많아요. 물론 어렵고 힘들지만 좋은 기억이 되게 많거든요. 회가 거듭될수록 이 작품을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함을 가지게 돼요.”


◇이진욱 감독의 감언이설? “별로 어렵지 않다더니…피아니스트지만 운동선수처럼!”

“저는 완전 속아서 왔어요. 이진욱 감독님이 ‘별로 어렵지 않다. 충분히 할 만하고 다 괜찮다. 그냥 와서 편하고 재밌게 하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김여랑의 전언처럼 ‘원망’(?)으로 시작했지만 연습실에 공수된 그랜드 피아노에 매료되면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라는 작품에도 깊이 빠져 버렸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는 이상 클래식 기반이라 그렇게 불편하진 않아요. 게다가 제작사(HJ컬쳐), (이진욱) 음악감독님께 너무 감사한 건 그랜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주셨다는 점이에요. 전자피아노는 손가락 관절을 쓰는 강도에 따라 편차가 심해서 실제 무대와 다르게 구현되거든요. 반면 그랜드 피아노는 타공감이 실제 무대에 거의 그대로 구현되니까요.”

김기경의 설명에 김여랑은 “좋은 피아노가 있어서 저희도 재밌게 연주할 수 있다”며 “점점 더 애정도 많이 가지게 되고 노력하게 된다”고 속내를 전했다.

“정말 악기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지금 피아노도 좋지만 처음 연습실에 왔었던 건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좋았죠. 피아노도 사람들만큼이나 다 다르거든요. 저는 ‘무조건 이 피아노다’ 했어요. (지금의) 피아노로 바꾼다는 얘기를 듣고 마지막 날까지 너무 보내기가 싫었어요. 딱 3일 연주했는데 너무 정이 들어버렸죠.”

이렇게 전한 김여랑에 김기경은 “지금 피아노 보다 3배 정도 무거웠다. 건반 타격에 힘과 에너지를 그만큼 더 써야 했던 피아노”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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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기경(왼쪽)과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감독님은 아셨던 거죠. ‘이걸로 공연하면 너희들이 죽을지도 모른다. 절대 안된다’고 하셨거든요. 공연을 하다 보니 그걸로 공연을 했으면 진짜 무대에서 쓰러졌겠구나 싶어요.”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은 “처음에 이진욱 감독님이 ‘병원을 다니면서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냥 겁을 주시는 건 줄 알았는데 여랑씨가 먼저 병원을 가더라”며 “저 역시 2주차부터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귀띔했다.

“저희도 나름은 꽤 힘 좋은 피아니스트들인데 일주일에 한번씩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공연 중이죠. 뮤지컬 뿐 아니라 개인연습도 해야 하니까 체력과 멘탈 관리를 잘 해야하는 것 같아요. 운동선수처럼.”

요즘의 스스로를 “운동선수”라고 표현한 김기경의 말에 김여랑 역시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컨디션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물론 너무 재밌고 즐거운데 그만큼 피아노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잖아요. 연주로 끝이 아니라 배우로서 감정부터 다 표현을 해야 하니 그 스트레스가 엄청 나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한평생 무대에서 땀이 난 적이 없는데 요즘은 느린 곡만 쳐도 미끄러질 듯 후두둑 땀이 나요. 흰머리도 엄청 늘었어요.”

이어 “관객분들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며 “연주 중 관객분들의 리액션이 직접적으로 감정선에 와 닿아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관객들 반응을 예민하게 지켜보며 귀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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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 역시 “편차가 계속 있다. 라이브 공연의 묘미기도 한데 공연마다 배우와의 호흡이 달라지다 보니 어떤 때는 관객들로 하여금 ‘피아니스트가 오버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어서 매회, 매순간 긴장 중”이라고 말을 보탰다.

“저는 그래서 아예 무표정, 이모티콘의 일자표정(ㅡㅡ)을 하고 있어요. 배우만 보이게 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클래시컬 그리고 뮤지컬 피아니스트로서의 간극과 시너지

“클래식 공연에서 피아노는 대부분 주선율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요. 뮤지컬을 하면서는 배우들에 맞춰서 연주해야하는 게 처음엔 힘들었죠.”

이렇게 전한 김여랑은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찾으려고 노력 중”이라며 “배우들이 매일 다른데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약속한 것과는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들도 생겨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원래는 화를 내기로 한 데서 차갑게 표현하기도 하고…그에 맞춰 순발력을 발휘해야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지점 같아요. 배우분들의 감정이 달라졌을 때 관객들에게도 다르게 전달되게 피아노도 달라져야 하거든요. 어떻게 소리로 더 깊이 관객들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져요.”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도 “원래 대본에 없는 건데 달 박사가 차이콥스키 선생으로 변신하면 저희가 BG(배경음악)를 연주하는데 어느 날인가는 갑자기 질문을 하셔서 놀라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정민 배우 빼고는 두분(유성재·임병근) 차이콥스키 선생님이 다 애드리브를 하시니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당황했어요. (유)성재 배우님은 ‘라흐마니노프가 참 괜찮은 애지?’라고, (임)병근 배우는 ‘나한테 발레 배워볼 생각 없나?’라고 하세요. 요즘은 제가 발레 동작을 해드리거나 어떤 때는 반응하기가 싫어져서 귀를 막기도 해요. 그런 게 되게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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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기경(왼쪽)과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지금은 제법 적응해 즐거운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 시작은 쉽지 않았다. 두 피아니스트들의 말처럼 클래식 연주는 “나와의 싸움”이다. 특히 독주회의 경우 오롯이 스스로가 표현하고자 하는 데 집중하며 테크닉적으로도 완벽하기 위한 자신과의 사투가 공연 내내 이어진다. 하지만 뮤지컬은 배우, 스태프 등과 함께 호흡하는 협업 장르다.

