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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시니어] 열사의 뜻 계승하자

<시니어 칼럼>

입력 2023-11-23 13:03 | 신문게재 2023-11-2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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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권명예기자
전태권 명예기자

지난 17일 정부는 84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순국 선열 후손을 발굴해 포상했고, 박종철 열사를 기념하기 위한 ‘박종철 센터’ 개관식을 개최했다.


1987년 서울대 재학중 하숙집 소재 관악구 대학동 대학로 5길 인근에 위치한 근린시설을 리모델링해 민주주의 문화 센터를 ‘박종철 센터’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2018년 1월 13일에는 박종철 열사가 실제로 거주했던 하숙집과 서울대 통학 도로를 ‘박종철 도로’로 지정하기도 해서 의미가 더욱 컸다.

박종철 센터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의 연면적 31387㎡ 규모로 건립되었다.

센터 지하 1층은 다목적 강당, 1층은 옥외 휴게 공간, 지상 2층은 기획 전시실 및 사무공간, 지상 3층은 상설 전시실이 꾸며졌다. 전시실에는 박종철 열사의 생전모습 사진, 자필 편지, 일기 등을 전시해서 열사의 삶과 민주주의 운동의 서사적 연대기를 엿보는 특별한 곳이 되었다.

이날 박종철 센터 개관식에는 박준희 관악구청장, 전태일 열사 기념관, 이한열 열사 기념관 등 유관기관 관계자 70여명이 참석했다. 향후 박종철 센터는 전시와 연구 교육, 체험 프로그램, 다양한 문화 예술 사업 등을 펼칠 예정이란다.

사람은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명언이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화 열망이 너무나 컸고 순수했던 대학생들의 정의로운 민주화 의협심이 희생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대학생들 시위 관련 참고인 신분으로 끌려가 민주화의 외침 속에 조사를 받던 중 데모 주동자, 데모 계획 등을 끝까지 밝히지 아니한 의리를 지켜낸 결과 물고문까지 당하면서도 민주화의 당위성을 진술하다 안기부 남영동 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해 장례식도 치르지 못다고 1987년 1월 16일 강제 화장되어 샛강에 뿌려졌다.

그 때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수년이 흐른 지금도 절로 한숨이 나온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의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 진상폭로로 세상에 밝혀졌고 법무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이 일시에 경질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고 전두환 정권의 민낯이 드러났다. 결국 6·10 만세 민주화 항쟁 사건 발생 기폭제가 되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희생 덕분에 1987년 12월 17일 제 13대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져 당신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36.7%(김대중 28%, 김영삼 27% 김종필 8.1%)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계속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1988년 2월 25일 새로운 헌법 시행으로 민주화의 새싹이 텄고 정의로운 대학생들의 민주화 열망, 숭고한 희생의 대가였음을 누구도 부인 못할 역사적인 진실이었다.

우리나라는 많은 부분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현재 당면한 국내외 정치 경제 외교 등 현실과 미래 경쟁 속에 나가야할 우리의 방향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현재의 정치인들도 역지사지의 생각으로 당리당략을 뒤로하고 국가의 민주화를 만들어낸 순국 선열과 열사들의 값진 희생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전태권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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