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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유쾌한 사별

입력 2024-05-02 14:03 | 신문게재 2024-05-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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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교수
전영수 한양대국제대학원 교수

일본드라마 ‘봄이 되면(春になったら)’을 봤다. 2024년 신년벽두에 내보내기엔 좀 부담스런 주제를 다뤘다. 3개월 후 결혼하는 딸과 3개월의 여명선고를 받은 아빠가 주고받는 웃음과 눈물의 홈드라마다. 석달의 시간뿐인 부녀에게 닥친 일종의 죽음준비다. 마냥 슬프진 않다. 소소한 삶과 관계성이 죽음이란 이별화두 앞에서 웃프게 재구성된다.


슬프나 유쾌한 죽음준비란 의미다. ‘어쩌면 내 얘기일 수도’라고 떠올려보면 더욱 구구절절 눈물샘을 자극한다. 누구든 죽고, 언제든 닥칠 일인 까닭이다. 죽음준비의 정리활동을 뜻하는 ‘슈카츠(終活)’란 단어가 자리잡은 일본답다.

한국에선 도전적인 장면일 듯하다. 이질감과 위화감 탓이다. 엄숙해야 할 죽음을 가볍고 우습게 다뤘다는 비난마저 염려된다. 실제 개그요소가 적잖다. 아빠역을 개그맨이 맡았고, 극중 딸의 예비남편 직업도 개그지망생이다. 죽음과 웃음을 뒤섞은 꽤 의도적인 배치다. 준비된 죽음이 필요할뿐더러 사별이 무거울 이유도 없다는 메시지를 위해서다. 때문에 스토리는 무거운 죽음과 가벼운 웃음이 묵직한 감동과 섬세한 힐링으로 교차된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한국적 인식으로는 사뭇 불편하고 위험하다. 그럼에도 시사점은 확실하다. 죽음을 회피·경계하기보다 수긍·대응하자는 쪽이다. 본인·가족부터 사회까지 황망한 충격보다는 준비된 이별이 여러모로 낫기 때문이다.

한국도 초고령화가 시작됐다. 다사(多死)사회의 개막이다. 베이비부머의 초고령화로 죽음증가는 피할 수 없다. 죽음이 주요논제·시대화두로 떠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묵직한 사별의 일상화에 가깝다. 다만 이대로면 애끓고 엄중한 죽음맞이로 귀결될 처지다. 따라서 터부시된 죽음문화가 과연 상식이고 정상인지 되물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고강도의 아픔일지언정 줄일 수 있다면 경감책을 쓰는 게 나은 법이다. 드라마도 덜 고통스런 죽음을 위한 3개월의 준비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천수를 병치레 없이 누린 호상(好喪)처럼 예측·준비된 죽음은 슬픔을 덜어낼 수 있어서다. 죽음준비의 목적이다. 일본사회가 뜨거운 공감·반향 속에 죽음준비를 흡수한 배경이다.

죽음은 어렵고 힘들다. 한국사회는 더 그렇다. 핏줄중심의 혈연주의가 공고한데다 자기책임의 가족복지가 강력해서다. 가족이야말로 영원한 운명공동체다. 힘겨운 가족분화 탓에 멤버운명은 망하든 흥하든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만큼 연대감과 의존성이 짙고 강하다. 죽음은 이것과의 결별을 뜻한다. 감정적인 슬픔만큼 실존적인 상실도 크다. 계속해서 받아들이기엔 불편·불안·불만이 상당하다. 지배질서로 안착한 가족주의와 다사사회가 부딪히는 까닭이다. 공론화를 통한 최적화된 죽음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사전준비가 필수다. 준비가 없을 때 황망함이 커지듯 미리미리 대응하면 후폭풍은 줄어드는 법이다.

통칭하면 ‘웰다잉’이다. 잘 죽는 방법을 익히고 행해 충격을 줄이고 없애는 취지다. 대놓고 다함께 논하는 죽음준비로 슬프지만 꿋꿋하게 닥칠 수밖에 없는 이벤트를 맞자는 얘기다. 더욱이 죽음을 마주할 때 삶도 달라진다. 더 맑고 밝은 알찬 하루하루를 안겨준다. 죽음의 재검토와 준비의 재구성은 다사사회의 숙명적 시대과제다. 불행히도 한국형 추가숙제마저 있다. 벌써 40%에 육박하는 1인 가구의 죽음준비가 그렇다. 가족조차 마뜩찮은 솔로·싱글인구의 다사현상은 특히 걱정된다. 심각한 사회문제답게 잉태할 파급충격이 엄청나다. 개인적 선택이나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될 운명이다. 방향은 ‘유쾌한(?) 죽음’을 위한 준비로 모아진다. 시간은 없고 파도는 높다.

전영수 한양대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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