 

“클래식 음악가들은 오케스트라를 하지 않은 이상 사회생활이 별로 없어요. 혼자 손가락 10개랑 대화하거든요. ‘중지 너 오늘 왜 이러니?’ 이러면서요. 듀오, 트리오, 콰르텟, 퀸텟 등 다양한 실내악 연주조합에서도 피아노는 대부분 리더예요. 악상, 리듬 등을 이렇게 가자 식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죠. 그러다 뮤지컬에 오니 타이밍, 음 하나 하나까지 굉장히 예민하게 간섭받는 느낌이었어요. 처음엔 부담스러웠죠. 하지만 얼마 안가 이해하게 됐어요. 전혀 다른 장르잖아요.”

이렇게 전한 김기경은 “그래도 ‘라흐마니노프’는 음악가들을 무대 위에 올려 주된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혁신적인 뮤지컬”이라며 “저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모든 역량과 아이디어를 쏟아내 연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저희에게만 주어지는 ‘랑피’ ‘경피’ 타임이 있어요. 그 장면에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게 연주하면서 너무 재밌어요. 그리고 제 (클래식) 작업에도 도움을 받아요. 스토리를 구상할 때 픽션을 가미해 클래식 연주에도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해 발휘할 수 있게 해주죠. 쉽진 않지만 ‘라흐마니노프’를 하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클래식 연주회에서도 구현할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들… 쇼팽 ‘랑피’, 베토벤 ‘경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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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저희가 만난 적이 없어요. 여랑 피아니스트가 원곡의 악보와 템포에 충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스타일이라면 저는 기분에 따라 많이 좌우되는 편이에요. 그날 따라 연주가 달라져서 좋을 때는 한없이 좋은데 안좋은 날은 모두를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이어 “어디선가 ‘랑피는 쇼팽, 경피는 베토벤’이라는 평을 봤다. 그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김기경의 물음에 김여랑은 “전 원래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해서 아주 만족한다”고 답했다.

“클래식 연주처럼 피아노가 주선율이 아니니까 제 나름대로 잡아둔 범위가 있어요. 어느 한계까지 낮아질 건지에 대한 범위죠. 그 한계선에서 표현하기 가장 좋은 게 쇼팽이죠.”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은 “사실 전 학교 다닐 때랑 굉장히 달라졌다”며 “(진보적인 그룹에 속했던)리스트, 프로코피예프를 해석했었는데 베토벤이 강렬해서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김기경의 말에 김여랑은 “저는 사실 베토벤을 안좋아한다”며 “제 정서랑 안맞는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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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들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그래서 배우분들께 베토벤, 쇼팽, 바하, 리스트 등을 연주하는 신에서 베토벤 부분을 짧게 듣고 끊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는데 언젠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왜 베토벤을 짧게 끊냐’는 질문을 받은 후부터는 베토벤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이제는 편애할 수 없으니까요.”

베토벤에 대한 김여랑의 말에 김기경은 “저 역시 베토벤을 끝까지 연주한 적이 별로 없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아마도 입시에서 너무 많이 연주했던 기억이 남아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저는 리스트에서 칠게 별로 없어요. 쇼팽이랑 같은 시대에 음악을 했지만 전혀 다른 작곡가로 인식돼 좋아했던 작곡가인데 왜 그런 건지 좀 신기해요.”

이어 김기경은 피아니스트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클래식 음악은 길다 보니 한번에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는 극적 구상”이라며 “콘셉트나 구상을 놓치지 않고 집중력을 끝까지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완성돼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여랑은 소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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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기경(사진=강시열 작가)
“제가 생각하는 소리를 관객들도 똑같이 생각할까 늘 고민해요. 이번에 뮤지컬을 하면서는 그래서 좀 궁금해요. 클래식 공연장에서도 마이크를 쓰기는 하지만 뮤지컬 무대는 좀 다른 음향장치를 쓰고 (음향장치가) 훨씬 더 많기도 하거든요. 제가 내려고 했던 소리들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지가 늘 궁금해요.”

그리곤 “관객과 배우, 피아니스트가 어우러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털어놓는 김여랑에 배우이자 관객으로 무대에 존재하며 배우의 감정, 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피아니스트에 대해 김기경은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피아니스트는 피를 잘 돌게 하기 위해 탄탄해야 하는 심장 근육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뮤지컬을 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누구나 늘 선택의 기로에 서죠. 그럴 때마다 머리 보다는 가슴을 따르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보면서 체험하고 있어요. 가슴을 따라가면 후회는 없다는 걸 매회 무대를 보면서 깨닫고 있거든요.”

그리곤 “끌리는 걸 따라가면 실패해도 ‘다음에 더 좋은 걸 하면 되지’하게 되는데 머리를 따라가면 ‘그때 그걸 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가 남는다는 걸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느끼고 있다”며 “피아니시트는 레퍼토리를 만들고 결정하는 일이 많은 직업이고 그게 곧 능력이다. 내가 가진 틀을 깨면서도 ‘나를 치고 가는’ 걸 확실히 선택해야 한다는 걸 배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김여랑은 “협업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고 밝혔다.

“저는 누군가와 같이 하는 게 진짜 처음이에요. 처음엔 혼자만 하다가 누군가와 감정 을교류하는 자체가 어려웠는데 언젠가부터는 너무 재밌어졌어요. 배우들이 저를 보고 저도 그들의 눈을 맞추다 보면 관통 당해요.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음 하나 하나에 실어 연주하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있죠.”


◇피아노는 어떤 악기인가요?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과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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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마음을 움직이는 악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걸 많이 느꼈거든요. 지금까지 제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유기도 해요.”

극 중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던지는 질문을 빗대 “피아노는 어떤 악기인가요?”라는 물음에 김여랑은 “마음을 움직이는 악기”라고 답했다.

“제가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공연) 중간에 바흐의 ‘샤콘느’를 쳐요. 제겐 매우 특별한 곡이죠. 대학 입학과 동시에 피아노를 1년 정도 쉬었어요. 제가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거든요. 피아노는 제가 좋아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어머니의 꿈이었어요. 태어나자마자 ‘넌 피아니스트야’라고 정해져 있었죠.”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길로 자꾸 몰아세우는 어머니와의 부닺힘이 잦았던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에 입학한 김여랑은 1년 간 휴대폰도, 콩쿠르 준비도, 피아노 연주도 일절 끊고 시골로 숨어들었다. 그의 표현대로 “성인이 된 후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었다.

“지금은 어머니께 감사드리지만 그때는 피아노가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그렇게 모든 걸 끊고 1년여를 보내던 어느 날 산속에서 교회를 만났어요. 안에 들어갔는데 피아노가 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죠. 좋은 피아노도 아니었는데 문득 연주가 하고 싶어졌어요. 피아니스트는 하루이틀만 연주를 안해도 손가락이 안움직이는데…제 손가락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피아노를 안치고 있었어요.”

아무도 없는 작은 교회 안 그리 좋지 않은 피아노에 앉은 김여랑은 “뭘 쳐야할지도 모를 정도”인 상태에서 바흐의 ‘샤콘느’ 전반부를 반복해서 연주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앞의 반쪽 정도는 메인 멜로디만 있어도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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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스트 김기경(왼쪽)과 김여랑(사진=강시열 작가)

 

“되게 행복했어요.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서 울면서 계속 연주를 했죠. 그 후로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곡이 ‘샤콘느’예요. 그 곡을 ‘라흐마니노프’에서 짧게나마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제가 느낀 그 행복을 어떻게 관객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고 생각해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잖아요. 분명 힘든 관객들이 계실테니까요.”

그 산속 교회에서 ‘샤콘느’를 연주하면서 느꼈던 감동과 벅찬 행복감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김여랑에 김기경은 피아노에 대해 “사람 같은 악기”라고 표현했다.

“다들 다르거든요. 좋은 악기라고 해서 연주해보면 저한테는 안좋을 수 있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어떻게 만날지 예측 불가능한 악기기도 해요. 그날의 피아노 상태에 따라, 또 제 상태에 따라 전혀 달라요. 변주곡인 ‘샤콘느’처럼 변화무쌍한 악기죠. 그런 면이 정말 사람 같아요.”

그리곤 “저음부터 고음까지를 아우르며 사람을 중성화시키는 악기라는 생각도 든다”며 “내 감정이나 생각의 폭, 한계를 많이 없애주는 악기”라고 정의했다.

“20대 초반에는 군 면제를 위해서 각종 콩쿠르에 참가했고 경연을 위해서 연습한 것 같아요. 얻으려던 걸 취하고 나니 회의감이 들어서 저 역시 1년 정도 선교단체에서 활동했어요. 피아노를 완전히 놔버렸죠. 3개월 정도 지나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친 곡이 쇼팽 ‘협주곡’이었어요. 교회에 있는 전자 피아노였는데 옥타브가 갑자기 올라가면 루프가 걸리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렇게라도 연주를 하니 너무 좋더라고요. 교회에서 듣던 분들도 너무 좋아해주시는 걸 보면서 클래식 음악이 가진 힘을 느꼈어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도 오래 사랑받으며 극이 가진 힘을 발휘하면 좋겠어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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